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제주엔 물밀 듯이 이주민이 몰려오고 있었다. 숙소나 카페가 가장 흔한 선택지였으니 시작하려면 크든 작든 공사가 필수였다. 돈을 아끼기 위해 직접 발품을 팔아 소품이나 가구를 들이고 페인트칠을 하는 등 인테리어를 직접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 간신히 집을 다 짓고 나니 돈이 없었다. 돈도 없었지만 더 중요한 건 취향이 없었다. 남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을 다 짓고 나서야 집을 짓고 카페를 여는 게 취향을 따라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취향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 바로 취향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 나만의 취향을 가지려 노력한 적이 없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취향을 갖는다는 건 단시간 안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당장 카페를 칠하고 채워야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특별히 선호하는 것도 없다보니 누가 추천을 하면 그대로 따랐다. 주머니 사정에 따라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것들로 카페를 채웠다. 살 때는 괜찮아 보여서 이것저것 장만을 해도 합쳐 놓으면 잘 어우러지지가 않았다. 누군가 카페 컨셉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었다. 여행을 오래 다녔기에, 여행을 온 사람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히 쉬어가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취향이 확실한 사람들 뿐이었다. 나와는 다르게 이주민 중에는 선명하게 자신만의 취향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뚝딱뚝딱 인테리어를 직접 하고, 자신이 원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소품이나 그릇, 가구 등을 서슴 없이 들이는 사람들. 똑같이 직접 인테리어를 한다 해도 그들의 공간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저들은 어떻게 자신의 취향을 저리 명확하게 알까. 신기하기만 했다.
그제야 나는 취향이 분명한 사람이 부러워졌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명확히 알고 드러내는 사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취향을 좇는 사람. 그 취향이 가득 담긴 공간으로 타인을 초대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사람. 자신의 선택을 믿고 따르는 사람. 이주민 중에는 유독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타지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면 그런 뚝심이 있어야 하는 걸까. 그런 사람들이 보일수록 나는 자꾸 작아졌다. 서른이 넘도록 자신의 취향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대체 무엇을 놓치고 살아온 걸까.
오랜 시간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어릴 때는 늘 화가 나 있는 엄마의 눈치를 봤다. 엄마는 늘 나를 평가했다. 내 성적을, 내 그림을, 내가 한 모든 것들을. 엄마의 눈에 나는 늘 어딘가 부족한 자식이었다. 전학을 가서는 따돌림을 당할까봐 친구들의 눈치를 보았다. 내 선호를 알려하지 않고 친구들의 선호를 알아가느라 바빴다. 어른이 되어서도 눈치를 보는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의 선호를 드러내는 일이 내게는 타인으로부터 평가 당하는 일로만 여겨졌다. 그러니 타인의 취향이 나의 취향이었다. 비싸고 있어 보이는 것들이 나의 취향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나름 알을 깨고 나와 나만의 삶을 살겠다 다짐한 뒤에도 취향을 가지려 애쓰지는 않았다. 홀로 자취방에 나가 살 때에도 나는 나의 공간을 꾸미려 시도하지 않았다. 여유가 없는 생활이기도 했지만, 혼자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만족스러워 그 외의 무엇을 더하거나 빼려 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면서 장만한 혼수는 모두 엄마의 취향이었다. 아무리 줄인다 해도 살 게 워낙 많은 데다 하나부터 열까지 선택한다는 건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따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엄마가 사라는 걸 샀고, 하라는 걸 했다. 허례허식만 아니라면 좋았다. 내게 결혼은 크게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재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은 통과의례였기에. 나는 나를 지운 채 나의 결혼을 치렀다.
태어난 아기는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자 내게 그림을 그려달라 요구했다. 코끼리를 그려달라, 사자를 그려달라. 난감했다. 엄마가 되어서야 나는 노트 귀퉁이에 작게 끼적이는 낙서 한 번 제대로 해보지 않은 채 어른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 작은 낙서 하나로도 행여 타인에게 책잡힐까, 평가의 대상이 될까 나는 두려웠다. 자존감이 바닥인 사람에게 세상은 온통 칼춤 추는 사람들의 무대로 보였던 걸까. 나는 작은 그림 하나 내 손으로 그리지 못하는 바보 같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엄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지 못하는 아이는 끊임없이 나를 시험대 위에 올렸다. 그림을 그려주는 것조차 내게는 힘겹기만 했다. 그것마저 내게는 알을 깨고 나와야 가능한 일이었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여기에는 아이와 나 말고 아무도 없다. 나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 내가 어떻게 그리든 아이는 괘념치 않을 것이다. 나는 색연필을 잡고 아이가 요구하는 것들을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다. 그릴수록 그림은 제법 그럴싸해졌다. 다른 그림을 참고해 그리기도 하고, 내 생각대로 변형해 그려보기도 했다. 아이는 뛸 듯이 기뻐했고, 나는 점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아이들과 남편은 내가 그림을 꽤 잘 그린다고 생각한다. 전혀 예상해보지 못한 반응이었다.
나는 무난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무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빠지지도 않는 사람. 작은 그림만 못 그린 게 아니었다. 못 먹는 음식이 있다는 말도, 더는 술을 마시고 싶지 않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앞에서는 꾸역꾸역 먹고 뒤에서는 게워냈다. 듣기 싫은 이야기도 관심이 있는 척 듣고, 보고 싶지 않은 것도 흥미로운 척 보며 살았다. 내가 살아온 과거에 나는 없었다. 타인만 존재했다. 이십대 후반 열병처럼 뒤늦은 사춘기를 앓으면서 나는 내가 잃은 게 나 자신이었음을 알았다. 나는 나를 돌보고 살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열병을 앓고 여행을 떠나고 이주를 하고 아이를 낳으며 나는 나 자신을 돌보고 살피는 법을 조금씩 익혀갔다. 더 이상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타인을 보기 전에 나를 먼저 보려 노력했다. 삼십 년 넘게 지니고 있던 태도가 바뀌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 조금씩 조금씩 바꿔가야 하는 일이었다. 할 수 있다. 바꿀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이다. 흔들리는 순간순간 주문을 외우며 나를 다잡았다.
그렇게 십 년을 살아왔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취향을 선명하게 알지 못한다.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취향을 갖기 전에 편한 옷이 좋아져 버렸고, 취향보다 어느 순간 가치가 더 중요해졌다. 그러니 누가 내게 취향을 물으면 여전히 난감하다. 나는 제법 나를 알게 됐지만, 여전히 나를 모르기에. 취향이 뚜렷한 사람들 앞에 서면 여전히 어깨가 움츠러든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당당하고, 조금 더 나를 사랑한다는 것. 제대로 된 취향 하나 갖지 못하고 마흔이 넘어버렸지만, 이런 나의 존재가 그 자체로 내게는 더 없이 소중하다는 것. 당장 보이는 취향의 유무로 무시를 해서도 무시를 당해서도 안 된다는 것. 그걸 깨달았으니 되었다. 취향보다 더 귀한 걸 알게 되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이렇게 살다보면 언젠가 내게도 뚜렷한 취향이라는 게 생길지도. 생기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안아줘야지.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