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 인간의 삶은 애틋해야 한다

우울의 시대, 유머로 위장된 나르시시즘과 마주하며

by 무해



"인류 절반이 우울증이면 사실 인간은 원래 우울한 게 맞고, 안 우울한 게 질병 아님? 지나치게 밝음증이 질환이고, 인류 절반이 adhd면 정신 또렷한 게 질병 아님? 정신 또렷증 아님?"


sns에서 좋아요를 수만 개나 받고,
댓글로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은 게시물이다.


난 이 글에 동의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그 반대에 동의하지도 않고.
"정상이란 무엇일까"라는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우울이라는 상태를 바라보는 '시선'과

문장 속 '사고의 비약'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정상'에 대한 문제의식보다

'자신의 우울'에 대한 일반화와 정당화, 방어적 공격성이 더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해당 글이 대중에게 감정적 위안을 주는 해학이나 유머가 가미된 문장인 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저 밈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수만이나 되는 현상'이 드러내고 있는 현대인들의 미숙한 방어기제와 집단적 최면상태, 그 조용하고 위험한 영향력경계의 필요성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정작 불편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말하지 못하고, 존중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너무도 쉽게 불편함을 말하는

이 사회에서,

"나는 저 글이 불편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저 글은 인간이 겪는 흔한 우울감과 무기력까지도 우울증이라는 질환으로 과도하게 해석해서 뭉뚱그려버리고 있으며,
자신의 상태를 겸허히 직면하는 대신 질병이라는 기준을 전복시켜,
자신과 다른 상태에 있는 타인에게 전가해버리거나 그들을 자신과 똑같이 끌어내리려는 '불순한 동기'가 느껴진다.

우리 사회에 이미 만연해져 있을지 모를 '회피적 투사와 피해자 코스프레'를 가벼운 밈으로 포장한 불건강한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가 없다.





누군가는 "웃자고 한 소리에 왜 이렇게 죽자고 달려드냐"며 교과서적인 투사적 조롱을 시도할지 모른다.
우선 명확히 해두고 싶다.


​첫째, 난 죽자고 달려들고 있지 않다.


둘째, 나야말로 묻고 싶다. "분석하자고 쓴 소리에 당신은 왜 죽자고 달려들게 된 걸까?"





​세상에,
무엇이든 가볍게 장난으로 치부하고 밈으로 배설하고 마는 "회피충"도 있는데,
그 가벼움의 이면을 비추는 "진지충"이라고 없으란 법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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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이어질 내용은 '저 글 자체'에 대한 반박이나 의견이라기보다,
저 글을 매개이자 촉발제로 삼아 그 가벼운 "밈화" 이면에 담긴 '사람들의 무의식 구조' '곪아있는 이 사회의 단면'을 해부한 글이다.









현대 사회는 우울의 사회라고도 한다.


나 역시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자면,
대부분은 빈도가 너무 잦은 것이지,
그 강도 자체가 심각한 질병 수준인 우울증은 사실 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만, 그게 이렇게까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체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 자연스러운 우울감에서조차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하고, 그럴만한 힘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이상을 실현하기 어렵도록 고착된 이 사회와 환경도 큰 영향을 주는 걸 테고.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이면서,
오랜 세월 사회의 기준을 무지성으로 내면화시켜버린 '반작용'이자 자연스러운 대가인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총체적 난국인 건 맞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너무 날로 먹으려는 심보인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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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스물에서 서른 즈음에 그런 우울과 무기력을 겪는 사람이 많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자율적 사고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고 행동력에 제한이 있는 유년기는 제외하도록 하자.


그렇게만 따져도 그들은 최소 십 년에서 이십 년을 '자기 의지'로 살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면의 기준보다 사회의 기준과 타인의 시선을 우선하며 살았다.
그건 자기의 '선택'이었다.

그들은 사회와 환경이 본인들을 그렇게 내몰았다고 하겠지만,
비겁한 변명이다.
사회가 죽으라고 내몰았다면 그들은 죽기를 택했을까?
아닐 것이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쳤겠지.




