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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Apr 17. 2023

색이 알려준 삶의 순간들

"네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뭐야?"


  내 생애 처음으로 색 선호도에 대한 질문을 받은 건 아홉 살 무렵이었다. 학교 운동장 철봉에 대롱대롱 매달려 이 질문을 받았다. 나는 공중에서 세상을 바라보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대답을 했다.


"연두."


 때는 봄이었을까. 계절은 기억나지 않는다. 밖에서 놀아도 춥거나 덥지 않았던 걸 보면 봄이었을 확률이 꽤 높다. 나는 자연스레 연두를 입 밖으로 꺼냈다. 그때부터였다. 연두에 대한 책임감이 느껴진 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혼자 간직하고 있을 때와 누군가에게 드러내 보였을 때는 확연히 다르다. 말에 책임감이 더해지면서 더 좋아해야 할 것만 같고, 더 좋아진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 잡힌다.


  사람뿐만 아니라 색도 그랬다. 색일 뿐인데도 그랬다. 그때부터 줄곧 내게 연두를 포함한 초록 계열은 가장 좋아하는 색이었다. 연두, 초록, 청록, 진초록, 민트, 하늘, 파랑에 이르기까지 푸른색이 좋았다. 첫째는 어릴 때부터 줄곧 빨강을, 둘째는 노랑을 좋아한다. 아이들을 보면서 색깔을 좋아하는 데도 기질이 작용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내게 초록도 기질에 맞는 색이었을까.


  '색깔'은 이번 오프라인 글쓰기 모임의 글감이었다. 어느덧 스물두 번째 글감이다. 세상엔 참 글감이 차고 넘친다. 색깔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한 번쯤은 썼을 법한 글감이 이제야 튀어나왔구나. 얼마나 많은 단어로 글을 쓸 수 있는 거야! 합평을 준비하며 멤버들의 글을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곱씹으며 읽어 내려갔다. 신기하게도 글은 정확히 두 개의 색상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은 초록이었고, 다른 한쪽은 분홍이었다.


  글에 드러난 색은 단지 색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색은 그 색을 담은 공간을 동반하고 그 공간과 함께한 순간이나 시절, 의미까지 함께 지니고 있었다. 내게 초록은 오랜 시간 머릿속에만 담아 온 비밀 풍경이었다면, 누군가의 초록은 너무나 사랑하지만 곧 떠나보내야 하는 공간의 기억이었다. 분홍은 누군가에게는 봄날의 찬란한 빛이자 인생의 봄날을 보내고 있는 딸아이를 상징하는 색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유년 시절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절대 골라서는 안 되는 색이었지만 반대로 그 딸에게는 거침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힘의 상징이었다. 비슷한 색으로 갈린 듯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한 글들을 바라보며, 함께 쓰는 것에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느낀다.


  우리가 색을 볼 수 있는 건 영장류의 발달한 시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태양 덕분이기도 하다. 빛이 있기에 수많은 색들이 비로소 존재한다. 자외선, 적외선, 가시광선... 인간은 그중에서도 오직 가시광선만을 볼 수 있다. 가시광선 안에는 무지갯빛을 뜻하는 일곱 가지 색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 없는 수많은 색들이 사이사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 구별할 수 있는 색의 수는 1만 7천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가시광선만으로도 우리는 이렇게 다르게 색을 바라보고 다르게 삶을 향유하고 있는 것.


  동물도 인간과 비슷한 세상을 살아간다 여기기 쉽지만 사실 종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을 보며 살아간다. 개는 세상을 흑백으로 바라보고, 고양이는 아주 소량의 빛만으로도 세상을 분간할 수 있다. 매는 낮에는 최고의 시력을 가진 동물이지만 밤에는 거의 사물을 구분하지 못한다. 뱀은 적외선을 볼 수 있어 세상을 투시하듯 바라본다. 개구리는 움직이지 않는 건 보지 못하고, 겹눈을 가진 곤충은 세상을 모자이크처럼 바라보지만 움직임을 더 과장되게 느낀다.


  봄날 풀밭 위에서 나풀거리는 한 쌍의 나비를 볼 때면 기적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비는 자외선을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넓은 세상에서 용케도 자신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나비를 찾아내 번식을 한다. 인간에게도 지구는 넓고 넓은데 하물며 작고 작은 나비에게 이 세상은 얼마나 넓은 곳일까. 그런데도 자외선을 이용해 같은 종을 찾아내고, 고집스럽게 순종으로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비를 볼 때면 경이롭다.  

  

  색에 대한 글을 쓰고 색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유난히 다른 글들에 비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색은 색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그 색이 칠해진 공간의 질감과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에세이를 쓰면서 알게 된 하나는, 인간은 오감이 열려 있을 때 살아있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오감을 모두 열고 세상을 마주할 때, 세상을 오롯이 내 안으로 끌어당기며 감각할 때, 그 순간과 그 순간을 만끽하는 나를 경험한다. 그런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세상은 더 천연색으로 빛나고, 삶은 더 충만하다 여겨지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멈춤이 필요하다. 흘러가는 게 아니라 멈춰 서서 지금 이 시공간을 고스란히 내 안에 새기는 순간이 절실하다. 오감을 열어 세상을 빨아들이는 순간을, 언젠가 절실히 그리워질 순간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만이 나를 살게 하고 살아있게 하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홀가분함을 가져다줄지도. 그리운 순간이 될 거라는 예감은 곧 지금 가장 행복한 순간을 지나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이기에. 매일 1분이라도 그런 순간을 만들겠노라 다짐한다. 오감을 활짝 열어두고 지금을 살아있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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