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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by 박순우

기억나지 않는 아주 어릴 때부터 용돈을 받았다. 엄마는 구두쇠 중의 구두쇠였다. 무섭게 살지 않으면 대가족 살림을 꾸릴 수 없었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겠지만, 자식으로서는 무척 숨 막히는 일이었다. 용돈을 일찍 받기 시작했지만, 또래들에 비해 늘 적은 금액이었다. 용돈이 적기도 했지만, 씀씀이가 헤펐던 나는 한 달 용돈을 받으면 일주일 만에 홀라당 다 써버리고 나머지 삼 주는 쫄쫄 굶은 채 지내곤 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누구를 닮아 저 모양이냐고 말하곤 했다. 용돈을 계획 있게 아껴 쓰는 언니랑은 영 딴 판이었다.


사람 없는 방에 불이 잠깐만 켜져 있어도 금방 엄마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엄마는 자신의 지갑에서 십 원짜리 한 푼도 허투루 나가는 걸 보지 못했다. 흔한 과자 한 봉지 사주지 않았다. 한창 간식에 열을 올릴 어린 나이에 용돈은 자주 불량식품을 사는 데 들어갔다. 용돈으로 종이인형이라도 사서 들어오면 엄마는 돈을 허튼 데 썼다고 크게 화를 냈다. 사람은 돈이 없으면 안 된다. 땅을 파봐라 십 원짜리 한 푼 나오나. 돈 버는 게 쉬운 줄 아느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이다.


나이가 차오를수록 용돈도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엄마는 숨 막히는 액수만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 집이 그리 가난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도 엄마의 지갑은 크게 열리지 않았고, 용돈 이외의 어떤 돈도 허락되지 않았다. 아빠는 자식들에게 뒷돈을 쥐어줄 만큼 자식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돈이 생기면 자신이 쓰기에 바빴다. 엄마는 아무리 사정을 해도 천 원 한 장 더 주지 않았다. 나는 늘 허덕이며 살아야 했다. 행여나 천 원을 엄마에게 빌리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갚아야 했다. 집은 가난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늘 가난했다. 그 괴리감이 나를 불만 가득한 아이로 만들어갔다.


구도심에서는 어떻게든 버텨왔던 자존감은 중학교 때 신도시로 전학을 가면서 바닥을 치고 만다. 천성이 욕심이 많은 나는 아래를 보지 못하고 항상 위만 쳐다보았다. 신도시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두 여유 있어 보였다. 용돈도 넉넉하게 받고, 신상품도 척척 사는 아이들. 구도심에서 온 데다 물려 입은 낡은 교복에 브랜드 이름도 하나 모르는 나는 늘 '없는' 사람이었다. 성적은 뚝뚝 떨어지고, 돈은 없고, 친구와도 깊은 마음을 나누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하나둘 호출기에서 휴대폰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휴대폰이 너무 갖고 싶었던 나는 엄마를 졸라 생일선물로 제일 저렴한 폰 하나를 손에 쥐었다. 휴대폰 요금을 내가 내는 조건이었다. 안 그래도 적은 용돈에서 매달 휴대폰 요금까지 내려니 앞이 캄캄했지만, 너무나 갖고 싶은 마음에 덜컥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엄마는 단 한 번도 휴대폰 요금을 내주지 않았다. 나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요금을 내야 했기에 자주 저녁 급식비를 내지 않고, 빈 속으로 버텼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락실, 과외, 사진관, 판매점, 레스토랑 등 이십 대 때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견뎠다. 엄마 가게에서도 종종 일을 했다. 손님이 많을 때 엄마는 시급을 주며 내 손을 빌렸다. 아빠가 술을 먹고 뻗으면 배달은 내 몫이었다. 나는 종종 가게로 불려 가 포장을 하고 배달을 했다. 엄마는 정확하게 일한 만큼 시급으로 계산해 주셨다. 자식에게도 타인에게도 예외 없이 칼 같은 사람, 그게 바로 엄마였다. 어찌 보면 너무나 합리적인 사람이었지만, 엄마의 빈틈없는 모습은 자식인 나를 늘 숨 막히게 했다.


대학을 가서야 나는 내가 가난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나보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친구가 더 많았다. 나는 오히려 잘 사는 축에 속했다. 전학으로 구겨진 자존감이 그제야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제대로 펴졌다면 좋았을 텐데 우월감에 사로 잡혀 이상한 방향으로 펴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계급화하고 차림새나 사는 지역으로 평가했다. 겉으로 드러나게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속물처럼 생각하고 있는지.