물리적·경제적 자유가 완전히 뒷받침되어야만 자기 의지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믿는 건 '착각'이다.
원하는 것을 '즉시' 또는 '100%' 실현할 수 없어도,
난이도가 험난하고 기회가 적다고 해도,
그것이 자기 의지 발현의 부작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어떤 의지"는 외부의 성취가 아닌 '내부'의 변화와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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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본인이 할 만하고, 다른 쪽을 선택하는 것보다 그 길을 가는 것이 더 편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해 온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 선택으로 인해 그동안 얻은 이득과 편의는 생각하지 않고,
오랜 세월 시류만 따르면서 정 맞지 않고 잘 살아와놓고,
이제 와서 '환경 탓, 과거 탓, 남 탓'만 하는 걸까.

왜 자신은 항상 '어쩔 수 없는 피해자이고, 공감받아야 하며,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인 걸까.


자신의 삶에 있어서 '자기 책임'은 배제시켜 버리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비겁한 태도이지 않은가.




그것은 "과거의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무례"이고,


사회적 기준에 맞서며 "주체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을 존중하지 않는 무례"이다.




인간의 삶을 제대로 마주한다면,
원래가 매 순간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고,
어느 한 편에 정착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게 존재할 수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원래 우울했다 밝았다 오락가락하며 산다.




그동안 죽을 만큼 혼란스럽고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혹은 매 순간 죽을 만큼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기만 했다면,
오히려 마땅히 겪어야 할 것들을 회피하거나
타인의 몫으로 미뤄두기만 한 채,
'자기 삶을 방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어딘가엔 이미 오랜 세월을 그것들과 싸우고 통과하며 치열하게 피 흘리며 살아온 이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니까.

그 곁에서 그들의 상처와 시간을 알지도 못한 채, 불평만 늘어놓고 있는 누군가가 바로 자신인 것은 아닐까.





"내가 삶을 그동안 너무 편하게만 살았구나. 그동안의 삶에 감사해야겠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왜 내 삶만 이렇게 힘들지. 나를 이렇게 만든 저 인간 때문이야. 이 세상 때문이야. 난 원래 약해서 어쩔 수 없어"라고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건,


아직도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미숙한 생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항상 말하지만 미숙한 상태가 틀렸다는 게 아니다.
인간은 원래 미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존재이니까.

다만,
그 미숙에서 벗어나려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는 삶이라면,
노력을 위한 노력만으로 자위하는 삶이라면,
그런 존재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도 아깝다고 느낀다.


내가 정의하는 '인간'으로 보자면,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스스로 유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냥 어쩌다 세상에 태어나서 호흡하고 있는 덩어리에 안주하고 있을 뿐.








어른이 된 인간의 삶은 애틋해야 한다.


그립고, 아쉽고,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지만,
후회되지 않고, 따뜻해지고, 충만해지고,
어쩌면 경이로워 울컥 눈물이 날 만큼 자랑스러워져야 한다.

나는 그것이 진짜 삶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내 삶을 그렇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적어도 내 세계에서만은 나만이 희망이고,
내가 가장 큰 희망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진짜' 무기력과 우울의 고통을 가볍게 치부하거나 무시하려는 게 아니다.



그 고통 앞에서 싸움을 멈춘 채,

"자기 연민과 고통의 외재화"의 고리에 갇혀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방어적인 착취와 공격성을 드러내는 태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
누군가에게 이 글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 자체가 자신의 상태를 직면하게 해 줄 기회일 수 있다.


나아가,
오히려 진짜 고통받는 이들의 무게조차 희석시킬지 모르는 사회적 현상 앞에서,


책임 없이 동조하고 가볍게 소비하며 열광해 온 대중들에게 새로운 시선과 일말의 경각심이라도 줄 수 있다면,


나는 그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이 글을 쓰는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모두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반드시 불편해지는 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만약 '모두가 불편하지 않은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가 바로,

내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아도 괜찮아지는 날'일 것이다.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말뿐인 "기만"이나 "척"이 아니라 "행동+변화+지속성+일관성"의 조화로,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시간이 증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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