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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Jun 17. 2023

이꽃님 작가의 작품을 읽고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죽이고 싶은 아이>를 읽고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이꽃님 작가의 작품을 읽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로 선택한 건 제목부터 섬뜩한 <죽이고 싶은 아이>였다. 청소년 소설이기에 수위 조절이 분명 되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호기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일었다. 책은 그야말로 술술 넘어갔다. 살인 사건의 범인을 밝혀내는 추리 형식이자 인터뷰 형식이었기에, 게다가 청소년 소설이라 쉬운 언어로 되어 있었기에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시간 만에 뚝딱 읽어버렸는데, 이꽃님 작가의 필력에 감탄이 나왔다. 쉽게 읽히는 글이 쉽게 쓰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쉽게 읽힌다는 건 그만큼 많이 퇴고했다는 걸 의미한다. <죽이고 싶은 아이>가 인터뷰 형식의 대화체라면,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는 편지 형식의 대화체다. 대화체는 쉬이 읽힌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실제 하는 대화와 괴리감이 느껴져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모 아니면 도와 같은 이런 대화체를 소설에 자꾸 등장시키는 이 작가가 점점 궁금해졌다.


학교 보호자 독서모임에서 선정한 책입니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이꽃님 지음, 문학동네 출판


두 번째 소설을 덮은 뒤 인터뷰를 찾아봤다. 역시나 읽히는 소설이 쓰고 싶다는 작가. 청소년들이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끝까지 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내가 읽은 두 권 모두 무척 빠른 전개와 끝까지 진실을 밝히지 않아 궁금증을 유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때문에 흡인력이 무척 대단했다. 한 번 읽으면 결말을 알게 될 때까지 숨죽여 읽게 된다고 할까. 게다가 작가가 자연스러운 대화체를 완성하기 위해 소설을 쓰면서 계속 입으로 말을 해본다고 하니, 쉬이 읽히는 충분한 노력과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죽이고 싶은 아이>가 진실을 알아도 마음에 따라 믿기도, 믿지 않기도 한다는 사실을 무척 적나라하게 꼬집고 있다면,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는 시공간을 초월해 가족의 의미를 짚는다. 개인적으로는 <죽이고 싶은 아이>가 더 인상적이었다. 이유는 여러 사람의 인터뷰를 통해 하나의 진실을 무척 다양한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는지, 얼마나 모순되는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는지, 이 소설은 꽤 날카롭게 지적한다.


평소에는 가난한 친구를 따돌림하다가도, 막상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부자인 친구를 욕하는 모순된 심리 같은 것. 부자가 되고자 더 갖고자 안간힘을 쓰다가도, 부자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아이러니한 모습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 같아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돈의 유무, 부의 정도를 떠나 사람 그 자체만을 바라볼 수는 없는 건지 무척 답답해지던 순간이었다. 아이들에게 죄가 있을까. 그런 비교를 아이들 앞에서도 서슴지 않고 해온 어른들의 탓이 아닌가.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가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품이기는 하나, 읽으면서 옥에 티 같은 설정이 종종 눈에 띄었다. 1980년대를 살아가는 열여섯 살의 은유가 2010년대를 살아가는 열다섯 살의 은유에게 잔소리를 하는 편지에서 특히 그랬다. 여기서 1980년대 은유는 차마 열여섯이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무척 꼰대스런 잔소리를 하는데, 캐릭터도 그렇고 나이도 그렇고 이 장면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 장면 외에도 중간중간 작가가 개입해 대신 말하는 듯한 장면들이 제법 있었다. 특히 그런 부분들을 볼드체로 처리한 게 오히려 집중을 방해했다. 독자에게 교훈을 강조하는 듯한, 이 문장을 꼭 밑줄 쳐야 한다고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독자를 상황을 통해 이해시켜야 하지, 작가가 개입해 직접 목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배운 내게는 더욱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작가가 내고자 하는 목소리는 명확히 이해가 갔다. 부모의 역할이라든가, 바람직한 가정의 모습이라든가. 분명 의미 있는 목소리인 건 맞지만,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좀 더 고민을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대화체는 쉬이 읽히는 장점을 지니지만, 너무 쉽게 인물의 목소리에 작가가 개입할 수 있기에. 연달아 소설에서 이런 형식을 취하는 것에 대해 독자로서 한 번쯤 재고해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박수를 보내고 싶은 점도 많았다. 청소년들에게 쉬이 읽히는 글을 쓰기 위해 작가가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며 집필을 한다는 점과, 꾸준히 청소년의 삶과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 보고 십 대에 꼭 들어야 하는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해내고 있다는 점. 십 대는 그 누구의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 좀처럼 넓은 세상을 시야에 담기 어려운 나이이기에, 이런 작가의 애정과 노력이 참 반갑다. 


사실 두 작품만으로는 이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좀 어려운 게 사실이다. 다른 작품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흡인력 하나는 정말 세계 탑이구나 싶을 만큼 속도감 있어, 이런 글을 읽기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강력 추천한다. 요즘 십 대 아이들의 마음과 언어, 행동을 들여다보기에도 알맞다. 청소년의 이야기를, 청소년에게 꼭 들려줘야 하는 이야기를 앞으로도 성실히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참, 이꽃님이라는 필명 같은 이름은 실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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