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함의 시대 ② : 돈으로 증명해야 하는 삶

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

by iid 이드

※ ‘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지인들이 익명으로 참여해, 술자리에서나 나눌 법한 솔직한 생각과 이야기를 가볍지만 진지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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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가 길어지면 결국 이 이야기로 흘러간다.
회사 이야기, 집 이야기, 애들 이야기 돌다가 마지막엔 항상 돈이다.
“요즘은 진짜 돈 아니면 다 의미 없는 거 같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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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성공에 대한 조급함이 있다면, 그 조급함을 가장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축은 결국 돈이다. 한국에서 성공을 판단하는 가장 명확한 기준은 여전히 돈이다. 명예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금만 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명예 역시 결국 돈으로 이어질 때만 의미가 있다. 돈이 안 되는 명예는 오래 못 간다. 방송에 나오는 교수도, 책을 낸 전문가도, 결국 “그래서 얼마 벌었는데?”라는 질문을 피해가지 못한다. 명예는 설명이고, 돈은 결론이다.


이 불안은 회사 안에서만 만들어진 감정이 아니다. 요즘 고등학생들, 군인들 사이에서 은근히 많이 나오는 키워드가 있다. 사이버 도박이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재미라고 보기엔 방향이 분명하다. 이유를 물어보면 대답은 거의 같다. “빨리 돈 벌려고요.” 월급 받아서 모으는 구조, 시험 보고 승진하는 구조는 너무 느리다고 느낀다. 주변에서 몇 번 맞춰서 큰돈 벌었다는 이야기 하나만 들려와도, 그게 훨씬 현실적인 선택지처럼 보인다.


교실로 옮겨가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 초·중·고생들의 진로 희망 상위권에는 이제 크리에이터가 빠지지 않는다. 유명해지고 싶어서라는 말도 하지만, 실제 이유는 훨씬 직설적이다. 돈이다. 조회 수가 얼마면 광고 단가가 얼마고, 협찬 하나가 얼마인지 또래들끼리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누구는 영상 하나로 몇 천 벌었다더라”는 이야기가 성적 이야기보다 더 자주 나온다. 오래 공부해서 안정적인 직업을 갖는 것보다, 한 번에 인생이 바뀔 수 있는 선택지가 훨씬 매력적으로 보인다.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결국 집 문제다. 서울 집값 상승은 근로소득으로는 자본소득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사실을 너무 명확하게 보여줬다. 이제는 청약 분양가조차 84㎡ 기준으로 경기도가 6억 원대를 찍는다. 신혼부부에게 생애 최초 디딤돌 대출이 최대 3억 원 가까이 나온다고 해도, 결국 현금이 3억 원은 필요하다. 이 숫자를 마주하는 순간, “열심히 일해서 모아야지”라는 말은 공허해진다. 열심히 일해도 계산이 안 맞는다.


이 개인의 선택을 넘어, 투자 방식 자체를 바꿔놓았다. 무조건 짧은 시간에, 빠르게 벌어야 한다는 강박이다. 주식은 기본이 2배, 3배 레버리지다. 안정적인 종목은 재미없고, 단기간에 튀는 종목이 관심을 받는다. 코인은 변동성이 큰 잡코인을 선호한다. 부동산도 규제가 없던 시절에는 갭투자로 여러 채를 동시에 돌리는 방식이 유행했다. “천천히 가자”는 말은 현실을 모르는 소리처럼 들린다. 지금 안 움직이면 영영 못 따라잡을 것 같다는 불안이 항상 깔려 있다.


