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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Sep 21. 2018

제주에서 아이를 키우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제주로의 이주를 택한 건, 아이가 태어난 뒤 삶에 대한 막연한 불안에서 시작됐다.

남편은 야근수당이나 휴일수당은 당연히 생략하는 한 IT중소기업에 다녔다.

일손이 적다보니 야근은 당연했고, 토요일도 격주로 출근해야 했다.

한 집 살림을 하고 일년쯤 그런 시간이 흐르자 남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뱃속에 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우리의 미래는 좀 뻔했다.

남편은 일에 파묻혀 자식 얼굴 보기가 힘들테고 난 아이를 낳으면 독박육아에 지쳐 허덕일테지.


덜 벌고 덜 바쁘게 살고 싶었다.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었다.

유독 사랑받은 기억이 적어 아이에게 사랑을 담뿍 주고싶다는 마음이 좀 유별났다.


힘들기만 해보이던 임신은 제주에 정착하고 일 년만에 현실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찾아왔고,

우리는 카페 영업시간을 단축했다.


남편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침 아홉시반쯤 집을 나서고 저녁 여섯시반에서 일곱시쯤이면 귀가한다.

그새 우리 식구는 아들 둘을 포함해 넷이 되었다.

출산 전에는 이웃과 자주 맥주 한 잔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출산 후에는 사실상 똘똘 뭉친 가족애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매일 아침 식사 후 첫째의 등원준비는 남편이 책임진다. 저녁식사 후 아이들과 몸으로 노는 것도 남편의 몫이다.

육아를 최우선에 두고 살아가는 지금의 내게 육아의 부담이 더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침과 저녁 남편의 손길은 고맙고 소중하다.


아이를 재우고 둘이 마주 앉아 맥주를 한 잔 하기도 하고 같은 공간이지만 서로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

아이들과 함께 깔깔대는 시간도 행복하지만 둘이 보내는 오붓한 시간도 우리에겐 큰 행복이다.


둘이지만 우리의 대화 속엔 결국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이 그날 보여준 놀라운 말이나 행동을 전하기도 하고 엄마로서 고민됐던 시간들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기도 한다.

누구보다 내 말에 귀기울여주고 누구보다 아이들의 말과 행동에 행복해하는 사람은 남편이다.


제주 시골마을에 손바닥만한 카페를 운영하며 빚을 갚고 아이 둘을 키운다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다.

제주도도 예전같지 않아 정말 많은 카페와 숙소가 들어섰다.

매출은 점점 줄어가고 생활고에 허덕인다.

막 18개월이 된 둘째도 어린이집에 보내고 아르바이트라도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버틸 때까지 버텨보려고 한다.

아이들이 부모의 품을 가장 좋아하는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일지라도 분명 행복한 순간들이 아이들의 몸 어딘가에 각인될 거라 믿는다.

그 각인된 유년기의 행복이 아이들에게 먼훗날 큰 자산이 되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부모를 떠나가는 어떤 순간이 되면,

나 역시 남편과 함께 열심히 밥벌이에 나서야한다는 걸 안다.

경력도 단절돼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지는 가늠할 수가 없다.

내 경력이나 학력 따위 상관없는 허드렛일을 해야할 수도 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지금의 행복과 사랑이 다가올 그 순간에 분명한 에너지가 될 것을 믿는다.

육아의 고단함 속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지난 날의 방랑들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 가슴깊이 느끼고 있기에.

(모든 걸 버리고 긴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육아는 고되다.

내가 경험한 어떤 일보다 변화무쌍하고 예측불가하다.

동시에 놀랍고 경이롭다.

한 사람이 사람이 되어가는 놀라운 여정을 함께 한다는 건 분명 그런 과정이다.


육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국가의 안정된 도움이라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그렇게까지 진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육아를 해야한다.


온종일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네 살 아이와 만지기만 하면 사고를 치는 말썽꾸러기 두 살 아이를 홀로 감당하다보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기도 한다.

남편과 아이들 앞에서 투닥거릴 때도 있다.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아이들의 엉덩이를 못내 툭툭 치고말 때도 있다.

곧바로 후회할 걸 알면서도 이따금 감정은 이성을 지배한다.


사람을 길러내는 일에 정답은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그러하듯.

내가 선택한 지금의 삶이 나중에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도 예상할 수 없다.


아이들은 제주에서의 삶을 답답해할 수도 있고, 황홀했던 유년기의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생활고가 심해져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고 우리 가족이 함께 웃는 순간들이 줄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도 아이들을 끝까지 내 손으로 키워내려는 이유는 하나다.

덜 후회하기 위해.

먼훗날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한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너무 고단해 아침마다 눈이 떠지지 않고,

만성 피로와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행복하다 순간순간 느끼게 해주는 아이들.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 사랑스러움을 매순간 가슴깊이 느끼며 살 수 있는 건 어쩌면 여기가 제주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밤 열시까지 영업하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없는 제주라서.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낡은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해도 어색하지 않은 제주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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