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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Jan 29. 2023

나란 무엇인가

개인이 아닌 분인에 대해

  만나는 사람에 따라 그에 맞는 '가면'을 쓴다는 표현을 우리는 자주 한다. 때문에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관계가 편하다고들 한다. 그리고 '진정한 나'를 찾아야만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사실 내가 그동안 쓴 에세이 중 꽤 많은 글들도 '진정한 나'에 초첨이 맞춰져 있다. 이십 대까지 내게는 '견딜 수 없는 나'가 있었고, 나는 그 가면을 쓰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오랜 시간 자신과 싸워왔다.



개인은 분인의 집합체


  여기 '진정한 나' 같은 건 없다고 주장하는 소설가가 있다. 이름은 히라노 게이치로. 여러 편의 소설에서 보여준 분인(分人)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에세이를 따로 썼다. 제목은 <나란 무엇인가>. 나란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란 '무엇'인가다. 나는 무엇이고 분인은 또 무엇일까. 분인은 히라노 게이치로가 만든 개념이다. 철학자나 심리학자, 정신과 전문의도 아닌데 이런 개념을 만들어내다니. 가끔 소설가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마다 깜짝 놀란다. 누구보다 인간에 대해 깊게 탐구하는 사람들이 작가가 아닌가 싶다.


  분인은 개인(個人)을 나눈 개념이다. 원래 개인은 영어 individual을 일본어로 번역한 단어로, 처음에는 독일개인(獨一个人), 독일자(獨一者) 등으로 번역되다, 일개인(一個人)을 거쳐 개인(個人)으로 정착됐다. individual은 부정접두사 in이 나누다는 뜻의 dividual 앞에 붙은 단어로, '더이상 나눌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개인은 '인간 한 개'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서양에서도 '개인'이라는 단위가 확립된 건 근대에 접어든 후였다. '개인주의'라는 사상은 19세기 중반 이후에야 등장한다.


  이런 '개인'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건, 그리스도교가 일신교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일대일이었고,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 앞에서 거짓 없는 '진정한 나'여야만 했다. 중세가 붕괴되고 계급이 사라지면서 사회와 대치되는 개념인 '개인'이 필요하기도 했다. 시스템의 최소 단위인 개인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있어야 사회적 약속이나 기틀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로서는 개인이 불변하고 일관된 게 유리하다. 그러니까 분인이라는 개념은 사회 입장에서는 자칫 위험한 단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히라노 게이치로는 타인을 만났을 때의 얼굴을 '가면'이라 칭하지 말고, 개인이 하나가 아닌 여러 분인의 집합체로 인식하자고 주장한다. 타자와의 만남에서 드러나는 나를 '가짜 나'로 인식하는 건 너무 씁쓸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나라는 인간은 대인 관계에 따라 몇 가지 분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사람의 됨됨이(개성)는 여러 분인의 구성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분인의 구성 비율이 바뀌면, 개성도 바뀐다는 것이다.



진정한 나는 없다?


  인간의 얼굴이 다양한 건, 상대와의 상호작용 때문이라고 말한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라는 것. 어디를 가나 나는 나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성가신 존재가 되고 소통이 일어나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작가는 개인의 경험을 예로 들며 이를 설명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나지만, 손님을 대할 때의 나와 아이를 대할 때의 나, 남편을 대할 때의 나가 완전히 똑같을 리 없다.


  작가는 혼자 있는 나의 경우도 있는 공간이나 접하는 책이나 영상 등과의 상호작용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시공간을 초월해 그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고 홀로 존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진정한 나'라는 실체는 없다고 강조한다. 과학계에서도 '자아'는 사실 실체가 없는 개념이며 환상일 수도 있다고 말하던데, 묘하게 오버랩 되면서 이상야릇한 기분에 휩싸였다.     


  인간은 복숭아일까, 양파일까. 만일 복숭아라고 생각하면, 가운데에 '진정한 나'에 해당하는 씨앗이 있고 주위에 '표면적인 나'인 과육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양파라고 생각하면, 씨앗은 없고 그저 여러 겹으로 구성된 그 자체가 바로 내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할 필요가 없고, 대신 '내가 좋아하는 나'의 비율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작가는 여행을 가는 건 새로운 분인을 만들기 위한 시도이며, 방안에 박히는 건 내가 원치 않는 분인으로 살지 않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여러 분인으로 살아가기에 비로소 정신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독박육아를 하는 양육자가 힘든 건 양육자로만 살아야 하기 때문이며, 화성에 가는 게 힘든 건 기술적 문제보다 그 좁은 우주선 안에서 2년 6개월 동안 직장에서의 분인으로만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이 전체의 내가 아닌, 어떤 한 분인으로 살아가는 것 때문이라고 인식한다면, 자살도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분인을 늘려가면, 스스로에게 더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시대가 아닌 분인의 시대가 올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몸과 마음이 편한 사이에 집중하게 된다. 소모적인 관계나 나를 갉아먹는 관계에는 놓이고 싶지 않다. 이십 대 때 '내가 견딜 수 없었던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과 거리가 너무나 먼 나의 분인이었다. 나는 나이나 성별, 계급 등의 차이로 발언권이 막히거나, 개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것, 편견으로 가득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그런 공간에 있는 나는 주눅 들어 있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긍정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아 도망을 가고 여행을 가고 이주를 했다.


  지금의 내가 편하다고 느끼는 건, 내가 좋아하는 분인으로만 살아가기 때문일까. 새로 맺는 관계에서도 나는 내 발언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예전에는 나이로 눌리고 기로 억압받곤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고 나의 의견을 말하려 애쓴다. 과거처럼 짓눌린 나로 살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딘가 꼬이거나 눌리지 않고 모든 면이 주름 없이 활짝 펼쳐진 상태의 내가 '진정한 나'라고 여겨왔는데, 내가 좇은 나는 결국 '내가 좋아하는 나'였던 것일까.


  분인이라는 개념으로 명확해지는 여러 상황들이 신기하게 여겨진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고 150년 만에 분인이라는 말이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원자처럼 쪼개지지 않는 단위로만 여겨졌던 개인이, 고뇌하고 탐구하는 인간에 의해 결국 쪼개지고야 말았다. 누군가는 완전히 상반된 분인들로 존재하고자 하고, 누군가는 특성이 많이 다르지 않은 근접한 분인들만 남기고 싶어할 것이다. 만일 분인이라는 개념이 개인처럼 널리 쓰이고 받아들여진다면, 사회는 이를 어떻게 바라볼까.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라며 두려워 할까, 아니면 분인의 존재를 수용하고 이에 맞는 제도를 도입하게 될까. 새로운 개념 앞에 끝없는 상상과 질문이 이어진다. 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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