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능 내현 나르시시즘의 구조에 관하여
그들은 늘 너무 많이 느끼고, 너무 적게 자란다.
그들은 늘 남들보다 더 섬세하다.
타인의 표정 하나, 말투의 떨림 하나를
누구보다 빨리 감지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공감력'이라 부른다.
그들은 그 말을 좋아한다.
공감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자신의 불안이 특별한 재능으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공감은 이해가 아니라 '감시'다.
상대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이 아니라,
미리 읽고, 앞서 대응하고, 통제하려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본능적인 방어에 기인한 설계다.
그들은 타인의 미세한 표정 하나에도 긴장한다.
눈빛이 흔들리거나, 마음속에서 즉시 계산이 시작된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 질문은 반성이 아니라 '지금 이 관계를 어떻게 회복시켜야 하나'라는 전략적 반응이다.
그 긴장을 잠재우기 위해, 그들은 애써 다정해진다.
그 다정함은 진심이지만, 동시에 보험이다.
그들은 진심과 보험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건 의도가 아니라 '구조'에 가깝다.
그들은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고 싶다.
좋은 사람으로 남지 못하면,
자신이 존재할 이유를 잃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에 즉각 반응하지만,
정작 자신의 고통은 억압한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순간,
그들은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무언가를 '주는 사람'으로 존재할 때만,
자신이 버려지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 위로가 상대를 위한 것인지,
자신의 공허를 메우기 위한 것인지.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자신을 상대보다 위에 세우고자 하는 욕망'임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것.
그것은 그들에게 '나는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은밀한 우월감의 확인이다.
주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주는 순간, 그들은 가진 사람이 된다.
그 착각 속에서 그들의 열등감은 잠시 잠잠해진다.
그들은 타인의 불행에서 불안을 느끼고,
타인의 행복에서도 불안을 느낀다.
누군가 너무 잘되면 불편하다.
그건 질투가 아니라고 그들은 말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엄밀히는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신호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들은,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며
도덕적 면죄부를 얻었다고 안도한다.
하지만 그 '불충분함'의 정체는 결국,
질투를 재포장한 자기 연민이다.
그들은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사랑한다.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나는 이만큼 애쓰고 있다'는 걸 증명하지 않으면,
그 사랑이 사라질 것 같아서.
'나는 이만큼 당신을 인정하고, 당신처럼 되고 싶어 한다'는 걸 증명하지 않으면, '좋은 사람'의 가면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는 때로 동경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정체성의 침식 행위'다.
단지 그 사람의 성취만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방식'을 흡수하기 위한.
그들에게 사랑은 존재의 확인이 아니라
노력의 전시장이다.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연기한다.
그들은 늘 몰아붙이고 피로하다.
사랑에서도, 관계에서도, 일상에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그 피로를 견디기 위해 그들은 종종 글을 쓰거나 책을 내기도 한다.
자기를 기록하고 생각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그리고 그 글들은 곧 '자기 과시를 강화'하고 '자기 연민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전락된다.
그들은 자신이 '깊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다.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덜 외로워 보이니까.
하지만 그 깊이는 늘 같은 자리를 맴돈다.
생각은 많은데, 그 생각이 자신을 치유하지 못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생각하는 '척' 속에 숨은 회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깊이'에 심취할 때,
그 순간 그들은 다시 한번 은밀한 우월감을 맛본다.
'나는 남들처럼 얕지 않아.'
'나는 이렇게 깊이 느낄 수 있어.'
'나는 이렇게 복잡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
그 '깊이'는 성찰이 아니라
남들과 자신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에 탐닉하거나
그 감정에 빠져있는 '자기 이미지'에 탐닉하며,
그 탐닉을 '감수성'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을 향한 감수성이 아니라
감정의 고립을 통해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려는 시도다.
그 시도 속에서 그들의 열등감은 또다시 잠든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남들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들은 깨닫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신을 연출한다.
착한 사람.
이해심 많은 사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
섬세한 사람.
깊이 있는 사람.
자신이 되고 싶은 이상적인 인물을 표상하기에,
그 가면들은 마치 실제처럼 정교하고, 아름답고, 설득력 있다.
하지만 그 가면을 벗으면,
그 안엔 아무도 없다.
정확히는, 가면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가면들에게서
'나는 남들보다 낫다'는 속삭임이 끊임없이 울린다.
그들은 그 속삭임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비틀린 우월감이자 열등감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그것을 '자기 이해'라고 부른다.
'성장'이라 부르고, '성찰'이라 부른다.
하지만 덧씌운 이름들 뒤에 숨은 진실은 단순하다.
그들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지 않으면,
평범한 자신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가면을 벗을 수 없다.
가면이 없으면 존재가 증발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다.
자신이 진심이면서 동시에 연기뿐인, 모순으로 점철된 삶을 산다는 걸.
그 앎이 그들을 잠 못 들게 한다.
그들이 느끼는 그 괴로움은 '붕괴될까 두려운 균열의 자각'이다.
그래서 또 글을 쓰고, 또 다정해진다.
그래서 또 깊이 느끼고, 또 무언가를 준다.
그 다정함과 깊이와 베풂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구원할 수 없다.
함께 늪으로 끌어내릴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멈출 수 없다.
그것들만이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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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성찰하고 성장하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즉각적으로 방어하지도, 격렬하게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읽고, 지나간다.
만약 지금 당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면,
만약 지금 당신이 반박할 문장을 구상하고 있다면,
만약 지금 당신이 '나는 다르다'를 증명하려 한다면,
그리고 이 문장을 읽는 순간조차,
'나는 방어하지 않았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한다면,
심지어 '나는 이 글을 이해할 만큼 깊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거울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마 그들이라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증명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증명 속에서만 '나는 특별하다'는 환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 선 자와,
거울 안에 갇힌 자는
얼핏 한 끗 차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은 안다.
그것이 천지차이라는 것을.
이 글에서 설명하는 구조는 많은 인간의 내부에 존재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구조를 인식한 뒤 스스로 멈춘다.
멈추지 못하고 그 안에 거주하길 선택한 이들만이,
나르시시스트라 불린다.
요즘은 내현나르 중에서도 ‘고기능형’에 관심이 많다.
(100%고기능, 100%저기능인 나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특정 경향성이 강한 건 분명 존재하기에)
외현형보다 훨씬 교묘하고, 건강하고 똑똑한 사람도 착취당하기 쉬운 유형이라서.
아니, 어쩌면, 오히려 건강하고 선한 사람들, 타인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가장 내현나르의 타겟이 되기 쉽고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을 지키기 위한
경계의 언어를 남기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