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옳은가> 첨예한 논쟁의 한복판으로 독자를 끌고 가는 책
글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나를 드러낸다. 내가 살아온 삶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내가 깨달은 사유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글이 쌓이면 쌓일수록 두려운 건, 현재가 아니라 미래다. 현재 옳다고 생각한 저 글이 미래의 어떤 순간에도 옳을 것인가. 옳음과 그름, 이분법적인 사고에 너무 갇히면 어떤 글도 쓸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나의 글을 나의 생각을 점검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나의 생각들이 미래에도 옳을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옳은가>는 가장 인문학적인 미래학자라 불리는 후안 엔리케스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제목부터 깊은 사유에 잠기게 하는 이 책에서 옳은 게 무엇인지 정답을 만나길 기대한다면 빨리 포기하는 게 좋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면 정의가 무엇인지 오히려 혼란스러워지듯, 이 책 역시 무엇이 옳은지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혼돈의 상태로 독자를 끌고 간다.
그렇다면 왜 옳고 그름을 쉽게 분간할 수 없는 걸까. 과학기술이나 생명만 진화하는 게 아니라, 이에 따른 윤리도 진화하기 때문이다. 윤리의 진화라. 일례로 흑인 노예가 거래되던 과거의 시장을 떠올려 보자. 그 세상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흑인을 거래하는 시장은 옳다. 흑인은 소유할 수 있는 재산 중 하나이며, 얼마든지 마음대로 부릴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서비스다.
현재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너무나 야만적이지만, 당시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이걸 당연하게 여기던 과거의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바라봐야 할까. 아니면 시대에 순응한 보통의 사람들로 여겨야 할까. 흑인 노예제도는 오늘날 지구상 모든 나라에서 폐지됐다. 이런 시기가 오기까지 필요했던 건,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존재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법과 제도는 모두 옳을까. 시민이기에 지키고는 있지만, 혹여 그 중에 백 년쯤 뒤에 보면 어처구니 없는 법안도 포함돼 있지는 않을까. 시대를 통과하면서, 우리가 지키고 있는 것들 중에 무엇이 살아남고 무엇이 결국 폐기될까. 그걸 판가름하는 눈을 기르려면 우리는 어떻게 사고해야 할까.
<무엇이 옳은가>에는 명확한 구분 방법이 나와 있지는 않다. 대신 수많은 윤리적 딜레마에 놓인 상황들이 제시돼 있다. 과거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곧 닥칠지도 모르는 수많은 상황들.
당장 자율주행차만 하더라도, 운전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길거리에 있는 무고한 사람을 다치게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 차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이 차가 내린 선택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설계자일까, 설계한 회사일까, 아니면 소유한 차주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율주행차의 도로 운행을 허용한 국회는 아닐까.
우리는 어떻게든 책임을 묻고 짊어지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지만,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그 책임을 지는 대상은 모호해진다. 기술과 윤리가 꼭 같이 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술의 발전을 막을 수는 없으니, 결국 그에 맞는 윤리를 진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윤리는 고정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예상치 못한 펜데믹을 겪고, 4차 산업혁명 시기에 들어서면서 윤리는 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우리는 이런 시대를 제대로 맞이할 만큼 윤리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있는가.
저자는 수많은 윤리적 딜레마 상황을 제시하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덕목으로 '겸손'을 꼽는다.
오늘날 여러 윤리적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절대주의를 버리고 하나의 개념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좌파 아니면 우파라는 정치적 이분법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 또 세대와 세대 사이, 인종과 인종 사이, 종교와 종교 사이에서 우리가 벌이고 있는 문화전쟁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바로 이 개념, 겸손 말이다. p181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 우리가 속한 이 세상의 법칙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인정, 시공간을 초월해 지금 여기의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노력, 어떤 윤리도 항상 옳을 수는 없다는 겸손. 그것만이 인간을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이끌 것이라고.
밤하늘을 올려다 보는 걸 좋아한다. 온 세상에 빛이 닿은 낮에는 이곳이 세상의 중심인 것만 같다. 눈에 보이는 내가 속한 이 작은 세계가 전부인 것만 같다. 하지만 해가 사라지고 하늘에 별빛이 하나둘 반짝이기 시작하면, 세상의 중심은 달라진다. 밤이 되면 지구는 세상의 변방이 된다. 인간은 그 변방의 작은 먼지가 되고.
그 밤하늘 아래에서는 자연스럽게 겸손을 장착하게 된다. 우주라는 차마 그 크기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나는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얼마나 작고 작은가. 밤하늘을 떠올리며 윤리를 생각한다. 이곳에서 옳은 것이 저 별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에서도 과연 옳을 것인가. 절대적인 옳음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무엇이 옳고 그른가. 조금이라도 더 옳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려면, 우리는 어떻게 사유하고 행동해야 할까. 이 책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수많은 상황들을 제시하고 질문을 던지며 논쟁하고 싶다.
사람과 꼭 닮은 로봇을 소유주가 망가뜨리는 건 잘못인가, 잘못이 아닌가. 인간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기계가 널리 보급된다면, 그 기계를 구입하고 이용하는 건 옳은가 그른가.
수많은 상황과 질문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 질문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좀 더 나은 곳으로 향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시작점에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