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of Convenience _ Cayman Island
Cayman Island
쿠바 근처에 있는 작은 섬나라, 케이만 아일랜드. 그녀는 자신의 국적을 밝히면서 아무도 모르는 나라라는 부연 설명을 했다. 나는 그녀를 뉴질랜드에서 만났다. 2005년이었다. 칼졸업을 하고 꿈을 접고 길을 잃은 나는 무작정 뉴질랜드로 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사귄 첫 외국인 친구였다. 낯선 나라에서 온, 영어가 모국어인, 매력적인 검은 피부를 가진, 나보다 한 살 많은, 법을 공부하던 친구였다.
그녀에게 물었다. 케이만 아일랜드는 어떤 나라야. 아주아주 작은 나라. 인구가 몇 천 명밖에 안 되는 나라. 산업이랄 게 없어 공부도 직장도 대부분 외국에서 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 사는 나라. 대신 타국에서 공부하더라도 교육비를 전부 지원해주는 나라. 모든 소비가 면세인 나라.
그녀는 내게 영어 이름을 지어주었다. Mary. 너를 보면 이 이름이 떠올라. 그때부터 나는 한국에서 온 Mary가 되었다. 그녀는 뉴질랜드에 법을 공부하러, 나는 영어를 공부하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우연히 만난 우리는 자주 어울렸다. 서툰 영어를 쓰는 내가 불편하지 않은지 그녀는 나와의 만남을 전혀 꺼리지 않았다.
학원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 했다. 네이티브 친구가 베스트라니. 너 영어 실력 늘기에 최고의 조건인데. 나도 처음에는 그녀의 조건이 끌렸다. 그녀는 나처럼 뉴질랜드가 낯선 외국인이어서 친구가 많지 않았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다보니 스피킹을 연습하기에 퍽 좋은 대상이었다. 그녀는 나를 꽤 좋아했는데 나의 어떤 점이 끌렸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외강내유 타입의 친구였는데,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다. 늘 쿨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을 포장하던 친구였다. 그 모습이 나랑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시절의 나도 그녀처럼 나약한 면을 드러내는 걸 극도로 싫어했으니까.
영어가 짧아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순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친구가 별로 없는 그녀의 곁에 좀더 머물고 싶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어떤 위안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녀에게는 집이 없었다. 돌아갈 집, 돌아가고 싶은 집, 꼭 돌아가야만 하는 집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선택이었다. 미국으로 캐나다로 영국으로 그리고 뉴질랜드로. 그녀는 공부를 핑계로 살 곳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절의 나도 돌아가고 싶은 집이 없었다. 살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그녀와 나의 그 시절 가장 큰 공통점이었지만, 나는 뉴질랜드를 떠나고도 한참 후에야 그걸 알게 되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은 대화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녀는 정부에서 일하는 엄마가 매주 보내오는 많은 돈을 편하게 쓰는 입장이었다. 나는 간신히 용돈을 받아쓰는 자린고비 학생이었고. 그 괴리감 때문에 그녀를 따라 다니면서도 늘 나는 주머니 사정을 살펴야했다. 돈이 너무 없는 날에는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돈을 쓰지 않아도 되는 만남이라면 기꺼이 나갔다. 함께 운동을 하고, 길을 걷고, 장을 봤다.
그녀는 나와 몇몇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파스타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녀가 만든 바게트 샌드위치를 싸들고 소풍을 함께 가기도 했다. 그녀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늦은 밤까지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녀는 나를 따라 한국 상점에 가는 걸 즐겨했는데, 특히 김을 좋아했다. 짭짤한 음식을 사랑하는 그녀는 혼자 밥을 짓고 김에 싸먹으며 건강한 식단이라고 무척 만족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그녀는 나를 설득했다. 함께 여행을 하자고. 여행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고. 그때까지 나는 제대로 된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설득에 넘어간 나는 결국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한국 친구 한 명과 그녀 그리고 나까지. 세 명의 여자들은 렌트를 하고 뉴질랜드의 북섬과 남섬을 함께 떠돌았다. 무작정 차를 끌고 낯선 도시를 하나 하나 방문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어렴풋이 여행이 무엇인지를 알아갔다.
뉴질랜드에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대자연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마주하면서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존하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짐을 싸고 풀고, 낯선 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새로운 도시를 걸으면서 기대와 감탄과 젊은 날의 공허와 언젠가 겪게 될 뉴질랜드의 향수를 떠올렸다. 그렇게 한 달쯤 우리는 떠돌았고, 그 여행이 끝난 후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돌아오니 한국은 11월이었고, 계절은 봄에서 가을로 넘어와 있었다. 스물 둘에서 갑자기 스물 넷이 되었고, 한달 남짓 뒤에는 스물 다섯이 되었다. 취업은 쉽지 않았고, 최종 면접에서 몇 번 낙방한 뒤 나는 뜬금없이 알바를 시작했다. 석 달쯤 정신없이 돈을 벌었고 그 돈을 싸들고 유럽으로 향했다. 홀로 떠나는 첫 여행이었다. 뉴질랜드에서의 여행이 없었다면 용기내지 못했을 도전이었다. 여행에 미친 삶의 첫 단추인지도 모른 채 나는 그렇게 유럽으로 떠났다.
노르웨이 인디 뮤지션인 Kings of convenience의 ‘Cayman Island’라는 곡을 처음 들은 건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제주에 카페를 차린 뒤 카페 분위기에 맞는 곡을 찾는다며 이런저런 곡을 듣던 때였다. Cayman Island, 한동안 잊고 지냈던 낯익은 나라가 제목인 노래. 보자마자 그녀가 떠올랐다. 반사적으로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시작하자마자 나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담담하게 내뱉는 두 남자의 목소리는 어쿠스틱 기타와 어우러져 나른한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노래를 들으면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케이만 아일랜드가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따가운 태양 아래, 나른한 오후 해질녘 풍경 속에, 삶에 대해 길에 대해 망연자실한 눈빛을 보내는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졌다. 동시에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제주에 오기까지 길고 길었던 내 방황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유럽을 시작으로 나는 기회만 닿으면 짐을 싸서 떠났다. 마치 여행이 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 되어 타국을 떠돌았다. 이 노래는 들을 때마다 나 자신을 찾고자 했던, 언행일치의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고자 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살만한 곳을 찾아 해매던, 여행지에서의 나를 떠올려주었다. 그리고 덤덤히 그 시절의 나를 어루만져주었다.
아직도 카페 플레이리스트에는 이 곡이 담겨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이 노래를 듣는다. 어쿠스틱 기타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하면 나는 여전히 습관처럼 창밖을 내다본다. 케이만 아일랜드를 알려준 그녀가 떠오르고, 동시에 가장 어두웠고 가장 자유로웠던 나의 한때가 떠오른다. 심장은 쿵 내려앉고 머릿속에는 잔잔한 강물이 흐른다. 3분 3초. 그 찰나의 시간동안 나는 그렇게 시간 여행을 떠난다. 아련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자유로웠지만 사무치게 외로웠던, 결국 나를 살려낸 그 시간 속으로 떠난다.
그녀와는 언제부턴가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녀는 그녀가 마음을 놓고 살아갈 곳을 결국 찾아냈을까. 여전히 살 곳을 찾지 못해 여러 나라를 떠돌고 있는 건 아닐까. 연락이 닿으면 꼭 이 노래를 언급하고 싶었지만 아직 하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언젠가 그녀의 나라를 가게 될까. 케이만 아일랜드는 어떤 곳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