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날벼락 같은 소식 하나. 내일 둘째 어린이집에서 딸기농장 체험을 가는데 가정에서 도시락을 준비하란다.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냐. 하루 전에 말이야. 가만 있어 보자. 그러고 보니 지난주 금요일 이번 주 계획안을 내가 꼼꼼히 보지 않았다. 급하게 열어본 계획안에는 떡하니 도시락이 적혀 있다. 내가 놓친 거로군. 냉장고에 있는 유부가 마침 생각난다. 아들 유부초밥 오케이? 오케이. 그렇게 오늘 아침 꼭두새벽 기상이 당첨되었다.
꼭 이런 날엔 잠을 설친다. 애들은 왜이리 발길질을 하고 내게 꼭 붙는지. 몸을 뒤척이지도 못한 채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여섯시반쯤 울리는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안방 문을 열어보니 어라, 남편이 아직 누워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 아침 출장이 잡혀 있어 이 시간쯤이면 집에서 나가야 하는데. 왜 이러고 있어? 결항이야. 헐. 그럼 어떡해. 사무실로 출근하래. 헐.
그러고 보니 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윈드시어 현상이 있는지 바람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여기저기서 거세게 들려온다. 비행기가 결항될 정도였나. 부랴부랴 주방으로 나와 밥부터 안친다. 나를 따라 줄줄이 내려오는 아이들. 왜 나와, 더 자지. 잠이 안 와. 소파에서 한 녀석은 책을 보고 한 녀석은 뒹굴댄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오늘을 어찌 버티려고 저러는지. 참 내가 쟤네 걱정할 때가 아니지. 나나 걱정하자. 저질체력 어쩌나. 밤엔 쓰러지겠군.
재료를 다듬고 볶고 넣고 비비고 또 넣고. 유부초밥을 다 만들고 네 가족 둘러앉아 각자의 몫을 입에 쑤셔 넣는다. 일찍 일어나서 그런가. 아침치고는 아이들이 밥을 꽤 잘 먹는다. 정작 나는 잘 안 들어가는데. 도시락도 싸고 간식도 싸고. 아이 두 명 물병도 챙기고.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도 씻고 옷 갈아입고 차례로 등원, 등교를 했다. 설거지를 하고 씻은 뒤 서둘러 카페로 나간다. 오늘은 글쓰기 모임이 있는 날.
아홉시반 모임인데 아홉시부터 멤버들이 카페에 들이닥친다. 참 부지런한 사람들. 모임을 향한 멤버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팔팔 물을 끓이고 주말에 볶은 신선한 케냐 더블에이를 갈아 필터에 넣고 입으로는 멤버들과 수다를 떨며 드립을 내린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피를 각 잔에 따라주고, 인쇄물을 나눠갖고 연필도 한 자루 챙겨서 자리에 앉는다.
오늘은 합평을 하며 내가 할 말이 많지 않았다. 보통은 그래도 더하고 뺄 게 있었는데, 이번 글은 모두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글을 써냈다. 색깔이라는 글감의 힘일까. 각자 자신만의 메타포를 사용해 오롯한 글을 써냈다. 이번 글 합평을 준비하며 그동안 적은 글을 모아 함께 독립출판을 해서 근처 작은 서점에 납품을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스쳐갔다.
모임 말미에 슬쩍 생각을 꺼내니 한 멤버는 재밌겠다며 흔쾌히 긍정을 하고, 두 멤버는 고민이 좀 더 필요해 보인다. 우리끼리 쓸 때와 세상에 내놓는 건 판이하게 다르지. 필명으로 쓴다 해도 누군가에게는 무척 두려운 일일 것이다. 내 마음은 이미 퇴고를 마치고 인쇄에 들어갔지만, 서두르지 말자 기다림이 필요하다 되뇐다. 만장일치가 아니라면 진행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
모임이 끝나고 카페 문을 열었다. 바람이 심상치 않다. 태풍급인데. 손님이 있으려나. 일어나고 보니 멤버 중 하나가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왔다. 이렇게 신고 온 거예요? 헉 뭐야. 나 이제 알았어. 이러고 어린이집도 갔는데.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지 주저 앉아 웃는 멤버. 나머지 멤버들도 너무 재미난 상황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아침에 딸아이가 등원을 거부해 어르고 달래다 모임에 늦을까봐 급하게 집에서 나왔다더니. 어지간히 정신 없는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웃기기도 하지만 짠하기도 하다. 글 쓰는 엄마의 삶은 이렇게 치열하다. 두고두고 회자될 에피소드 하나의 탄생.
