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돌덩이를 얹고 있는 기분으로 몇 주를 보냈다.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희소식이었다. 연재하고 있는 내 글을 책으로 내고 싶다는 출판사의 연락을 받은 것.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락이었다. 책을 목표로 글을 쓰진 않았지만, 글을 계속 쓴다면 언젠가 책 한 권쯤은 내겠지, 하던 차였다. 게다가 연재하고 있는 건 내 미래를 위해 전자책으로라도 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글이었다. 연락을 받고 처음에는 얼떨떨하면서도 마냥 기뻤다. 밤낮없이 자리를 가리지 않고 쓰고 또 쓰며 문장 사이를 헤매던 날들이 스쳐갔다. 기쁜 것도 잠시,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책을 바라볼 때면, 이렇게 책이 넘치는 세상에 굳이 나까지 뭐 하러 글을 쓰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해 출간되는 책만 수만 권,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채 파쇄의 길로 가는 책 또한 셀 수 없이 많다. 이런 세상에 책을 낸다는 게 종이 낭비는 아닐까. 애꿎은 나무를 베어 나는 무얼 새기려는 걸까. 낭비가 되지 않으려면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하나. 내가 쓴 글이 늘어갈수록 서점이 반가운 게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졌다.
온라인 공간에서 글을 쓰면서도, 내가 늘 숙제처럼 지고 있는 건 감사에 대한 보답이다. 너무나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넘치는 읽을거리. 그 와중에 내 글을 선택해 읽어 내려간다면 분명 감사한 일이다. 그러니 나는 무언가 하나라도 독자의 손에 쥐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글을 쓸 때마다 이 숙제를 등에 지고 있었다.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이 쓰고 싶었다. 읽는 시간이 낭비가 아닌 글을 적고 싶었다. 독자의 시간만 빼앗는 온라인 글도 이런 마음이 드는데, 하물며 독자의 지갑까지 열어야 하는 종이책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별 차이 없다고 여겼던 공간의 차이가 갑자기 실감이 나면서, 묵직한 책임감이 나를 짓눌렀다.
은퇴를 꿈꾸지 않는다. 은퇴가 없는 삶을 꿈꾼다. 스물아홉에 떠나는 긴 여행은 삶을 전부 거는 것과 같았다. 모아둔 돈을 모두 걸어야 했고, 쌓아온 커리어를 내 손으로 엎어야 했다. 당시에는 결혼 적령기라는 개념이 있었는데 그 마저 내려놔야 했다. 여행을 택하면 여행 이외의 어느 것도 가질 수 없는 게임. 그게 내게는 여행이었다. 그래도 결국 선택한 건, 떠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 간절함 때문이었다. 떠나면서 나는 각오해야 했다. 이 여행을 택함과 동시에 하층민이 될 수도 있다는 각오. 평생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각오.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 외도나 휴식을 나태하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나의 선택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무엇이 그리 간절했을까. 나로 살고 싶다는 욕망과, 세상의 문법을 따르고 싶지 않았던 반항심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을 마음껏 누비고 싶었던 자유에 대한 갈망. 나는 내 전부를 걸어서라도 여행을 쟁취하고 싶었다. 한 번쯤 그렇게 떠나지 않으면 남은 인생이 후회로 점철될 것이라는 확실한 예감이, 나를 여행으로 자꾸 떠밀었다. 그때부터였다. 내게 은퇴는 없다고 생각한 건.
마음 한 편에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게 오히려 건강한 삶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나이를 잊고, 자신이 열정을 갖고 있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 삶. 돈을 떠나 사회 어딘가에서 쓸모 있는 인간으로 계속 자리한다는 건 얼마나 축복인가. 글을 붙들고 있으니, 이왕이면 글을 매개로 그런 역할을 한다면 좋을 것이다. 여행이 그랬듯, 글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뒤 꾸준히 쓰게 되었다. 뭐가 이리 극단적인지. 내 삶은 늘 모든 걸 걸어야 굴러가는 성질을 가진 듯했다.
출간은 내가 꿈꾸는 삶으로 한 발자국 다가가는 일이다. 죽는 날까지 글을 업으로 삼는 삶. 나는 결국 나무에 신세를 져야 한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야 하는 당위는 무엇인가. 생각이 많아지니 한동안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의미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 남들과 다른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돌덩이가 얹혀 있어서인지, 몸이 아팠고 기력이 쇠하는 게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 둘째까지 고열이 나 며칠 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내 소식을 듣고 먼저 작가가 된 지인은 내게 당부했다. 더 잘 쓰려고도 하지 말고, 더 그럴싸해 보이려고도 하지 말라고. 그저 쓰던 대로 쓰면 된다고. 기쁨에 취해 흘려보냈던 말을 다시 꺼내 골똘히 응시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그렇게 할 것이라고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도, 나는 결국 흔들리고 말았다. 속절없이. 더 잘 쓸 수도 더 못 쓸 수도 없는 게 글이라는 사실에, 쓴 시간은 배신을 하지 않는다는 진실에, 매달린다.
써지지 않는 글을 마감의 힘으로 꾸역꾸역 쓴다. 뱉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말들을 결국 글로 토해낸다. 죽는 날까지 쓰는 꿈을 향한 성장통을 앓고 있구나. 글이 써지지 않아도 결국 글 안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게 내가 선택한 내 삶의 방식이라는 것도. 지금까지 해온 대로, 나의 진심과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글로 풀어야지.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야지. 답은 언제나 그것뿐. 그러니 오늘도 오늘의 글을 뚜벅뚜벅 쓴다. 써낸다.
*[얼룩소 에세이 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은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