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 교수 강연을 듣고, 곱을락 전시를 만나고
7살 9살과 두 시간짜리 강연 듣기가 가능할까?
공무원인 지인이 갑자기 한 장의 사진을 단톡방에 투척했다. 김상욱 교수가 제주에서 무료 강연한대요. 관심있는 분들 신청 고고. 앗 저요. 평소 과학에 관심이 많아 대중과 소통하는 과학자들의 활동을 눈여겨보고 있는지라, 이런 강연이 있다는 소식에 귀가 솔깃했다. 저요라고 말하긴 했지만, 내가 혈혈단신도 아니고 애 둘 딸린 엄마인데, 한 시간이 넘는 강연을 과연 볼 수 있을 것인가. 남편에게 나 강연 듣고 올게, 하고 혼자 도망갈 수도 없고 말이지. 어떻게 하지 고민을 하다 슬쩍 신청 가능 연령을 봤는데, 어라 8세 이상이다. 초등학생 이상 가능하다고? 첫째가 9살이고, 둘째가 7살, 둘째가 3월생이니 예전 같으면 빠른생으로 입학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한 번 우겨서 가볼까.
저녁을 먹으며 넌지시 말을 꺼내니 남편도 강연이 궁금하단다. 아이들도 슬슬 꼬셔보았다. 강연이 뭔지 잘 모르는 아이들에게 재밌는 과학 이야기 듣는 거라고 말하니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응 가지 뭐. 그렇게 네 자리를 신청하고, 오늘 드디어 강연을 들으러 설문대 여성문화센터로 향했다. 일찍 도착했는데도 강연장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매의 눈으로 가장 어려 보이는 아이들부터 살폈다. 둘째 만큼 어린아이는 보이지 않지만,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고등학생들은 제법 눈에 띄었다. 묻어가자.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아이들만 잘 견디면 된다.
아이들이 아직 키가 작다는 점을 고려해, 그리고 좀 더 집중을 잘했으면 하는 마음에 오른편 앞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마이크 설치도 오른편에 되어 있어서 아무래도 이쪽에 앉는 게 더 잘 보일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는 사전에 이 강연을 잘 들으면 선물을 주겠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강연이다 보니 그냥 참아라, 들어라, 견뎌라 하기에는 미안했던 것. 아이들은 놀이공원, 게임 등 다양한 요구사항을 늘어놨다. 일단 대충 오케이를 하고, 조용히 잘 있기로 약속을 한 뒤 강연을 듣기 시작했다.
김상욱 교수는 방송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최근에 <알쓸인잡>을 통해 봐서 그런지 낯설지 않고 친근했다. 강연 주제는 "물리학이 우주와 인간에 대해 알려준 것들"이었다. 최근에 신간이 나왔는데, 그 책을 집약한 내용이 아닌가, 싶었다. 강연 초반에 책을 살짝 소개하면서, 이 강연은 책 나오기 훨씬 이전에 잡힌 거라고 웃으며 강조해 말했다.
물리학이 우주와 인간에 대해 알려준 것들
이야기는 하늘에서부터 시작됐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별이 떠있는 우주와 구름이 떠있는 대기가 하나로 인식되었고, 하늘을 읽는 자가 권력을 가졌다는 것.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왕은 제사장과 같았고 달력이 무척 귀했으며, 날에 따라 해야 하는 일이 정해져 있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하지만 인간이 너무나 중요하게 다루는 숫자인 7, 30, 360 등은 모두 하늘에서 나온 것으로, 지구와 달, 태양, 행성 등에서 나온 숫자일 뿐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여전히 길일을 따지며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을 지적하기도 했다.
인간은 빛이 있는 낮을 표준으로 삼지만, 우주의 시점에서는 사실 어둠이 표준이라는 점. 죽음에 대해 엄숙하게 말하지만 사실 우주에는 살아있는 것보다 죽어있는 것이 훨씬 많이 존재한다는 점을 이야기 했다. 텅 빈 것과 같은 우주에서는 오히려 물질이 있고 생명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사실을 짚어주었다. 그 생명들이 만나 사랑을 나누고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이 이 드넓은 우주에서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새삼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물리라는 학문에 대해 접근하면서는 점, 선, 면에 대한 의미를 먼저 짚어나갔다. 역사적으로 점에 대해 가장 먼저 정의한 사람의 이야기부터, 그 정의를 반박한 이야기, 점을 정의하다 보면 결국 무한대를 만나게 되는 아이러니까지. 무한은 상태가 아닌 과정이며, 점은 명사가 아닌 동사라는 것, 선은 점이 시간화된 형태이고, 선은 곧 운동이라는 사실. 그리고 물리가 바로 운동이며, 선은 곧 물리라는 결론까지. 우주는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곳이기에, 결국 물리는 그 운동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결국 과학은 변하지 않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변하는 것을 예측하기는 무척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 이야기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변하는 것에 주목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김상욱 교수가 제시한 건 역사와 철학 논리 예술, 그리고 읽고 듣고 쓰고 말하는 것, 수학 물리 화학 생물 등이었다. 크게 나누면 결국 과학과 인문학인 것. 과학이 우주에 대한 것이라면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사람에 의한 학문이다. 결국 이야기는 돌고 돌아 다시 인간으로 향하고, 우주보다는 인간이 더 위대하다는 말로 강연은 끝이 났다.
