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취향 시리즈다
취향이라는 단어에 꽂힌 뒤 줄곧 취향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늘 이런 식이다. 이것저것 글자들을 읽어내려가다가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단어 하나가 불쑥 도드라져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별 생각 없이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듯, 같은 단어를 반복해 굴려본다. 대개 내게서 나오는 글이란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들이다. 단어에 홀린다고 해야 할까. 최근에 ‘흔적’이 그랬는데, 이번엔 ‘취향’이다. 나는 왜 이 단어에 꽂혔을까.
사실 취향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자주 눈물이 차올랐다. 마음 편히 살고 싶어 이주를 했지만 초창기 제주에서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름 알을 깨고 나왔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타인과 나를 많이 비교할 때였다. 타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을 때였고. 그러니 취향이 뚜렷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자꾸만 위축되고 있었다. 카페 매출도 비슷한 시기에 오픈한, 취향이 분명한 다른 카페들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이렇다 할 취향은 없었지만 나에게는 대신 사업 수완이 조금 있었는데, 그게 지금의 나를 먹여 살리는 시그니처 메뉴다. 커피만으로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 같아 지역 특산물로 메뉴를 개발했다. 당시에는 특산물이지만 지금과 달리 외부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식재료였다. 개인적으로 맛을 보고는 너무나 상품 가치가 있는 식재료라 생각해 카페 메뉴에 넣기로 한 것이었다. 섬으로 이주하기 전에 계획한 일이었다. 유명한 맛집의 레시피를 알고 있었고 이를 특산물과 접목해 새로운 메뉴를 만들었다.
세상에 없던 메뉴를 선보였더니 여기저기서 시기질투를 해왔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지역에서 카페를 오픈한 사람은 대놓고 가시 돋힌 말들을 흘리기도 했다. 지인을 동원해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고. 눈치가 빠른 나는 그 충격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받아야 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슈가 되는 메뉴를 만들어낸 게 눈엣가시였을까. 그 상처는 깊고 깊었다. 잘 살아보겠다고 터 잡은 곳에서 받은 시선이었으니, 평판이 두려워 대놓고 반발도 하지 못했으니.
아이를 낳고 카페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차라리 잘 됐다 생각하며 집으로 숨어들었다. 상처를 받기 싫어서 이곳에 왔는데, 취향이 뚜렷한 사람들 속에 있자니 자꾸 상처를 받고 있었다. 아기를 돌본다는 핑계로 나는 더욱 집에만 머물렀다. 그 무렵 대인기피증 같은 게 찾아왔던 것 같다. 아이를 돌본다고 정신 없이 바쁘면서도 사람과 엮이지 않으니 마음만은 점점 편해졌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사람이라 한동안은 육아에만 온 정신을 쏟았다. 어린 아이들은 엄마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동시에 무한한 사랑을 준다. 아마도 그 사랑으로 조금씩 마음을 치유했던 것 같다.
남편은 홀로 카페를 돌본다고 분주했다. 가장 장사가 잘 된다는 오픈 2-3년차였다. 시그니처 메뉴가 제주 관련 웬만한 매체에는 다 실리면서 손님들이 몰려왔다. 취향 없는 카페는 그렇게 시그니처 메뉴로 점점 이름을 알려갔다. 그때는 장사가 잘 되는지도 몰랐다. 장사가 처음이었고 최대 매출이 얼마까지 나올 수 있는지 가늠할 줄도 몰랐으니.
섬은 육지와는 다른 문법으로 굴러가는 곳이었다. 카페라는 사업이 무엇에 의해 돌아가고, 어떻게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지 그때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낯선 곳에서 새 삶을 시작했고 두 아이가 태어났고 먹고 살아야 했으니 뒤돌아보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만 보며 살았다. 상처를 잊는 데도 그게 제일이었다. 통장에 들어오는 카드 매출도 제대로 살피지 않았고, 카페 살림은 오로지 남편 손에만 맡긴 채 나는 집에만 처박혀 두 아이를 홀로 돌봤다.
육아의 세계는 답이 없는 전쟁터지만,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세상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내 상처는 그렇게 조금씩 아물어갔다. 그런데도 취향에 대한 글을 쓰면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그때 받은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았나보다. 그래서 내가 취향이라는 단어를 흘려보내지 못한 거로구나. 글을 쓰면 그제야 안다. 내 안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이고, 지금은 얼마나 아물었는지.
내 상처부터 어루만진 뒤 다시 취향이란 단어를 들여다본다. 이번엔 좀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취향이 없다고 말했지만, 과연 취향이 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취향이 드러나는 분야가 사람마다 다른 건 아닐까. 왜 취향이 있는 사람이 더 근사해 보일까. 내가 유독 고집하는 내 취향은 무엇일까. 그 취향은 내 것이 맞을까. 타인의 취향은 온전한 그 사람의 것일까. 우리는 취향을 강요하는 사회를 살고 있지는 않은가. 취향을 갖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취향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나는 취향에 대해 홀로 만 자 이상을 끼적인 뒤에야 비로소 취향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어쩌다 보니 개인사를 넘어 취향 시리즈. 취향에 대한 이야기를 두 편쯤 더 이어 나가볼까 한다. 그러고 보니 개인사가 취향 시리즈의 프롤로그가 된 격이구나. 나는 내 지난 삶을 취향을 파헤치는 데 바치고 말았다. 이럴려고 나를 장악하고 있었구나. 취향이라는 두 글자. 너를 한 번 끝까지 따라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