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순우 May 24. 2024

글 그리고 길

그림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쓰는 수업을 진행한다

어쩌다 보니 수업 하나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우리 마을은 작년부터 책과 관련한 예산을 지자체로부터 지원받고 있는데, 그 사업의 일환으로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다 그 중 하나를 내가 담당하게 됐다. 오래 전부터 머릿 속을 부유하던 꿈 하나가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고 발제해 토론을 하고, 글을 쓰는 것. 오랜 시간 머릿 속을 굴러다니던 생각은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자리에서 불쑥 말이 되어 내 입밖으로 튀어나왔고, 결국 수업까지 맡게 되었다.


수업이라고는 이십 대 초중반 잠시 아르바이트로 학원강사와 과외 선생님을 해본 게 다인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수업을 맡다니. 글쓰기 모임도 수업이라 부른다면, 경력이 좀 늘어날까. 어린 학생들을 이끌고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낯선데, 토론을 진행하고 글쓰기를 지도해야 한다니. 이 방면으로 아무런 경력이 없는 사람이 덜컥 수업을 맡았으니, 아무래도 미친 게 틀림 없다 싶을 만큼 나는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다.


MBTI로 말하자면 나는 N이다. 나무보다 숲을 읽는 걸 더 좋아한다는 말이다. 의도가 명확하지 않으면 동기부여를 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수업 준비를 하다 보니 이런 나의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첫 번째 수업은 ‘생각’에 대한 것이었다. 토론을 하고 글을 쓴다는 건 결국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아이들과 수업을 진행하려면 ‘왜 생각해야 하는지’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했다.


두 번째 수업은 토론에 대해 알아보았다. 인류 역사에서 토론은 언제부터 등장했는지, 민주주의 사회에서 왜 토론이 중요한지. 토론 끝판왕이었던 소크라테스를 소환해 그의 활약과 죽음을 거론하며 토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 번째 수업에서는 선정한 그림책을 함께 읽고, 각자 궁금한 질문을 적어보았다. 이왕이면 닫힌 질문이 아니라 열린 질문으로. 함께 논의할 가치가 있는 질문들을 적고 발표했다.


네 번째 수업은 드디어 토론. 주제는 그림책에서 발제한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한국인이 삶에서 가장 의미있다 생각하는 돈을 키워드로 놓고, ‘돈이 많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그룹과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그룹으로 나누어 토론을 진행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수렵채집 시절처럼 지내면 돈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부터 그럼에도 돈은 필요해서 만든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원시시대, 문명사회를 거쳐 자본주의, 임금 격차 문제까지 등장한 것.   


다섯 번째 수업에서는 사람은 어떤 존재이고, 행복의 정의는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다른 생물과 달리 사람만이 갖고 있는 특성을 생각해 보고, 각자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나’의 행복은 결국 ‘너’의 행복, 그리고 ‘사회’의 행복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 보려 했는데, 잘 진행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여섯 번째 수업을 앞둔 상태다. 다음 주제는 ‘글’이다. 글쓰기로 가기 전에 ‘대체 글이 뭔지’, ‘왜 써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하는 것. 수업자료를 만들며 나는 세계지도를 가져오고, 쐐기문자와 길가메시 서사시 사진을 집어 넣는다. <세계사 편력>을 꺼내어 보다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책을 뒤적인다. 문자가 어떻게 탄생했고, 왜 생겨났으며, 인류 최초의 글은 무엇이고, 왜 말로만 하지 않고 글을 쓰게 됐는지를 짚기 위해 멀고 먼 길 돌아가기를 자처한다. 자료를 다 만들고는 이게 뭔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내게 글자는 인간 최고의 발명품이다. 글은 인간으로서 유전자를 극복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 중 하나이고(호모 사피엔스에게는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유전자가 없다). 이를 조금이나마 아이들에게 전달하고 싶어, 인류의 역사와 사전과 문헌을 뒤진다. 큰 그림을 알려준 뒤 글을 쓰게 하면, 적어도 왜 글을 써야 하느냐며 의문하지는 않지 않을까.


의문은 실은 내 오랜 습관이다. 나무만 가르치는 수업은 늘 내게 의문을 품게 했다. 문학을 왜 배우는지, 미적분을 왜 알아야 하는지, 원소 기호는 왜 외워야 하는지, 철학자들의 계보와 이론을 왜 익혀야 하는지. 내게 커다란 숲을 먼저 보여주고, 그 숲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를 설명해 주는 선생님은 어디에도 없었다. 학교를 모두 졸업하고 책을 펼친 뒤에야 나는 혼자 힘으로 더듬더듬 숲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방식이 모두에게 통할 거라고 믿지는 않는다. 설명 없이도 순종적으로 수업을 잘 따라오는 아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나 같은 아이도 있을 것이기에,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고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아이가 존재할 것이기에. 나는 어쩌면 어린 나를 위로하며 수업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수업은 누군가에게는 쓸데없이 장황한 수업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 수업일 테지.


나는 잘 가고 있는 걸까. 아직은 모르겠다. 확실한 하나는 이게 내 방식이라는 것.


“글이란 단순히 글자라는 부호를 집합시켜 놓은 것이 아니다. 글은 사람의 생각, 정신을 나타낸다. 글은 곧 길(진리)이다. 그러고 보니 ‘글’과 ‘길’은 묘하게도 닮았다. 가운데의 홀소리 하나가 다를 뿐이다. 글을 가르치는 것은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친다고 하지 않고 보여 준다고 해도 좋고, 길을 가도록 도와준다고 해도 좋다. 어쨌든 글을 가르치는 사람은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글쓰기, 이 좋은 공부>, 이오덕,  p43-44”


이 글을 읽고 숨이 턱 막히던 날이 있었다. 내가 대체 뭐라고 글쓰기를 가르친단 말인가, 글을 가르친다는 건 정말 길을 가르치는 것인가, 하며 스스로를 질책하던 날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나를 향해 손가락질이라도 할까 싶어, 차마 내 글에 인용도 하지 못했던 날들. 그 날들로부터 나는 사실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여전히 내 안에는 양가적인 마음이 부대낀다.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깜냥이 되든 되지 않든 그저 가보리라 했던, 너무나 절실했던 순간. 두렵지만 그 순간의 교훈을 기억하며 발을 내딛는다. 순탄할 거라 믿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이다. 쓰다 보니 책을 내고, 고민하다 보니 수업을 하게 된 것처럼. 한 발자국씩 가다 보면 다음 길이 열릴 거라 믿는다.


우선은 다음 수업도 별 탈 없이 진행할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너무 먼 길은 보지 않으려 한다. 그것만이 내가 이 길을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쩌면 그게 내가 말하고 들어야 할 인생의 유일한 길인지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