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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d] 한국 조직이 침묵을 미덕으로 여기는 이유

이드의 HR 커피챗 시리즈

by iid 이드

[Edited by iid the HRer]

※ 내가 쓰는 글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니, 편하게 봐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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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침묵의 함정 ② : 한국 조직은 왜 갈등을 미루는가?



한국 조직에서는 오늘도 ‘평화’라는 이름의 침묵이 흐른다. 회의실 안은 조용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웃음과 예의, 배려가 곳곳에 묻어나지만, 문 밖 복도와 커피머신 앞에서는 다른 이야기들이 터져 나온다.

“사실 그거 아닌 것 같은데…”
“근데 말하면 괜히 찍힐까 봐.”
“나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


겉보기에는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곧 무거움이고, 그 무거움은 조직을 서서히 조여 온다. 결국 결정된 일들은 좀처럼 실행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조직은 무력함의 늪에 빠져든다. 그리고 한순간, 그동안 쌓인 감정이 폭발하듯 터져 나올 때면 그 침묵의 깊이와 그 안에 숨어 있던 오해가 얼마나 컸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많은 글에서 이를 ‘착한 침묵’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고자 한다. 이 침묵이 단순히 개인의 용기 부족이나 성격 문제가 아니라, 한국적 문화와 조직 구조가 빚어낸 문화적·구조적 현상이라는 점을 써보려고 한다. 왜 한국에서 유독 침묵이 미덕처럼 여겨질까? 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겠지”라는 기대가 버려지지 않을까? 왜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배려이자 지혜로 여겨질까?



착한 문화와 갈등 부채 (Conflict Debt)


착한 문화가 조직을 부드럽고 안전하게 만든다고 믿는 정서는 한국 사회 구석구석 깊이 박혀 있다. 다투지 않고, 얼굴 붉히지 않으며, 늘 미소를 지니고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조직’이라 굳게 믿는다. 특히 ‘정(情)’과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에서는 이 믿음이 거의 도덕적 기준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겉모습 뒤에는 언제나 갈등 부채(Conflict Debt), 즉 미뤄진 갈등이라는 무거운 그림자가 숨어 있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지만, 착한 문화가 갈등을 없애주지 않는다. 갈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단지 미뤄질 뿐이다. 그리고 그 미뤄진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져 결국 한 번에 터져 나오며 조직에 훨씬 더 큰 비용을 요구하게 된다. 조직 심리학자 파트릭 렌시오니의 말처럼, “갈등을 미루면 언젠가는 더 큰 대가로 돌아온다.” 이 말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수많은 한국 기업 현장에서 실제로 수도 없이 목격되는 현실이다. 한 IT 기업에서 개발 일정이 계속 지연되던 일이 있었다. 팀원들 모두 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굳이 분위기 망칠 필요 있겠나.” 이런 생각이 조직 전체를 잠식했고, 결국 고객 납기일이 임박해졌을 때야 문제가 터졌다.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객 신뢰는 하락했고, 인력 재투입과 예산 초과, 장기간의 야근이 이어졌다. 모두가 커다란 대가를 치른 끝에 조직 전체가 멍들었다.


갈등 부채는 언제나 이렇게 쌓여간다. 문제가 분명히 보인다. 그러나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모두가 상대방이 알아서 눈치채 주길 바란다. 불만은 쌓인다. 표면적 평화는 유지되지만, 내면에는 감정의 찌꺼기가 고스란히 남는다. 오해가 커진다. 각자의 해석이 달라지고, 불신이 깊어져 작은 문제가 점점 커진다. 결국 폭발한다. 단 한 번의 폭발적 갈등이 조직 내 신뢰를 무너뜨리거나, 큰 비용을 초래한다. 어느 제조업에서도 작은 품질 문제가 발생했지만 모두 “내가 굳이 나서야 할까” 하며 침묵했다. 책임자에게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곧 갈등을 부르는 일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뤄진 문제는 결국 수억 원대의 리콜 사태로 번졌다. 그제야 모두 “왜 아무도 일찍 말하지 않았냐”며 탄식했지만,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이 악순환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한국 조직문화의 진자현상