이 모든 조급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통계상 한국 가구 자산의 중간값은 약 1억 원 수준이다. 4인 가구 기준으로 잡아도 4억 원 정도가 중간이다. 숫자만 보면 절반은 그 위, 절반은 그 아래다. 하지만 체감상 아무도 이 숫자를 중간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머릿속에서 ‘부자’의 기준을 최소 100억 원쯤으로 올려놨다. 중간은 사라지고, 부족함만 남았다. 비교의 기준이 위로만 설정되니, 대부분은 항상 모자란 상태로 산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사교육 열풍과 의대 쏠림 현상도 정확히 같은 결로 겹쳐진다. 사실 돈을 더 버는 길은 장사도 있고, 기술도 있고, 다른 영역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많은 부모와 학생들은 의대를 가장 ‘안전한 길’로 인식한다. 왜냐하면 의사라는 직업 자체의 소득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강력한 카르텔 구조가 그 직업의 부의 경계를 오래도록 지켜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경쟁은 치열하지만, 한 번 들어가면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구조. 노력 대비 결과가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선택지다. 사교육이 과열되는 이유도, 의대 정원이 몇 명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불안한 시대에 확실한 돈의 울타리를 확보하고 싶다는 심리가 먼저 작동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선택의 기준’까지 바꿔버릴 때부터다. 돈 앞에서는 더 이상 윤리나 도덕, 심지어 법조차도 잘 작동하지 않는 순간들이다. 일단 빠르게 돈을 벌고,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이 은근히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사막여우’로 대표되는 일부 커머스 회사들의 과대 광고, 실체 없는 상품을 포장하는 구조, 폰지 사기 형태로 반복되는 다단계 금융 사기들이 그렇다. 심지어 회사 안에서도 “나만 엑싯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직원들을 속이거나, 미래를 과장해 팔아넘기는 일도 드물지 않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과정에서 누군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건 각자의 책임이라는 식이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아예 선을 넘는 선택도 등장한다.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다면, 마약 운반 알바나 보이스피싱, 로맨스 스캠 같은 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피해자가 누군지, 어떤 삶이 망가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당장 돈을 버는가, 그리고 내가 피해자가 되지 않는가다. 나만 빠져나오면 된다는 생각, 그 선에서 윤리의 기준은 쉽게 무너진다.


유튜브를 켜면 이 감각은 더 심해진다. 빠른 성공, 조기 은퇴, 몇 년 만에 얼마 벌었다는 이야기들이 알고리즘처럼 계속 흘러나온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바보가 된 것 같고, 안정적으로 투자하면 오히려 문제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아직도 저렇게 해?”라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속도가 곧 능력인 것처럼 포장된다.


이 분위기는 20대 창업자들에게도 그대로 반영된다. 과거처럼 오래 버티며 회사를 키우는 모델보다는, 빠른 엑싯과 금전적 성공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속 생존이나 장기적 가치보다는, 효율적으로 만들고 빨리 팔 수 있는 구조를 먼저 고민한다. 이 선택 자체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실적인 판단이기도 하다.


다만 문제는, 이 흐름이 점점 모든 판단을 돈 하나로만 환원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가 곧 사람의 가치처럼 취급된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고, 결과 숫자만 남는다. 이 지점에서 자주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천민자본주의다. 돈을 숭배하는 게 아니라, 돈에만 반응하는 자본주의다. 돈이 많으면 모든 선택이 정당화되고, 돈이 없으면 어떤 설명도 설득력을 잃는다. 직업의 성격, 노동의 질, 사회적 역할 같은 건 뒷전으로 밀린다. “그래서 돈 되냐?”라는 질문이 모든 대화를 끝낸다.


미국 자본주의와 비교하면 이 차이는 더 분명해진다. 미국에서도 부자는 분명히 존중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육체노동 역시 존중받는다. 배관공, 전기 기술자, 트럭 운전사, 현장 기술자들은 단순히 돈을 버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를 굴리는 역할로 인식된다. 실제로 고소득을 올리는 기술 노동자들도 많고, 그 직업 자체가 낮게 취급되지 않는다. 돈이 많아서 존중받는 게 아니라, 필요한 일을 제대로 하기 때문에 존중받는다.


이 차이는 단순히 문화의 문제가 아니다. 돈이 모든 가치를 대체하지 않도록 사회가 일정 부분 합의하고 있는 구조의 차이다. 미국에서는 “얼마 벌었느냐”와 “무슨 일을 하느냐”가 완전히 같은 질문은 아니다. 반면 우리는 점점 그 두 질문을 하나로 묶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얼마를 벌었느냐가 모든 설명을 끝내버린다. 그래서 돈이 목적이 되고, 일은 수단이 된다. 이 구조에서는 조급함이 사라질 수가 없다.


술자리가 끝나갈 즈음, 결국 이런 말이 나온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위선인데, 돈만 남는 사회도 좀 무섭지 않냐.”


조급함의 시대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집값도, 투자 환경도, 사회 분위기도 당분간은 바뀌기 어렵다. 다만 이 조급함이 우리를 어디로 밀어가고 있는지, 그 방향만큼은 한 번쯤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술잔 내려놓는 순간만큼은, 우리가 왜 이렇게 급해졌는지 정도는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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