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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Dec 09. 2024

당신은 민주시민입니까

제2의 윤석열을 뽑지 않으려면

전 국민이 정치 공부 중이다. 온갖 미디어는 정치 기사로 들끓고 개인적인 일에 집중하다가도 나라가 걱정되어 수시로 새로운 기사가 뜨지 않았는지 찾게 된다. 세상이 뒤숭숭하다 보니 이제 초등학교 1, 3학년인 우리집 아이들도 범람하는 정치 용어 속을 함께 헤맨다.      


“엄마 계엄이 뭐야?” “탄핵이 뭐야?” “대통령은 왜 그랬대?” “국민의힘은 왜 투표를 안 해?” “민주주의가 뭐야?” “보수는 뭐고 진보는 뭐야?” “계엄령을 내리면 뭐가 달라져?”     


매일 질문 폭탄을 떠안는 나도 새삼 자료를 뒤지며 아이들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해보려 노력한다. 이른바 계기 교육. 학교 교육과정에 제시되지 않은 특정 주제에 대해 이루어지는 교육을 계기 교육이라 한다. 추석을 맞아 추석에 대해 알려주고, 삼일절을 맞아 삼일절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교육은 학교에만 있지 않다. 가정에서도 아이들을 교육할 책임이 있다. 각 잡고 앉아 공부를 하는 것보다 특정 이슈에 따라 아이들과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는 걸 평소 선호한다. 날씨를 함께 검색하다 기상과 기후의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다 사실 저 고양이와 인간의 유전자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언급하는 식이다.       


비상 계엄령이 터지자 밥상머리에서 남편과 정치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고,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듣는 아이들의 질문에 답을 하는 경우도 늘어난다. 난데없는 계엄령에 피가 거꾸로 솟지만 위기는 기회이니, 아이들과 함께 시민의식을 기르려 노력한다. 정치가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경험을 쌓고, 나의 공부와 판단이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신념이 생겨야 아이들이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과 정치 이야기를 하고 정치 관련 책을 들여다 본다.


  

<교육기본법>은 교육에 대한 국민의 권리와 의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 그리고 교육 전반의 제도와 운영에 관한 기본적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제2조 교육이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목적지가 분명해야 길을 잃지 않는다. 교육의 목표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민주국가의 발전을 꾀하며,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교육은 본질적 가치를 잃은 지 오래다. 교육은 신분 상승을 위한 주요 수단으로 전락했다. 본질을 잃은 교육 현장에 민주시민을 기른다는 목표가 설 자리는 없다.     


오래 전 우연히 접한 영상에서 한 여성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질문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질문에 노 전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민주시민을 기른다는 마음으로 낳아보면 어떻겠냐’고. 그 대답을 듣고 한동안 멍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저런 마음으로 아이를 낳을 수도 있구나, 내가 엄마가 된다면 민주시민을 기르는 건 나의 의무구나.      


아무도 믿지 않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단 한순간도 그 마음을 잊은 적이 없다. 내 속에서 나온 두 명의 아이들은 장차 투표권을 갖게 되는 시민이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누리며,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잊지 않는 아이들로 자라길 바란다. 아이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줄 능력은 없지만,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는 아이들을 길러내고 싶다.    

  

계엄령 사태를 바라보며 시민의 역량을 기르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절히 깨닫는다. 지난 4월 타개한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인 홍세화 님과 이송희일 감독의 대담을 다룬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에는 시민성이 실종된 한국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겹겹이 서술돼 있다.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 홍세화와 이송희일의 대화, 삼인


“‘시민’이란 거저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걸 자각하고, 서로 공통의 삶의 조건을 위해 연대할 때 비로소 시민이 출현합니다.” - 이송희일, p235

 

“황국신민에서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되는 대신 신자유주의 지배 아래 고객이 된 거예요. 학교는 학생들에게 등급을 부여하는 서비스 장소가 됐어요. 학부모들은 자식들이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하는지 아예 관심 없어요. 무슨 교육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고 오로지 내 자식이 몇 등급인가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에서 저는 공교육의 죽음을 봐요.” - 홍세화, p267-268


시민성이 실종된 건 단지 자라나는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다. 어른 역시 지금 아이들과 비슷한 교육 환경 아래 성장했다. 지금은 당장 계엄이라는 무거운 현실 앞에 분노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평화가 이어지면 우리는 또 시민이라는 걸 잊고 고객에 머물게 되는 건 아닐까. 시대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나 방향을 잃고 개인 신분 상승에만 다시 골몰하는 건 아닐까.  


“모든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 19세기 반동적 보수주의자 조제프 드 매스트르의 말이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건 우연의 일이 아니다. 국민 절반의 선택이었다. 이런 선택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나와 사회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잠깐 시민에 머물렀다 다시 고객으로 돌아갈 것이다.     


민주시민의 역량을 길러야 하는 건 아이들 뿐만이 아니다. 어른 역시 함께 역사를 공부하고, 비판 의식을 기르고, 사안을 명확히 보고 시대의 방향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야 제2의 윤석열의 등장을 막을 수 있다. 탄핵에 반대해도 다 잊고 찍어주더라는 말 따위를 내뱉는 정치인을 국회에 들여보내지 않을 수 있다.     


계엄령은 한국 사회를 하루 아침에 수십 년 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 사태를 수습하고 수십 년이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려면 어른들 역시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정말 시민인가?’ ‘나의 인문학적 소양은 어느 정도인가?’ ‘나의 시민성은 어떤가?’ ‘혹시 확증편향에 갇혀 있지는 않나?’  

    

묵직한 심정으로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시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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