한국적 조직문화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특징이 있다. 바로 진자현상(Pendulum Phenomenon)이다. 조직은 늘 두 가지 상태를 오간다. 평소엔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갈등을 철저히 감춘다. 다들 적당히 웃고, 겉으로만 조화를 유지한다. 회의에서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맞습니다”를 주고받는다. 표정과 목소리는 언제나 조용하고 부드럽다. 그게 조직을 위한 일이라 다들 믿는다. 하지만 이 잔잔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쌓이고 쌓인 감정과 불편함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조직은 한순간에 폭발한다. “왜 이제야 말하냐.”, “그동안 다들 가만히 있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이제 와서 꺼내?” 침묵 속에 쌓인 분노와 억울함, 피로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그 장면은 너무도 익숙하다. 그리고 며칠 뒤면 다시 평화 선언이 이어진다. “앞으로는 다들 솔직히 말하자.”, “우리끼리 잘 지내자.”, “서로 믿고 털어놓자.” 그리고 모든 것은 다시 고요해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화로운 미소가 조직을 뒤덮는다.


이것이 한국 조직의 진자운동이다. 침묵과 폭발, 폭발과 침묵. 이 왕복운동은 조직의 에너지를 갉아먹고 구성원들을 지치게 만든다. 진자현상은 단순히 “사람들이 용기가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밑바탕에는 한국적 문화의 심층 구조가 깔려 있다. “문제를 드러내면 관계가 깨질 수 있다”는 두려움. “윗사람 체면을 구기면 안 된다”는 규범. “다들 알아서 눈치채겠지”라는 오해. 그러나 갈등은 결코 저절로 풀리지 않는다. 눈치와 침묵으로 덮어 둔 문제들은 점점 커지고 복잡해질 뿐이다.


한국 조직은 매번 똑같은 사이클을 반복한다.

1단계 – 침묵과 표면적 평화. 모두가 적당히 웃고 맞장구치며 분위기를 유지한다.

2단계 – 내부 압력의 누적. 불만이 쌓이고, 겉으론 웃지만 속으로는 분노가 끓는다.

3단계 – 폭발적 분출. 회의에서 언성이 높아지거나, 이메일로 긴 항의문이 날아온다.

4단계 – 다시 침묵으로 회귀. “앞으로 잘하자”는 구호와 함께 또다시 조용해진다.


이 순환이 거듭될수록 조직은 갈등을 더 두려워한다. “예전에도 말하다가 괜히 피봤다”는 기억이 조직문화에 깊이 각인된다. 그래서 한국 조직에서 진자현상은 더욱 무섭다. 폭발할 때는 언어도 강도도 극단적이지만, 정작 그 뒤에는 아무도 학습하지 않는다. 문제의 뿌리를 뽑고 새로운 룰을 설계하는 대신, 모두가 무섭도록 빠르게 평화를 가장한다. 진자운동은 결국 조직의 학습결손을 만든다. 갈등을 다룰 수 있는 기술과 언어가 조직 안에서 자라나지 못한다. 그리고 다음 폭발 때는 더 큰 비용을 치른다.


한국 조직의 진자현상은 단순히 성격이나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문화의 구조이자, 착한 침묵이라는 덫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한국적 체면문화와 갈등 회피


한국 조직에서 갈등 부채를 더욱 고질적이고 위험하게 만드는 또 다른 핵심 요인이 바로 체면문화(Face Culture)다. 한국 사회에서 체면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다. 체면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지켜주는 강력한 보호막이자, 사회적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직장 안에서 체면은 상하관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조직 내 긴장을 완화하는 ‘무언의 장치’처럼 작동한다. 그러나 그 체면은 동시에 조직을 침묵과 답답함으로 몰아넣는다.


