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포기하고 선택하는 취향
취향이란 단어가 어느 날 갑자기 머리에 들어와 박혔다. 그 뒤로 내내 영화 <소공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도시의 빈민층이라 볼 수 있는 청년인 미소는 월세가 오르자 집을 포기하고 만다. 그 와중에도 미소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두 가지는 위스키와 담배다. 여기까지 말하면 누군가는 살 집도 없는 마당에 술 담배에 돈을 쓴다며 혀를 끌끌 댈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소에게 취향은 단순한 선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쩌면 존재의 이유와도 같은.
집을 잃은 미소는 예전에 함께 밴드를 하던 멤버들을 하나씩 찾아가며, 취향 대신 돈이나 가족, 생계 등을 선택해 살아가는 모습을 마주한다. 우리는 보통 이런 걸 '현실과의 타협'이라고 말한다.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나이가 있고, 그 나이가 되면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집을 장만하는 게 수순이라고 말한다. 80억 명이 넘는 인구의 삶이 매한가지라는 듯, 그런 과정을 밟지 않는 사람들은 철이 덜 든 거라는 듯, 보편의 길을 강조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취향은 거세되고 타인의 취향이 마치 내 것인양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미소는 머리가 하얗게 새어가는 병을 앓고 있는데 그 병의 진행을 막지 않는다. 막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막지 않는 느낌이다. 한강에 텐트를 치고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바에서의 위스키 한 잔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 마지막 모습에서 미소의 취향이야말로 얼마나 오롯한 것인지를 절감했다. 미소가 사랑하는 건 단순히 위스키 한 잔이라기보다 그 잔에 담긴 향과 맛, 바의 공기와 조금씩 음미하며 들이키는 시간까지 모든 게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내게는 그런 취향이 있던가. 집을 포기하면서도 반드시 누려야만 할 만큼 절실한 취향이 내게 있을까.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무언가를 고집하며 살아가는 삶이 참 고귀해보였다. 그게 술일지라도 그게 담배일지라도. 사실 나는 미소처럼 집을 포기해서라도 누리고자 하는 취향이 없다. 소소하게 선호하는 무엇은 있지만, 내 모든 걸 걸어서라도 쟁취하고 말겠다는 욕심이 들어간 무엇은 없는 것 같다.
빌려온 취향
우리가 스스로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미소처럼 불안정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꼭 누려야할 만큼 간절한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 다시 말해 당신이 가진 취향은 정말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을까. 사회적 동물인 인간, 그 중에서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로 유명한 한국인 중에 자신만의 오롯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도 삶의 방향도 타인을 좇는 경우가 많듯, 취향 역시 누군가에게 빌려온 건 아닐까.
취향이 없는 어른이 되었다는 글을 쓰긴 했지만, 사실 취향이 아예 없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은 비교로 세상을 배우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태어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도 똑같은 영상 속에서 서로 더 관심 있는 걸 쳐다본다고 하니, 어쩌면 취향은 선천적인 기호인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더 끌리는 무언가가 누구나 있기에.
하지만 취향은 실제 선천보다는 후천적으로 더 공고해지는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원래 좋아하는 게 따로 있다 해도 시대에 따라 주변 환경에 따라, 혹은 자신의 타고난 외모나 주위의 시선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게 취향이기도 하기에. 내 취향이 아닌데도 스스로를 속이며 따르는 사람도 적지 않아 보인다. 삶의 방향이 온전히 나만의 선택으로 결정한 게 아닐 수도 있듯, 취향도 완전한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
과시용으로 전락하는 취향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굳이 취향이 있는 척까지 하며 취향을 갖거나 보여주려 하는 걸까.
SNS를 일상적으로 하게 되면서 우리는 무언가를 찍어서 보여주거나 타인이 공유한 게시물을 감상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 인생의 하이라이트만 모여있는 게 SNS라는 말이 있듯, 그 속의 사람들은 늘 행복하고 반짝인다. 그리고 저마다 뚜렷한 취향을 가진 듯하다. 취향이 보여주기식 문화에 올라탄 것이다.
취향이 뚜렷한 사람들은 유독 프라이드가 높은 경우가 많다. 자신의 취향에 만족하고, 어쩌면 자신의 취향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취향을 과시하거나 심한 경우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끼리 한데 묶어 편을 가르기도 한다. 이 흐름에 끼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유행을 좇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취향은 한 사람을 드러내는 개성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을 배제하는 빌미가 될 수도 있는 것.
취향이 다른 건 사람마다 기질과 성향이 다르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가진 취향에 따라 평가를 하거나 급을 나누고 편을 가르는 건 옳을까. 한 사람의 취향이 구시대적이더라도, 보편적이지 않더라도, 혹여 삶을 통째로 거는 무엇이더라도, 그런 취향을 가질 수도 있다고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닐까. 오히려 다른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함을 갖고 있는 것에 박수를 쳐야 하지 않을까.
취향이 있고 없고는 착시 현상일 수도
취향이 뚜렷한 사람은 근사해보인다. 자신만의 세계관과 철학이 있어 보인다. 호불호가 명확하고 옳고 그름을 아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대로 취향이 없는 사람은 불분명하게 느껴진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고 스스로가 어떻게 해야 빛이 나는지 알지 못하는 감각 없는 사람으로 비치기도 한다. 근데 정말 그럴까. 취향은 분명 존중되어야 하지만, 취향이 뚜렷하지 않다해서 그게 손가락질 받을 만한 일일까.
사람은 누구나 꼼꼼하지만 꼼꼼한 분야가 달라, 꼼꼼해 보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으로 나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취향도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어느 분야에 선호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취향이 뚜렷해 보이고, 누군가는 취향이 없어 보이는 착시 현상이 일어나는 것. 취향이 차림새나 인테리어 등 눈에 보이는 분야에 더 집중되어 있는 사람이, 맛이나 음악, 책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취향을 가진 사람보다 더 강한 취향을 가진 것으로 비치는 게 아닐까.
타고 나기를 특별히 선호하는 것 없이, 두루뭉술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은 참 다양한데, 그 중 어떤 분야는 유독 고집스러운 반면 다른 분야는 이렇든 저렇든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내 경우 그릇이나 살림살이, 인테리어에 큰 관심이 없다. 옷이나 가방, 신발 등도 큰 취향을 갖고 있지 않다. 대신 되도록이면 환경과 동물을 생각하는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취향인 것이다.
취향의 다양함은 곧 사회의 건강함
취향은 순간적인 끌림으로 갖게 될 수도 있지만, 오래 두고 보면서 얻게 된 선호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취향을 찾을 만한 시공간적 여유가 있는 삶을 살았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런 여유 따위는 없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 가지 취향으로 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얼마나 편협한가. 하나의 모습으로 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듯, 하나의 취향으로 한 사람의 전부를 가늠해서도 안 된다.
취향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사고방식이 기본으로 깔린 사회에서 좀 더 민주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각자 고유함을 찾아가는 사회. 다양한 취향이 발현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그런 세상이라야 진정한 나로, 내가 원하는 나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취향은 결국 '나'를 정의하고, '나'가 추구하는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온전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 많은 사회는 그만큼 개개인에게 취향을 찾을 여유가 있는 사회라는 말과 같다. 타인의 영향이나 사회의 압력에서 벗어나 '나'에게 충분히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독특하고 다양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 많은가는, 결국 그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보여주는 지표일 수도 있는 것.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다채로운 취향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당신의 취향은 정말 당신에게서 나온 것인가.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