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비정상가족은 없다

by 박순우

2022/03/29 얼룩소



어제 얼룩소에는 망나뇽 얼룩커님과 융숨 얼룩커님이 동거와 결혼에 대한 질문을 올려주셨어요. 많은 얼룩커분들이 좋아요를 누르고 답글을 달아주셨는데요. 답글을 살피면서, 동거와 결혼에 대한 인식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저는 사실 이 두 가지의 물음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하나의 질문으로 여겨졌죠.


저는 결혼을 해서 살고 있지만, 이따금 합법적인 동거가 가능했다면 동거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여전히 여자들에게 시댁은 무거운 책임의 공간이고, 인간이 과연 일부일처제에 맞는 동물인가에 대한 의문을 여전히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번 코로나 시국을 겪으면서 주변에서 제사를 아예 없애는 집을 제법 목격했습니다.(정말 부럽!) 코로나는 재택근무, 비대면 진료 뿐만 아니라 각 가정의 풍경까지 많은 걸 빠르게 변화시키는데 일조하게 되었죠. 어르신들도 명절에 꼭 모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데 코로나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아직은 갈 길이 멀죠.


결혼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면 바로 이런 의무에 대한 부분이 가장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기에 의무가 많아지기 때문이죠. 양가 경조사를 챙기고, 때때마다 안부전화를 하고, 결혼으로 파생된 여러 관계에 치이다 보면 좋았던 부부 관계도 틀어지는 경우가 많죠. 사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맞춰가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여러 관계까지 얽히면 결혼생활은 그야말로 지옥이 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사랑만으로 살지 못한다는 말도 하게 되죠.

제 주변에는 결혼하지 않고 동거를 고집하는 사실혼 관계의 커플이 있어요. 겉으로 보기에 딩크족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여요. 그런데도 결혼은 한사코 거부하고 동거를 지속하고 있죠. 저 역시 결혼하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아요. 그분들의 선택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어요. 둘 중 하나가 갑자기 수술이라도 받게 되면, 아무리 사실혼 관계라고는 하나 수술동의서에 서명할 수 없다는 점이죠. 두 분 모두 혈연가족은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이런 경우가 생길까봐 염려가 되더라고요.


다양한 가족형태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지는 제법 됐어요. 우리나라는 아직 혈연, 이성간의 혼인만 ‘정상가족’으로 인정하고 있죠.(저는 정상이라는 말을 상당히 싫어합니다만,) 정상가족을 꾸리지 못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가족의 권리를 전혀 누릴 수 없는 게 바로 지금의 제도입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비정형가족’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는데요. 일례로 기본소득당의 오준호 후보는 ‘생활동반자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기도 했습니다. 생활동반자제도란, 이성애 혼인 여부와 관계없이 돌봄, 생계, 부양을 함께하는 관계를 ‘생활동반자 관계’로 공식 인정하고 등록시 법제도상 가족에게 부여하는 자격과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입니다. 생활동반자가 되면 서로 일상가사에서 대리권을 행사할 수 있고, 돌봄과 부양의 의무를 함께 질 수 있습니다. 공동재산과 공동양육에 동의했다면 상속권과 친권도 인정하게 됩니다. 그 외에도 주택청약이나 전세자금 대출 등 기존 혼인부부와 동등한 자격을 얻을 수 있고, 의료행위에 대한동의권, 상주로서의 장례 등도 치를 수 있습니다.


생활동반자 제도는 이미 미국과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국가가 도입해 시행하고 있습니다.(위 기사에 나라별 사례가 자세히 나옵니다.) 우리나라는 2014년 진선미 의원이 법안을 마련했지만 보수정치인과 종교인의 반대로 발의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정치권의 행보는 사실 국민 인식과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2020년 진행한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다양한 가족에 대한 인식이 2015년에 비해 전반적으로 달라진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20대의 경우 절반 정도가 비혼 독신(53%), 비혼 동거(46.6%), 무자녀(52.5%)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어제 결혼과 동거에 대해 질문을 던진 두 분의 얼룩커도 모두 이십대죠. 점점 인식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걸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번 조사에서 배우자가 있는 응답자의 경우 2.8%가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가운데 세 명 중 한 명은 향후에도 혼인 신고 계획은 없다(29.7%)고 답했습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고령층일수록 혼인 신고 계획이 없는 것(60대 59.5%, 70대 이상 75%)으로 나타난 점이었어요. 서로 의지해 살아가지만, 굳이 혼인 신고로 강제성과 법적 권한을 갖지는 않고 있는 것이죠.


혼인하지 않고 동거를 유지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가 31.0%로 가장 높았고, 결혼 제도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싶다는 의견도 18.9%로 상당히 높았습니다. 살아 보면서 상대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고 한다는 응답도 18.6%였습니다. 동거에 찬성하는 연령대는 20대가 높지만, 동거를 실제로 하고 있는 연령대는 가장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60, 70대라는 점이 정말 흥미로웠어요. 동거 커플이 실제 법적 부부보다 서로에 대한 만족도가 더 높다는 사실도 상당히 주목할만 합니다.


국민들은 이미 다양한 가족형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정작 정치권에서는 성소수자 문제에 갇히고 종교단체 눈치보기를 하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런 정치권의 느린 행보 때문에 정작 피해를 입고 있는 건 미혼모·미혼부 가정입니다. 2016년 기준 한국의 한부모 가족은 154만 가구이고 미혼모·미혼부는 3만 3000명에 이르는데요. 미혼모·미혼부의 경우 여전히 양육비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출생 문제가 심각한데도 아직까지 법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아이를 키우면서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한국한부모연합, 변화된미래를만드는미혼모협회 인트리, 서울한부모회 등은 건강가족기본법의 개정을 촉구하고 있는데요. 이 법에서 ‘가족’을 여전히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로 한정짓고 있기 때문이죠. 또한 이 법에 포함된 ‘건강’이라는 문구를 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자칫 법에서 정한 범위에 속하지 않은 가정은 ‘건강하지 않은’ 가정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죠.


‘건강’이라는 단어는 ‘정상’이라는 단어와 바꿀 수도 있겠죠. 앞에서도 저는 ‘정상’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고 언급했는데요. 정상은 규정 짓는 순간 비정상의 범위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비장애인을 정상이라고 칭하면 장애인은 비정상이 되고, 양부모 가정을 정상이라고 칭하면 한부모나 비정형가족의 경우는 비정상이 되는 것이죠. 진짜 비정상은 이렇게 규정짓는 현재의 법과 낡은 인식이 아닐까요. 비정상가족이라는 개념은 이제 사라져야 합니다. 비정상가족은 없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저출생은 정말 '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