한국적 체면문화는 조직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직접적 피드백은 무례로 간주된다.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상대 기분 상하잖아.”, “그렇게까지 솔직할 필요 있나?”라는 말은 수없이 들려온다. 갈등은 곧 체면 손상으로 해석되며, “우리끼리 잘 지내는 게 좋지, 왜 문제를 들춰?”라는 정서가 팽배하다. 침묵은 체면 유지 전략으로 작동한다. “윗사람 체면도 있는데 괜히 나섰다가 찍힐까 봐.”, “조용히 있는 게 배려이자 지혜야.”라는 말이 여전히 조직을 지배한다. 체면문화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언제나 비슷하다. “이야기하면 괜히 나만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혹시 트집 잡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말 안 하면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잖아.” 결국 체면문화는 사람들을 점점 더 ‘좋은 사람’으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그 착함은 결국 침묵으로 귀결되며, 침묵은 문제를 이야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체면문화의 뿌리는 단순히 회사 문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 전반을 깊이 관통하는 문화심리학적 구조와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조직 안에서 나타나는 ‘착한 침묵’은 결국 한국 문화의 근본적 특성이 직장이라는 무대 위로 옮겨온 결과다.


✅ 먼저 집단주의 문화가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집단주의적 문화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문화심리학자 해리 트리안디스(Harry Triandis)는 집단주의 문화를 “개인의 자아가 집단 속에서 규정되고, 집단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시되는 문화”라고 정의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우리(We-ness)’라는 개념이 모든 관계의 기저에 놓여 있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생각보다, 집단의 화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범이 자리 잡고 있다. 직장에서 이 문화는 곧 ‘분위기 해치지 않기’로 구체화된다.

“우리끼리 좋게 가자.”, “굳이 저렇게까지 말 안 해도 되잖아.” 이런 태도는 협력과 단결을 유지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불편한 진실을 덮어두고 문제를 제때 해결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 결과 조직은 겉으론 조용하지만, 속은 늘 압력이 쌓여 있는 보일러처럼 뜨겁게 끓는다.


✅ 두 번째로 권위 중심적 위계문화가 있다.

한국 사회는 권위주의적 위계문화가 뿌리 깊다. 심리학자 호프스테드(Geert Hofstede)의 문화 차원 이론에서도 한국은 ‘권력거리(Power Distance)’ 지수가 높게 나타난다. 이는 권력의 불평등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며, 위계가 사람들 사이의 대화와 행동 양식을 규정한다는 뜻이다.

윗사람 앞에서 자유롭게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체면 때문이다. 윗사람의 체면을 구기는 것은 관계 단절로 직결될 수 있다. 둘째, 위계 유지의 압박 때문이다. ‘까라면 까야지’라는 말이 여전히 조직 내 유효하다.

실제로 한 대기업 중간관리자는 이렇게 말했다. “윗사람 눈치 보는 게 일이죠. 잘못 얘기했다간 인사평가에 바로 찍히니까.” 이 문화는 조직에서 솔직한 의견 개진을 가로막고, 결국 ‘형식적 합의’만 난무하게 만든다. 그 결과 조직은 늘 “다들 동의합니다”라는 구호 아래,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 세 번째는 정(情) 문화다.

한국 조직문화에서 정은 인간관계를 끈끈하게 엮는 본질적 코드다. 그러나 정은 양날의 검이다. 사람 사이에 따뜻함과 배려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갈등 표출을 억누르는 강력한 규범이 된다.

“정 없게 왜 그렇게 말하냐.”, “우리끼리 다 아는 사이인데 굳이…” 정 문화에서 갈등 표출은 ‘차갑고 무정한 행동’으로 해석되기 쉽다. 서구 문화에서는 갈등과 솔직함이 관계의 성숙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한국 문화에서는 그것이 인간미가 없거나, 배신처럼 비춰질 때가 많다.

이로 인해 조직 안에서 정은 갈등을 봉인하는 은근한 감옥이 된다. 사람들은 관계를 해치지 않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침묵은 곧 불편한 진실을 더 단단히 가두어 버린다.


