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렌은 자유에 도달하지 못한 불쌍한 인간인가
얼마 전에 진격의 거인을 봤다.
왜 명작이라고들 하는지 이해했다.
떠오르는 생각들이 너무 많아서 글로 옮기고 싶었는데,
너무 많아서 글을 쓰지 못했다.
100화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어진 그 무수한 사유의 흐름을 다시 복기하고 글로 풀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만화 안에 담긴 것들을 그렇게 쉽게 언어화하여 정의할 수 있는 것인가?
에 대한 의문이 나를 멈칫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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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그래봤자 에렌은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지 못한 불쌍한 인간이다."
라는 댓글에 수천, 수만의 공감이 달린 걸 봤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해석이구나..
나는 에렌은 자유로웠다고 생각하는데.
저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데, 나는 왜 한 번도 에렌이 자유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
다른 이들이 말하는 완전한 자유란 뭘까?
그리고 그들은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진격의 거인에 대한 글감을 다 써내자면 무수히 다양하고 방대해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자유에 대한 '저 몇 가지의 의문들'이 글로써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하나의 키워드에 존재하는 의문들을 다 나열하는 것만도 오랜 시간이 드는 일일 테니까.
(그 나열부터가 귀찮아 내 안에 묵혀있기만 할 뻔했는데)
에렌은 자유롭지 못했다는 해석이 있다.
유미르에게 조종당했고,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거인화가 됐고, 자신이 강하게 원했던 미카사와의 행복한 결말조차 선택하지 못했고,
결국은 '체스판 위의 말'에 불과했다는 해석이다.
그 비교 인물로 리바이를 들기도 한다.
그 말은 일견 맞다. 자유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운명이나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대적 개념을 바탕으로, 외부의 무언가에게 휘둘리거나 강제로 내몰린다면 자유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한 해석은 내 안에도 분명 존재하고,
그 관점에서라면 에렌은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진격의 거인 세계관 속에선 인과관계가 모호한 무한 굴레가 존재하기에, 유미르가 에렌을 조종한 것인지 에렌이 유미르를 조종한 것인지는 명확히 가를 수 없고, 에렌이 '당한' 것에 대해서는 자유가 있고 없고를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위와 같은 해석을 내 사유의 “출발점” 정도로만 둔다.
그 해석 안에 에렌을 가두는 것은,
인간의 복잡성을 너무 쉽게 외면하거나 간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하게도 내 안에서 "종착점"이 될 순 없다.
끊임없이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논증하고, 반박하고, 다시 세우고, 무너뜨리고, 또다시 이어 붙이는 과정을 수없이 거친 끝에,
지금으로선 더 갈 수 없이 내가 도달한 결론은,
"에렌은 누구보다 자유로웠고. 그 자유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초상"이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롭지 못했다"라는 해석은,
자유를 100%의 독립으로 보는 듯하다.
완전무결한 자기 결정.
하지만 그런 자유는 애초에 인간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제약 속에 놓인다.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고, 태어난 땅을 선택하지 못하고, 처음 접하는 언어와 사회와 문화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 모든 조건 속에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니 “완벽한 자유”라는 전제 자체가 이미 허상에 가깝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인가.
사유의 과정이 긴 것에 비해 내가 내린 답은 꽤 단순하다.
'여러 가지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51:49의 비율로라도 기운다면, 단 1이라도 내 마음과 의지가 향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기에,
그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자유의 최선이다.
에렌은 그렇게 살았다.
그는 단 하나의 욕망에 몰입한 괴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렇게 몰입할 수 없는' 인간이었기에 오랜 시간 치열하게 수많은 모순과 충동을 동시에 겪어냈다.
사랑하고 싶어 했고, 파괴하고 싶어 했고, 지키고 싶어 했고, 벗어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모순들을 억누르지 않고 끝까지 끌어안은 채, 매 순간 자기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나아갔다.
내 눈에 그것은 진정한 자유였다.
나는 자유를 “완전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에 더 가까운 가치라고 본다.
완전한 자유라는 것이 가능한가?
에렌이 "미카사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을 맺거나 "인류의 해방"을 이뤄냈다면 과연 자유로워졌을까?
(사실 인류의 해방이라는 것 자체도 허상이지만 차치하고.)
인간은 완전한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자신이 완전한 자유라고 생각한 그것에 도달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 자유의 도달'에 얽매인 또 다른 부자유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진짜 자유는 완성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늘 미완성의 과정 안에, 치명적인 균열 안에, 끝없는 흔들림 속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자유는 도달하고 소유하려는 자가 아니라, 순간순간 발견하고 붙잡고 누리려는 자에게 찾아온다.
내가 에렌에게서 본 것은 바로 그러한 "불완전함"이었다.
그는 유미르에게 끌려간 동시에 유미르와 공명하며 그를 움직였고, 자신의 미래를 보았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길을 택했다.
자유롭지 못함의 증거로 보이는 그 모든 흔적들이,
사실은 인간 자유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불완전했기에 자유로웠고, 자유로웠기에 끝내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를 말하면서 책임을 빼놓을 수 없다.
책임 없는 자유는 단순한 '충동'일뿐이다.
에렌은 땅울림을 일으켰고,
그 선택은 수많은 죽음을 낳았다.
그것은 분명한 비극이었지만, 그는 그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결말을 담담히 기다리며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었고, 죽음의 순간엔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듯도 보였다.
그것은 실패나 자포자기가 아니라, 자유와 책임을 함께 끌어안고 살다 가기 위해 '선택'한 그만의 방식이었다.