강연이 끝나고 세 명 정도가 질문을 했다. 아이가 물리를 좋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후위기를 과학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물리학자가 꿈인데 어떻게 하면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질문에 대해 시간상 빠르게 답하면서도 결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할 말은 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질문 자체가 갖고 있는 모순점이나 한계 등을 지적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다정하게 대답하는 모습이라니. 원래 좋은 책은 명확한 결론을 내지 않고 적재적소의 질문을 오히려 독자들에게 던지는 법이지. 지난 책 <떨림과 울림>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다. p269
오랜만에 듣는 강연에 신이 나면서도, 나는 듣는 내내 양 옆에 앉은 아이들을 살피느라 초조했다. 혹시나 돌발행동을 하지는 않을까, 너무 힘들어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복잡한 심경에 비해 아이들은 꽤 잘 들어주었다. 평소 과학에 관심이 많은 첫째는 김상욱 교수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도 하며 두 시간 가량을 견뎌냈다. 둘째는 내 팔에 기대기도 하고 언제 끝나냐는 질문을 자주 던지긴 했지만, 끝까지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앉아 있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중간중간 입막음용으로 마이쭈를 넣어줘야 했지만.
강연이 끝나고 사인회가 이어졌지만, 아이들 컨디션을 고려해 우리 가족은 바로 강연장을 빠져 나왔다. 나오며 아이들에게 폭풍 칭찬을 해줬다.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잘 들어줘서 고맙다. 아이들은 실실 웃으며 선물을 기대했다. 선물은 게임 추가시간으로 낙찰. 첫째는 생각보다 재밌었고 물리가 무엇인지 더 자세히 알게 돼서 좋았다고 했다. 중간중간 수식이 나왔는데 아직 수학이라곤 덧셈 뺄셈 밖에 접해보지 못한 아이라, 그 수식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기에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둘째는 당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더라는 솔직한 후기를 더했다. 그래, 너는 앉아있었던 것만으로도 너의 할 일을 다했다.
뜻밖의 전시, 곱을락
뒤돌아 나오는데 1층에서 무료 전시를 진행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보기에도 괜찮은 전시인 것 같아 함께 관람을 했다. 제주의 마을별 풍경을 그린 그림이 한쪽에 전시돼 있고, 반대편에는 아이들이 그린 제주와 각종 캐릭터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갑자기 둘째가 한 그림을 가리키며 예멘을 언급했다. 응 갑자기 웬 예멘, 하고 돌아보니 그 곳에 예멘 국기가 그려져 있고 전쟁이 나쁘다는 메시지가 가득 적혀 있었다. 둘째는 국기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예멘 국기를 알아본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관계자가 우리 가족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시작된 설명. 알고 보니 방금 본 그림들이 제주에 거주하고 있는 예멘에서 온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라는 것. 몇 년 전 제주에는 예멘의 난민들이 대거 들어왔다. 하지만 난민을 받아들이는데 무척 보수적인 우리나라는 결국 몇몇 아이들만 체류를 인정했다. 관계자는 아이들이 현재는 뿔뿔히 흩어져 조용히 살아가고 있고, 평소에는 웃으며 잘 지냈지만 막상 그림을 그리니 전쟁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더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에게 무척 배타적인 한국. 예전에 대구 이슬람 사원 건립과 관련된 사태를 찾아보면서 예멘 난민들의 상황이 궁금해 검색한 적이 있었다. 후속 기사가 많지 않았다. 몇 명만이 남았고, 대다수는 떠났다는 이야기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너무 씁쓸하고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할 줄이야. 이렇게라도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어 반가우면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전시장을 나오며 아이들이 내게 물었다. 엄마 난민이 뭐야. 나라에 전쟁이 나거나 문제가 생겨서 자기 나라에서 살 수 없어 떠나온 사람들을 말해. 몇 년 전에 제주에 예멘 난민이 왔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난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거의 다 다른 나라로 떠나고 아이들만 몇 명이 남은 거야. 왜 싫어하는데? 예멘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믿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낯설다고 싫어하거든. 너무 나쁘다. 그러게, 다 똑같은 사람인데.
우주보다 인간이 더 위대하다는 강연을 듣고 나오면서, 인간이 꼭 위대하지만은 않다는 전시를 마주하게 되다니. 인간은 한없이 위대할 수도 있지만, 한없이 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건물 밖으로 나오니 오월의 하늘이 푸르디 푸르렀다. 화단에는 민들레가 한 가득이었고. 아이들은 민들레 씨앗을 하나씩 꺾어들고 힘껏 후하고 불었다. 작은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하나하나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떠올렸다. 우리가 얼마나 기적의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 기적의 땅에서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지를.
집에 돌아와 전시 제목을 검색해보았다. 곱을락. 이 말은 숨바꼭질을 뜻하는 제주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