그 괴물 같은 가면을 벗어던지기까지 꼬박 십 년이 걸렸다. 서른이 되어서야 더 이상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내 안의 적과 부단히 싸워야 했다. 가면을 벗은 뒤에야 내가 사실 유행에 둔감하고, 쇼핑을 싫어하며, 겉치레를 귀찮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따라가지도 못하는 유행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쇼핑을 수시로 하며, 어떻게든 비싼 걸 걸치려는 내 모습은 어떻게든 '있어 보이고 싶었던' 비뚤어진 욕망의 표출이었다.


그 후 십 년은 돈을 외면한 시간이었다. 모 아니면 도라는 듯 내 생각과 행동은 한순간 팽 돌아섰다. 돈이 싫었다. 돈이 지긋지긋했다. 괴물 같은 시간 속에는 돈의 영향이 꼭 들어 있었고, 나는 그 사실이 넌더리 났다. 돈은 싫지만 늘 필요했다. 그 마음을 꽁꽁 숨기고 돈에 관심 없는 척, 돈은 더러운 것인 양 굴었다. 물욕이 사라져 사고 싶은 건 없지만, 먹고살자니 돈은 어느 정도 있어야 했다. 돈에 대해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고 기약 없이 방치한 채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내 아이들이 내게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 용돈 받고 싶어요. 돈을 모르는 사람이 자식에게 돈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린 것이다. 알려준 적이 없는데도 아이들은 벌써 돈의 종류와 가치를 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 쓰고 싶어 한다. 아이들에게 지난주부터 적은 돈이지만 용돈을 주기 시작했다. 가족의 대화 소재로 자주 돈이 등장한다. 내 안의 돈도 아직 정리가 덜 됐는데, 돈 쓰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니.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자란 남편은 어릴 때부터 집안 사정을 잘 알았던지, 어머님이 돈을 주셔도 쓸 만큼만 빼놓고 나머지를 다시 돌려드렸다고 한다.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받아 쓰려했던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다. 타고난 욕심도 나와 다르게 많지 않아 자신이 넘볼 수 없는 건 애초에 꿈도 꾸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친정 엄마와는 너무나 다른 분이다. 부모 자식 간에 돈거래는 없다 하시면서 없는 형편인데도 한 푼이라도 생기면 자꾸 주시려 한다. 친정 엄마는 큰돈은 겁 없이 쓰지만 작은 돈을 잘 쓰지 않는 데 비해, 어머님은 큰돈은 잘 쓰지 않지만 작은 돈은 쉽게 쓰신다. 돈과 관련해 극과 극의 태도를 갖고 있는 두 분을 보면서 혼란스럽다. 무엇이 옳은가.


전혀 다른 기질을 갖고 태어난 데다, 완전히 다른 어머니 밑에서 자란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산다. 첫째는 남편을 닮아 꼭 필요한 곳이 아니면 돈을 잘 쓰지 않지만, 둘째는 어릴 적 나를 닮아 기분이 내키면 마구 쓰고 싶어 한다. 남편은 그런 둘째를 못마땅해하고 나는 마음대로 쓰게 두라고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경험만이 자신의 주관을 세운다 믿기에. 어릴 적 나 같은 둘째를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하다.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이 어른 행세를 하려니 힘에 부친다.


술은 적당히 마시면 기분이 좋지만 지나치면 건강을 해친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술에 대해 제대로 배우는 건 참 중요하다. 술처럼 돈도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돈의 속성과 투자에 대해 가르치려는 부모는 많지만, 돈에 대한 자세와 생각에 대해 가르치는 부모는 적은 것 같다. 양육자 역시 돈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일까. 이제라도 돈에 대한 건강한 생각을 쌓고 싶다. 돈의 유무를 떠나 너무 인색하지도, 너무 헤프지도 않은 사람이고 싶다. 돈을 이용하고 싶지만, 돈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다. 돈은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니, 많든 적든 그걸로 사람을 평가하고 싶지 않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방치해 둔 것도 다시 억지로 꺼내 재정립해야 하는 때가 온다. 지금 내게 돈이 그렇다. 아이들은 나의 말보다 나의 뒷모습을 보고 자랄 것이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전에 나는 내 안의 돈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까. 돈에 대한 건강한 사고방식이란 무엇일까. 그토록 꺼려왔던 돈을 이제야 정면으로 마주한다. 너무 늦지 않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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