서구 문화와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욱 극명하다. 서구의 조직문화에서는 ‘솔직함(Directness)’이 성숙함과 투명성의 상징이다. 문제를 드러내야 해결할 수 있고, 이견은 곧 건강한 토론의 연료가 된다. 반면 한국 문화에서는 문제를 드러내면 관계가 깨질까 두렵다. “왜 문제를 들추냐”는 무언의 비난이 따라붙는다. 개인의 의견은 집단의 조화 속에서 ‘조율’되거나 ‘묵살’되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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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한국적 체면문화는 ‘좋은 사람’이라는 문화적 이상형을 끝없이 강화한다. 모두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착함은 종종 불편한 진실을 덮어버리는 독이 된다. 침묵이 굳어지고, 조직은 점점 더 문제를 드러내지 못하는 곳으로 변해 간다. 결국 체면문화가 만들어 내는 것은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 애쓰는 침묵의 벽이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갈등이 점점 부채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것이 한국적 조직문화의 가장 치명적인 진실이다.



권력거리와 침묵의 고착


체면문화와 함께 조직 내 침묵을 더욱 단단히 굳혀 버리는 또 하나의 벽이 있다. 그것이 바로 권력거리(Power Distance)다. 문화심리학자 게르트 호프스테드는 권력거리를 “한 사회가 권력의 불평등을 어느 정도 당연히 받아들이는 정도”라고 정의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권력거리가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이 특성은 조직 안에서 침묵을 고착화한다.


권력거리가 높은 조직에서는 늘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윗사람에게 반대 의견을 내기 어렵고, 솔직한 피드백은 무례로 비쳐진다. “팀장님이 하라는데 왜 말이 많아?”, “저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너무 건방지잖아.”, “그 친구 좀 까칠하다더라.” 이런 말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다. 한 금융사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팀장이 “자유롭게 질문하라”고 독려했지만, 직원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팀장이 말끝마다 “맞죠?”라고 덧붙였기 때문이다. 그 짧은 말 속에는 이미 답이 들어 있었다. 결국 아무도 진심을 드러내지 않았고, 침묵은 마치 충성의 증거처럼 굳어 버렸다. 권력거리가 높은 조직에서 “말해도 된다”는 말은 좀처럼 신뢰받지 못한다. “솔직히 말해도 된다면서 막상 말하니까 싫어하잖아.”라는 불신이 커지면 커질수록 회의는 점점 더 형식적인 절차가 되고, 문제 해결은 더욱 멀어진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화롭지만, 그 속에서는 갈등 부채가 계속 쌓인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평화다.


높은 권력거리는 조직에서 침묵을 습관처럼 만들어 버리고, 솔직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오히려 죄책감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단순히 “자유롭게 말하라”는 구호만으로는 이 벽을 허물 수 없다. 대신 구체적인 언어의 쓰임과 대화 방식, 조직 문화의 작은 장치들, 그리고 리더의 솔선수범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조직이 권력거리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몇 가지 현실적인 방법들이 필수적이다.


✅ 먼저, 리더가 먼저 틀릴 수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니 혹시 다른 의견 있으면 꼭 말해 달라.” 이 한마디가 팀 분위기를 완전히 바꿀 수 있다.

특히 한국처럼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리더의 자기 개방(Self-disclosure)이 곧 구성원들에게 발언 허가증처럼 작동한다. 리더가 먼저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해야 구성원도 “틀려도 괜찮다”고 믿게 된다.


✅ 그리고 솔직한 피드백을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보호해야 한다.

누군가 용기 내어 불편한 이야기를 했다면, 리더는 반드시 그 사람을 보호하고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

“말해 줘서 정말 고맙다. 네 얘기 덕분에 우리가 놓친 부분을 발견했다.” 이 말은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다.

체면이 중요한 한국 문화에서 솔직함이 존중받고 안전하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한 발 더 앞으로 나올 수 있다.


✅ 또한, 질문을 구체적으로 유도해야 한다.

“질문 있습니까?”라는 막연한 물음만으로는 사람들의 말문이 열리지 않는다. 대신 “이 내용 중에 어색하거나 빠진 점 있나요?”, “혹시 내가 놓친 부분 있나요?”라고 묻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런 구체적인 질문은 권위를 내려놓는 동시에 상대가 의견을 말해도 안전하다는 신호를 준다.