태풍급 바람에 갈 곳이 없는지 손님이 제법 있다. 책축제 때 아이들에게 전해줄 고민에 대한 답장 초안을 퇴고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손님을 치르며 중간중간 눈과 손을 바삐 움직인다. 내게는 일흔 명 가까운 아이들에 대한 편지지만, 아이들 하나하나에게는 오직 단 하나의 답장일 것이기에. 단 하나도 허투루 쓸 수가 없다. 고되지만, 아이들 고민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말을 더 부드럽게 고치고, 응원을 한껏 더한다.
아이들이 귀가하고 카페 문을 닫고, 간식을 챙기고 첫째 받아쓰기 연습 숙제를 불러주었다. 내일 책 읽어주기 활동 책을 다시 읽어보고 활동 자료를 뽑고,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거짓말처럼 바람이 잠잠하다. 남편이 귀가를 했다. 출장은 내일 간단다. 그때 갑자기 선생님께 온 연락. 책축제 때 나눠 줄 책목록을 아침에 넘겼는데, 그 중 두 권이 절판이란다. 책 주문을 빨리 해야 하는데. 밥을 하다말고 책을 확인해 변경할 책을 찾고. 밥을 먹으면서도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찾고 또 찾고. 간신히 대체할 두 권을 정해 연락을 한다. 이걸로 주문해주세요. 늦게까지 고생하시는 선생님께 참 감사하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개고 노는 시간이 적었다고 징징대는 첫째를 달래 재우고. 다시 한번 아이들에게 적은 답장을 들여다본다. 더 고칠 건 없을까. 이 정도면 된 걸까. 인쇄 작업을 해도 될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얼룩소를 들어간다. 무슨 글이 있나. 이것 저것 읽다보니 빨래가 다 됐다는 세탁기 소리가 들린다. 빨래를 널고 나니 열 한시가 다 되었다. 오늘 하루도 참 바쁘게 살았구나.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좀체 오지 않는다. 일찍 시작한 하루라 금세 곯아떨어질 것만 같았는데. 정신이 또렷하다. 내일은 책 읽어주러 학교에 가는 날. 아이들과 함께 할 활동을 머릿속으로 되짚는다. 내일 읽을 책은 생각에 관한 책. 생각이 어떤 것인지. 생각의 힘이 무엇인지. 생각으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차분히 알려주는 책이다. 내일은 아이들에게 생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짧게 써보라고 할 예정. 처음 해보는 활동이라 설렘 반 걱정 반이다. 어떤 이야기를 덧붙이면 좋을까 싶어 머리가 복잡복잡하다.
아인슈타인이 빛의 속도에 대해 생각한 십 년에 대해 이야기해줄까. 내가 열 살 때 생각의 힘으로 미지의 공포를 물리쳤던 이야기를 들려줄까. 작가들이 책을 쓰기 전 가장 많이 하는 게 생각이라는 이야기는 어떨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생각에 대해 더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싶어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보다 내가 더 신이 난 것도 같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더 집중해서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내일도 아침부터 정신 없는 하루가 되겠구나.
잠이 오지 않는 밤, 생각과 할일만 많고 내 글은 못 쓴 날, 일기 같은 글을 중얼대며 하루를 정리한다. 내일은 또 얼마나 우당탕탕 좌충우돌하는 하루가 될까. 그 혼란한 일상에서도 글이 있어 차분해질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이렇게 내 글도 하나 쓰고 나니 이제 정말 하루를 마무리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수고했다. 내일도 또 열심히 살아보자. 모두들 수고 많으셨어요.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