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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May 01. 2023

오름은 옳다

 오름을 사랑한다. 제주에는 화산활동으로 생긴 오름이 368개나 있다. 그 중 절반 이상이 제주 동쪽에 위치한다. 제주 어디를 가나 여기저기 언덕처럼 솟아있는 오름을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아는 사람들만 갔다면 요즘은 관광객들에게도 그 아름다움이 많이 알려져, 이름 난 오름을 지나가다 보면 오름을 찾은 여행객들이 쉽게 눈에 띈다.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운동도 할겸 좀 높은 오름을 올라보기로 했다. 오름 중 가장 높은 오름은 이름도 정직한 ‘높은 오름’, 두 번째로 높은 오름은 ‘다랑쉬 오름’이다. 다랑쉬 오름은 제주 설화에도 등장하고, 생김도 우아해 ‘오름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제주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 집에서도 무척 가깝다. 하지만 꽤 높은 오름에 속해 평소 쉽게 발길이 향하진 않는다.


  요즘 운동량이 너무 적은 것 같아 내친 김에 다랑쉬 오름을 올라보기로 했다. 오름은 사실 아무리 높다 해도 그 높이가 200m를 넘지 않는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게 힘겹지만 15-20분만 올라가면 금방 정상에 당도한다. 제주에는 높은 건물이 거의 없다 보니, 조금만 올라가도 제주 절반쯤은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숨막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오름을 오르는 건, 노력 대비 만족도가 가장 높은 제주 여행 방법 중 하나인 것.


  다랑쉬 오름은 오름 중에서도 높은 편에 속하지만, 그 높이는 382.4m에 그친다. 다른 오름에 비하면 높지만, 사실 육지에 있는 여러 산들에 비하면 언덕 수준인 것. 그런데도 오랜만에 산행이라 큰 마음을 먹고 아이들과 발걸음을 옮겼다. 봄과 가을은 오름을 오르기에 너무나 맞춤인 계절이다. 봄은 각종 꽃들이 만발하고 연둣빛 잎들이 돋아나 아름답고, 가을은 햇살에 하얗게 부서지는 억새가 무리지어 바람에 살랑이는 풍경에 넋을 놓게 된다.



오름을 오르다 만난 풍경. 왼쪽부터 지미봉, 우도, 두산봉, 그리고 성산일출봉, 바로 앞 아끈다랑쉬 오름까지. ©️박현안


  다랑쉬 오름은 유명한 오름답게 길이 무척 잘 닦여 있었다. 올라가는 내내 만발한 철쭉이 반겨주었다. 꽃길을 걸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다 보니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름을 오를 때에는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얼마나 올랐는지, 풍경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면 좋다. 정상에서는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하는 궁금증에 더 열심히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오름이 오르는데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20분 정도 걸린다면, 다랑쉬 오름은 그보다 조금 더 긴 30분 남짓이 걸렸다. 올라가면서 숨이 차오르는 만큼 땀도 차올라, 입고 간 겉옷은 각자 허리에 둘러매고 천천히 정상으로 향했다. 마침내 도착을 하고 나니 한라산부터 성산일출봉까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오름 아래에는 색색깔의 밭들이 마치 조각퀼트처럼 엮여있었다.



미세먼지 없이 청량한 하늘 아래 병풍처럼 서 있는 한라산. 왼편에 우뚝 솟은 게 바로 오름 중 가장 높다는 높은 오름.©️박현안



  다랑쉬 오름은 정상과 지상에 둘레길이 나있다. 정상 둘레길은 분화구 주위를 한 바퀴 돌 수 있게 되어있다.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아이들과 수분 보충을 하고 둘레길을 걸었다. 오르는 길이 꽃밭이었다면, 둘레길은 숲 터널 같다. 온몸에 난 땀이 햇빛은 가려주고 바람은 통과시키는 촘촘한 숲길 덕분에 서서히 식어갔다.


  숲 터널을 통과하고 나니 거대한 분화구가 눈에 들어온다. 오름의 높이와 크기 만큼 분화구의 깊이와 넓이도 상당하다. 여기가 화산이 폭발한 자리야. 아이들과 아주 오래 전 분출하던 마그마를 떠올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아이들은 걸으면서도 봄철을 맞아 출몰하기 시작한 각종 곤충들을 찾느라 분주하다.


  새롭게 만난 곤충은 어리호박벌이었다. 철쭉 주위를 날아다니며 꽃에 얼굴을 콕 박고 열심히 꿀을 빨아먹고 있던 녀석. 성인 엄지 손가락만한 크기로 꽤 큰 편인데다, 날아다니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는지라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몸집에 비해 작은 날개를 가져 뒤뚱거리며 간신히 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모습이 벌인데도 겁이 나기는커녕 너무 어설퍼 보여 웃음이 났다. 꽃에 쏙 파묻히는 여타 꿀벌들과 달리 큰 몸집 때문에 엉덩이가 꽃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모습도 너무나 귀여웠다.


  정상 둘레길까지 완주한 뒤, 우리 가족은 천천히 발길을 돌려 지상으로 내려왔다. 진드기가 많이 나타나는 철이라 내려온 뒤에는 에어건으로 꼼꼼하게 옷이나 몸에 혹시 붙어있을지 모르는 먼지나 벌레들을 털어주었다. 아이들은 에어건 바람에 신이 나서 깔깔 거린다. 하루에도 수백 번을 웃는다는 아이들. 작은 것에도 큰 소리로 웃는 아이들의 모습에 결국 나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다랑쉬 오름을 아이들과 완주하는데 걸린 시간은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봄바람 살랑이는 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연둣빛 나무 사이를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는 건 선물 같은 일이다. 일주일에 딱 하루 온 가족이 함께 쉬어가는데, 하늘도 맑고 바람과 온도도 적당한 날은 손에 꼽힌다. 그러니 봄과 가을에는 마음이 분주하다. 자연을 아이들과 더 만끽하고 싶은 마음에.


   오름은 늘 옳다. 할 수만 있다면 368개의 오름을 모두 오르고 싶다. 단 한 번도 실망한 적 없는 오름을 오르는 길. 오름 중에는 사람의 발길이 너무 많이 닿아 휴식년제에 들어간 곳도 있다. 오름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오름은 앓는다. 소중한 자연을 지키면서도 누릴 수 있는 길, 아이들과 함께 찾아가야지. 이렇게 봄날이 간다. 그렇게 사월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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