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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Apr 20. 2023

꿀벌을 만난 아침

  그제 태풍급 바람이 부는 날, 이리저리 속절없이 나부끼는 애니시다를 바라보며 불안불안했다. 만발이 코앞인데 이리 거센 바람이 불다니. 작년 태풍 때처럼 가지라도 하나 부러지면 어쩐담. 그날 저녁 6시 무렵 거짓말처럼 바람이 딱 멈춰버리기 전까지 마음이 내내 콩닥거렸다. 잘 버텨줬으면... 다행히 애니시다는 폭풍같은 바람을 잘 이겨냈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 너무나 온화한 봄날을 맞아 활짝 피어났다. 길 가는 사람들마다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이름이 뭐예요, 물어오는 사람들.


  카페 문을 활짝 열고 오늘은 얼마나 피었나 싶어 애니시다 곁으로 다가갔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샛노란 애니시다 주위로 배경 음악처럼 윙윙 소리가 요란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디서 날아왔는지 열 마리는 넘어 보이는 꿀벌들이 바쁘게 꿀과 꽃가루를 채집하고 있다. 다리에 동글동글 말아쥔 꽃가루 빛깔이 샛노랗다 못해 주홍빛이다. 이리저리 꽃과 꽃 사이를 누비며 꿀을 빨아먹는 벌을 한참 보고 있자니 마음이 하늘에 동동 뜬다. 자세히 보니 눈은 매섭고 솜털이 난 몸통은 앙증맞고, 이리저리 정신 없이 날아다니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똥꼬발랄 어린이 같다. 우리집에도 두 명 있는데 말이지.


  벌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면 세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작년 유채꽃 축제에서 이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마침 벌이 너무 많이 사라지고 있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던 때였다. 사람들이 드문 곳으로 발길을 옮기니 고요할 줄로만 알았던 그곳에서 수십, 수백만 벌들의 합창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과 가만히 멈춰서서 그 소리를 오래오래 귀에 담았다. 지구가 살아 숨쉬는 소리인 것만 같았다. 생명들이 잉태하는 소리, 귀한 벌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비상하는 소리. 그날의 적정한 온도와 습도, 살랑이는 봄바람에 흩날리는 유채의 향, 거기에 더해진 꿀벌들의 노래까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누군가는 벌을 발견하면 기겁해 도망을 갈 지도 모르겠다. 사실 벌은 죄가 없다. 벌은 가만히 있는 사람을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 꿀과 꽃가루를 수집한다고 바쁠 뿐이다. 가까이에서 관찰해도 그리 위험하지 않다.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벌이 멸종하면 인간도 머지 않아 멸종한다고 하던데... 자연은, 모든 생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마흔이 넘어 가장 감사한 일은 예전에는 조각나 보이기만 했던 세상이 머릿속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마법이 펼쳐진다는 것. 또 하나의 눈이 생긴 것만 같은 감각이 선명해질 때면, 나이듦은 더 이상 재앙이 아니다.


  작년 유채꽃밭을 다녀온 뒤 마당에 수국을 돌담을 따라 쪼르르 심었다. 내가 심은 한 그루의 나무에서 피어난 꽃이 벌들을 살리는 기적이 될 수도 있다기에. 소박하지만 원대한 마음으로 삽질을 했다. 물론 남편이 했지만… 애니시다 옆에 나란히 자리잡은 수국들은 봄을 맞아 열심히 새 가지를 뻗고 잎을 키우는 중이다. 그 사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장미가 삐죽 가지를 뻗어간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꽃봉오리가 서너 개 달렸다. 곧 오월이라는 게 너의 존재로 더욱 실감난다.


  여기저기서 벌써 수국꽃이 피어난다는 소리가 들린다. 수국의 계절은 유월인데, 너무 바짝 시기가 앞당겨진 것만 같아 마음이 스산하다. 우리 마당의 수국들은 유월에 피어나기를. 자신의 생일날 즈음 수국이 만발한다고 기억하는 첫째의 마음을 배신하지 않기를. 초여름날 눈부신 초록이들 사이에서 피어난 부캐 같은 색색깔의 수국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수국이 피어나기 전에는 귤꽃의 차례가 자리하고 있다. 옆집의 귤나무에 하얀 귤꽃이 피어나면, 오월은 더할 나위 없는 향긋한 계절이 된다. 귤꽃 향기가 얼마나 향기로운지, 맡아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작은 유리병에 향을 옮겨담아 맡게 해주고 싶을 정도다. 지난 글쓰기 모임 시간에 귤꽃 향기에 대해 이야기를 잠시 나눴는데, 모두들 그 향을 떠올리며 정말 최고라고 입을 모았다. 그 향을 설명하자니 언어의 한계가 느껴진다. 내 언어의 한계일지도 모르나...


  꿀벌 덕분에 오늘의 글을 쓴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꽃의 향기를 따라 날아든 벌들을 바라보며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오늘 우리집을 찾아줘서 참 고맙다. 여전히 지구에 존재해줘서 고맙고. 긴긴 고난의 시간 끝에 꽃을 피워낸 애니시다를 사랑해줘서 고맙고. 친구들을 몽땅 데려와줘서 더더 고맙고. 배부르게 먹고 두고두고 먹을 수 있게 많이 가져 가기를. 귤꽃이 피고 수국이 피면 또 만나기를. 꽃이 좋아지면 나이가 든 거라던데... 좀 들면 어때.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제야 알아가는 것이라면 나이가 먹어서 참 좋다.


  잔인하고 슬프기만 한 사월은 사실 완연한 봄의 한복판. 이전처럼 마냥 슬퍼하고만 있지는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러기에 사월은 아무 죄가 없으므로.   


다리에 동글동글 말아 쥔 꽃가루가 포인트! 사랑스럽다. ©️박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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