한국 조직에서는 특히 “내가 뭘 놓친 게 있나요?”라는 질문이 효과적이다. 질문은 단순히 ‘열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묻느냐’에 달려 있다.


✅ 마지막으로, 체면을 지켜 주면서도 솔직함을 끌어낼 수 있는 언어를 찾아야 한다.

한국 문화에서 체면은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안전장치다. 피드백을 주고받을 때도 체면을 지켜 주는 언어가 필요하다.

“저는 이렇게 이해했는데 혹시 다른 관점 있으신가요?”, “혹시 제가 놓친 부분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이런 말은 ‘네가 틀렸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함께 탐색하자는 뉘앙스를 전한다.

갈등을 도발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을 위한 신호로 작동한다. 결국 체면을 살리면서도 솔직한 의견을 끌어내는 것이 한국 조직에서 매우 중요한 기술이다.




우리가 이야기해온 착한 침묵과 갈등 부채(Conflict Debt)의 문제는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다”는 현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적 조직문화가 가진 체면, 권력거리, 정(情) 문화의 깊은 뿌리에서 비롯되며, 결국 조직의 학습과 변화를 가로막는다. 이 문화적 패턴은 침묵과 폭발이라는 진자운동으로 되풀이되며, 조직은 갈수록 갈등 자체를 두려워하는 집단으로 굳어져간다. 많은 조직이 이를 해결하려 “솔직히 말하자”는 구호를 외치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과거의 집단 기억에 갇혀, 솔직히 말했다가 손해 본 경험을 되새긴다. 결국 조직은 표면적 평화 속에 진짜 문제를 덮어둔 채 점점 더 무력해진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해결의 단서는 문화적 뿌리를 없애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뿌리를 인정하면서도, 그 위에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이 작동하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한국 조직은 체면을 중시하고 위계가 강한 문화다. 그렇다면 조직은 그 문화를 무리하게 바꾸려 하기보다는, 기존 문화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솔직함이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는 구조와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체면을 지키면서도 솔직함을 끌어낼 수 있는 우회적 언어의 사용, 리더가 먼저 자신을 열어 솔직함이 안전하다는 신호를 주는 태도, 구체적인 질문법과 피드백 기술의 표준화, 익명성과 보호 장치로 솔직함의 부담을 줄이는 시스템 등이 필요하다. 이처럼 문화적 특성을 억지로 바꾸기보다는, 조직이 가진 깊은 문화와 솔직함 사이의 긴장을 잘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 조직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은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안전하게 다루고 이를 조직의 에너지로 바꾸는 기술과 체계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나는 솔직함을 단순히 의견 개진의 기술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솔직함은 결국 조직의 전략자산이다. 솔직함이 만들어내는 다각도의 관점이야말로 변화와 혁신의 재료이고, 솔직함은 조직 내부의 이견을 빠르게 드러내어 불필요한 리스크를 줄인다. 무엇보다 솔직함은 구성원에게 “이곳은 내 의견이 통할 수 있는 곳”이라는 심리적 소속감을 준다. 이제 솔직함을 단순히 문화적 미덕이 아니라 조직 경쟁력으로 재정의할 때다.


나는 착한 조직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진짜 착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진짜 착함은 무례하지 않으면서도 불편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이며, 그 용기가 지속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것은 잘 갖춰진 구조와 세심한 언어의 사용이다.


한국 조직은 여전히 갈등을 꺼리고, 체면을 중시하며, 권력거리가 존재한다. 그 현실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솔직함이 작동하도록 길을 낼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조직이 침묵의 덫에서 벗어나, 갈등을 성장의 자산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이며, 한국적 문화가 가진 유연함과 집단적 지혜를 동시에 살리는 해법이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갈등은 없앨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다뤄야 할 역량이다. 갈등은 언제든 생길 수밖에 없고, 그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고 해결하느냐가 조직의 미래를 결정한다. 착함이 조직을 살리려면, 불편함을 마주할 용기와, 그 용기를 안전하게 담아낼 구조가 함께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착함이며, 결국 한국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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