한편으로 나는 그 세계관 안에서 에렌은 '자신만의' 완전한 자유에 도달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건 사랑하는 친구들과 미카사에게 죽음을 맞이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땅울림을 울림으로써 '51'에 해당하는 자신의 욕망을 향해 나아갔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에 죽음으로서 '49'에 해당하는 자신의 욕망이 실현되도록 이끌었으며,
'49'에 해당하는 다른 가치와 욕망들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필연적으로 수반될 '책임'은,
자신의 죽음으로 진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란 무언가를 얻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을 짊어질 것인가에 대한 태도'라고 볼 수도 있다.
자유는 무겁다.
그 무게를 기꺼이 감당하는 자만이 자유롭다.
그리고 에렌은 그 무게를 감당한 인간이었다.
"그 관점이라면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거 아니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한다.
이 관점이기 때문에, 어쩌면 '대부분의 인간'들이 완전한 자유는커녕 에렌이 도달한 그 지점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유의 문턱에조차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현실이니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자기 마음이 기우는 쪽으로 향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외부의 기준, 사회의 틀, 타인의 시선을 우선한다.
그리고 그걸 따라가면서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 자위한다.
자유의 시작점은
작게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들여다보는 것”,
크게는 “자신을 아는 것”이다.
에렌은 자유의 문턱을 넘어 그 벽을 부수고 나아간 인간이었다.
보통의 인간들과 달랐기에 그는 괴물같이 느껴졌지만, 보통의 인간들과 달랐기에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다.
"오로지 하나의 욕망"만을 향해 "100%의 마음과 의지"로 행동한다는 건 인간에게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과 같은 특징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통 짐승이라거나, 짐승만도 못하다고 보지 않나?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해
매 순간 진실되고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것들을 단 하나도 누리지 못한다는 건 성립될 수 없다.
인간은 다층적인 존재이기에,
단 하나만 남기는 순간 이미 인간이 아니다.
(물론, 단 하나만 남는 '찰나의 순간'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지속되는 순간 인간성의 상실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자기 안에 '경우의 수'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자유가 아닌 게 될까?
그런 태도는 지극히 극단적인 사고이자 논리의 비약이라고도 생각한다.
에렌을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자유”라는 하나의 욕망에 몰두한 것처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다른 모든 욕망을 끊어낸 결과가 아니라, 자기 안을 지독하게 탐색하며 다른 욕망을 끝까지 겪어낸 결과인 것이다.
자유는 파괴를 동반한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건 무언가를 버리는 일이고,
무언가를 끝내는 일이다.
에렌이 땅울림이라는 자유를 선택함으로 인해 수많은 것들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부정할 수 없이,
그 파괴 속에서 새로운 세계가 태어났다.
에렌이 죽음이라는 파괴에 가닿았을 때,
인류는 죽음과 먼 자유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건 순전히 내 감수성이지만,
에렌의 죽음이라는 파괴는 에렌의 자유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졌다.(비슷하게는 엘빈의 죽음도 들 수 있겠다.)
"누군가는 자신의 욕망을 끊어내고, 그 모든 모순된 욕망의 굴레에서 자유롭게 해 주길."
"나의 불완전함이 다음 누군가의 가능성이 되길"
바라고 있지 않았을까.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자유는 파괴를 낳고 파괴는 새로운 가능성을 낳았다.
이건 그에게만 국한된 명제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이고, 반복의 역사이다.
자유는 언제나 파괴 위에 서고,
그 파괴 위에서 또 다른 희망과 가능성이 빛을 낸다.
그러한 장면을 목도한 순간 우리는,
세계의 공허와 허무, 무의미를 마주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순간순간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전부가 아닐까.
나에게 진격의 거인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
를 하는 것 같았다.
이 글에서 다룬 자유도 그 일부였다.
결국, '본질'에 가까운 진짜 자유라는 건,
모든 욕망의 실현이라거나, 완전한 자유라거나,
인류의 해방 같은 절대적이고 거창한 것들이 아니라
"자기 몫의 책임을 인지한 채 내딛는 한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난 이런 생각들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완전한 자유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으며,
그것이 역설적으로 나를 매 순간 자유롭게 산 인간으로 만들어줬다.
지난한 사유의 끝에 정립했던 그 판단의 기준은
'이 사회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타인에게 정당성 없는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나의 신념과 가장 가까운 쪽으로'였다.
앞서 말한 '51:49'라는, 내 나름의 '선택의 법칙'도 매 순간 내 마음을 움직이는 기준이 되어주었고.
난 49에 대한 책임도 짊어지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게 내가 삶이나 누군가에 대한 후회나 원망이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것은 내가 감당할 몫이었고, 전부 내 자유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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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토록 에렌의 자유에 공명했을까.
아마도 그 고통의 깊이와 고독의 시간들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에렌에게서 본 것은, 내가 살아온 방식의 '극단적' 투영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나에게 애정과 동질감을 일으키는 한편 경계로 다가왔고,
분노와 슬픔, 허무와 공허를 지나 평안과 사랑으로 남았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먹먹하고 답답한 듯하면서,
모순적이게도 일종의 해방감과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에렌은 결코 단순히 '불쌍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를 그저 '광기에 사로잡힌 학살자'라거나 '운명의 굴레에 갇힌 피해자'라 치부하는 것은, 그의 투쟁과 진심을 묻어버리는 일이 된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인간적 자유의 극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최대치를 붙잡으며 살았고, 그 책임을 기꺼이 감당한, 비극적이지만 숭고하고 아름다운, 처절할 정도로 인간적인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