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학년인 첫째가 병설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아이는 학교에 정기적으로 와서 책을 읽어주는 선생님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르바이트하는 분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아이는 다른 학생의 엄마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보호자가 책을 읽어준다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도 학교에서 책을 읽어주면 안 되냐고 내게 물었다.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지 못하던 때라, 그날 대화는 대충 얼버무리며 끝이 났다.
아이가 1학년에 입학하고서야 나는 책 읽어주는 선생님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는 보호자 책 동아리가 있고, 그 동아리 소속 보호자들이 각자 학년을 맡아 정기적으로 책을 읽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하는 사람이 있나 보다' 하고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는 카페를 하던 터라 늘 시간에 쫓겨 사는데 일 하나를 더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러다 학기 초 총회에서 보호자 동아리 소개 때, 책 읽어주는 선생님이 부족해 유치원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라도 읽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굳이 내가?'라는 생각이 들어 못 들은 체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날 들은 이야기가 계속 내 어깨에 짐처럼 내려앉아 나를 짓눌렀다. '누군가가 내 아이에게 책을 읽어줬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무임승차하는 게 아닐까.'
그로부터 수개월이 흐른 뒤 학교 행사가 있어 방문한 날, 나는 다시 한번 책 읽어주는 선생님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그날 나는 용기 내어 보호자 책 동아리 회장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제가 읽어줄까 봐요. 유치원."
회장은 반색하며 나를 반겼다. 연신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활동해 온 분이 이제 해보겠다는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장면 앞에서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렇게 나는 갑자기 책을 읽어주는 선생님이 되었다.
그게 2년 전 가을의 일이다. 나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유치원에 이어 4학년 아이들에게 정기적으로 책을 읽어준다. 나는 사실 아이들 책에 무지한 사람이었다. 내 책에만 관심을 두었지 아이들 책에는 무관심했다. 워낙 주위에서 물려받은 책이 많아, 집에는 늘 책이 가득했다. 굳이 책 육아를 거창하게 시작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책을 수시로 꺼내 보았다. 따로 책을 사주거나 선정해서 읽어줘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책을 읽어주자니 앞이 캄캄했다. 우선 선배 보호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책 이름과 작가 이름을 하나씩 익혀갔다. 도서관 어린이자료실에서 작가별로 작품을 읽어보며 조금씩 반경을 넓혀갔다. 아이들과 옹기종기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에 함께 빠져드는 시간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책을 읽고 난 뒤 아이들의 감상평을 듣는 것도 남다른 재미가 있었다. 몇몇 작품은 아이들보다 어른인 내가 더 빠져들기도 했다.
작지만 도움이 되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내가 받은 게 훨씬 많은 시간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림책이라는 근사한 장르를 알게 되었고, 간결한 글과 그림 속에 깊은 철학을 담아내는 멋진 작가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아직은 내가 아는 세상이 너무 작아 갈 길이 멀지만, 새로운 세상이 점점 열리는 느낌이다.
얼마 전에는 어린이도서연구회를 학교로 초청해 다른 보호자들과 함께 강연도 들었다. 책 읽기를 하고 나서 아이들과 어떤 후속 활동을 하면 좋을지 물었는데, 뜻밖에도 강사는 활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했다.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살아있는 반응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강사는 그날 강연 자리에서 유은실 작가의 <멀쩡한 이유정>에 나오는 단편 '눈'을 낭독했다. 늘 읽어주기만 했지, 누군가의 낭독으로 이야기를 듣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작품 속 주인공인 영지는 세상 모든 것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소녀다. 엄마를 쫓아다니며 계속 새로 찾아낸 불공평한 것을 읊어댄다. 아빠를 죽게 만든 하나님도 불공평하고, 동네마다 공기의 질이 다른 것도 불만이다. 공평한 게 하나도 없다는 영지의 말에 엄마는 내일 새벽에 눈이 올 것 같다며, 모든 걸 덮어주는 눈은 공평하다고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 온통 흰빛의 세상을 바라보며 영지는 눈은 정말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잠시 후 옆집 옥상에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조그만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그 아이는 장갑이 없어 눈을 오래 만지고 놀지 못한다. 영지는 눈도 장갑이 있는 사람에게만 공평하다며 불평한다. 동시에 집에 있는 새 장갑을 떠올리며, 자신이 장갑을 주면 세상이 공평해질까, 잠시 고민한다.
영지는 세상에 장갑 많은 애가 얼마나 많고, 아빠도 있고 부자인 애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내가 줘야 하냐며 불만을 쏟아낸다. 못 본 척하려 하지만 자꾸 아이가 눈에 밟힌 영지는 결국 자신의 장갑을 벗어 아이에게 던져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새 장갑을 낀다. 작고 여린 한 소녀가 스스로 조금 공평한 세상을 완성하는 대목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혼자 읽었다면 이렇게 감동적이었을까 싶을 만큼, 누군가의 살아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다른 보호자들과 함께 귀 기울여 들으며 동시에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도 너무나 값지게 여겨졌다. 책 읽으라는 백 마디 잔소리보다 한 번 읽어주는 게 더 가치 있다는 걸 가슴 깊이 느낀 시간이었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집에서 책을 읽어주는 보호자가 많다. 하지만 아이들이 글자를 깨치고 스스로 읽기 시작하면 책을 직접 읽어주는 보호자가 현저히 줄어든다. 여전히 누군가는 집에 책이 없거나 책을 읽어줄 사람이 없다.
학교에서 모든 아이들에게 동시에 책을 읽어준다는 건 무상급식 같은 건지도 모른다. 모든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동등하게 마음의 양식을 나눠주는 일이니까. 그 시간만큼은 모든 아이들이 공평하게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니까.
얼떨결에 시작한 일이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는 계속 학교에서 책을 읽어주려 한다. 자신의 분홍 장갑을 나눠준 영지처럼 책을 읽어주는 행위가 잠시라도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니. 내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닿아 잠시라도 온기를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공평한 세상이라는 신기루는 어쩌면 이런 작은 실천들로 조금 더 가까워지는 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