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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Apr 11. 2023

'무해'라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고

<밝은 밤>을 읽고 최은영 작가가 좋아졌다. 이전 같으면 마음에 드는 작가가 생겼으니 그 작가가 쓴 책을 모조리 읽어야 직성이 풀렸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내게 무해한 사람>, 작가가 낸 소설집의 제목을 본 뒤였다. '무해한'이란 말이 내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무해한'이란 단어는 내게 불가능과 동의어였다. 존재하긴 하나 실제 가닿을 수는 없는 신기루 같은. 그게 내게는 '무해한'이었다. 당시 나는 너무나 무해하고 싶었지만 누군가에게 유해한 존재가 된 상태였다. 의도치 않게 벌어진 일에 너무 난감하고 억울했다. 자석의 같은 극이 맞닿은 것처럼 내 손은 책을 계속 밀어냈다.


언제부턴가 문장만으로도 사람이 느껴진다. 감히 그의 모든 걸 느낀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글 쓰는 자아만은 오롯이 내게 다가왔다. 내가 가공해낸 인물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바라보지 않아도 바라보는 것만 같았고, 만져보지 않아도 만져보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게 좋았지만 싫었다. 그 예민한 감각이 나를 살리기도 했지만, 나를 찌르기도 했기에. 끊임없이 읽으면서 누군가를 선연하게 느낀다는 건 무척 피곤한 일이기도 했기에.


<밝은 밤>을 읽으면서 작가가 지닌 너무나도 고운 결이 느껴졌다. 예민한 감각으로 세상 모든 아픔과 겹겹의 고통을 세세히 느끼는 사람, 그렇기에 타인을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따뜻한 배려가 묻어나는 사람.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쉽게 쓰지 못하는 사람. 신중한 작가에게 믿음이 가는 건 당연한 순리였다.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 역시 작가가 당연히 쓸 법한 것이었다. 너무나 글쓴이를 닮아 수긍이 갔지만, 판타지 같은 제목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내게 무해한 사람을 갖는다는 건 얼마나 푸른 꿈인가.


빙빙 돌다 다시 책을 집어든 건 억울한 일로부터 좀 놓여난 덕분이었을까. 잡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간 단편들에는 무해하고 싶었지만, 결국 유해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과 순간들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단편들은 모두 미래의 시선으로 적혔다. 미래의 나는 더이상 과거의 그 사람 혹은 그 일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 문득 떠올라 다시금 그 시절로 떠나는 여행에 놓여있다.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순진한 과거의 나는 순간의 상실과 감정들에 힘겨워한다. 당시에는 모든 것이라 할 만큼 절실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나의 곁에는 전혀 다른 사람들과 일상이 둘러싼다.


작가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 잊혀졌지만 내 안에 어떤 형태로든 남고 만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어쩌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사람들에 대해. 강하게 스쳐갔기에 분명 이후의 삶은 달라졌지만, 지금은 그 어디에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나의 사람들에 대해. 읽으면서 여러 얼굴들이 스쳐갔다. 내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그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삶의 방향은 조금씩 궤도를 수정했다. 갓 스무살이 됐을 때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궤도 위를 걸을 만큼. 이 길로 들어서게 한 이들과는 연락이 모두 끊겼음에도.


책을 덮고난 뒤 얼마 전 보았던 그림책 하나가 떠올랐다. 전미화 작가의 <너였구나>. 책에는 본 적 없는 공룡 하나가 등장한다. 공룡은 마치 나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익숙하게 말하고 행동한다. 함께 밥을 먹고 놀이를 하고 목욕탕을 가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아챈다. 어느 순간 나와 함께 했던 잊혀진 친구가 공룡이었다는 걸. 작가는 말미에 이렇게 읊조린다.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으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작가는 자신이 거쳐온 수많은 순간들과 사람들의 성을 허물고,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집을 지었을 것이다. 뼈대는 남긴 채 새로운 외장재들을 덧붙이면서.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미쳤던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 바로 자신임을 알아챌지도 모르는 누군가들을. 작가는 글을 쓰며 결국 피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람들에 대해 쓰게 된다. 자신의 삶을 허물어 글이라는 성벽을 쌓아올리기에. 그 삶에는 여지없이 누군가가 자리하고 있기에. 글을 쓰는 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용하려는 얄팍한 수작이 아니더라도, 어떤 변형이든 어떤 모습이든 결국 내가 아는 누군가로부터 글 속 인물들은 재창조된다. 그 과정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 변형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자신이 행여 글을 쓴다는 핑계로 사람을 재료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나. 돌아보고 또 돌아봤을 것이다. 두드리고 또 두드렸을 것이다. 내게 상처만 남긴 사람일지라도. 그런데도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자신의 글 쓰는 운명 앞에서 작가는 스스로가 무해하고 싶었지만, 유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비루한 글을 쓰는 나도 그러했기에.


글을 쓰면서 피치 못하게 내 주변의 누군가를 등장시킬 때마다, 나는 고뇌한다. 꼭 필요한 장면인가, 꼭 언급해야만 하나. 그가 본다면 마음을 다치지는 않을까. 글을 쓴다는 핑계로 너무 쉽게 누군가를 재료로 혹은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아픔을 대할 때도 그렇다. 글을 쓴다면서 내 아픔을 팔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아픔을 나는 꼭 써야만 하는가. 씀으로써 얻는 것과 쓰지 않음으로써 놓치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이 많아질수록 글은 가벼워진다. 고뇌가 깊어질수록 글은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만 있다. 꽤 많은 아픔들을 긁어내 글감으로 썼기에, 이제는 이전만큼 아프지 않기에, 이제 나는 그만 써도 되는 건 아닐까 반문할 때도 있다. 이미 쓸 글은 다 썼다고 말하는 이성복 시인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도 다시 글을 붙들고 나는 묻는다. 왜 쓰는가. 쓴다는 핑계로 너무 많은 것들을 도구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쓰는 한 나는 끝까지 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한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가까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분투해야만 한다. 그게 쓰는 사람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심이라 믿는다.


같은 고민을 붙든 사람을 만나 반갑다가도 코 끝이 찡해진다. 쓰는 한, 쓰는 삶을 선택한 이상 내내 자신을 채찍해야 할 질문 앞에 선 사람들. 그럼에도 쓰리라 다짐하는 마음들. 쓰는 게 삶이 된 사람들. 쓴다는 것에 책임감을 갖고 섬세하게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작가를 만났다는 건 얼마나 큰 수확인가. 이렇게 예민한 사람이 쓴 글이라는 확신은 결국 나의 극을 돌려 다시 책을 끌어당기게 할 것이다. 불가능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모하게 도전하는 아름다운 사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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