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
※ ‘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지인들이 익명으로 참여해, 술자리에서나 나눌 법한 솔직한 생각과 이야기를 가볍지만 진지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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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유독 빨리 성공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강한 사회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조금이라도 지름길로.회사 다니다 보면 이 말은 정말 흔하다.
“이 회사 계속 다녀서 뭐가 남을까요?”
“지금 시작 안 하면 너무 늦는 거 아닌가요?”
이 조급함은 원래도 있었지만, 요즘은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예전엔 술자리에서나 꺼내던 불안이 이제는 이력서, 프로필, 자기소개 문장 속에 그대로 들어간다. ‘언젠가’를 기다리기엔, 모두가 지금 당장 뒤처질 것 같은 기분으로 산다. 불안은 더 이상 감정이 아니라 행동의 트리거가 됐다.퇴근길에 사업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주말에는 클래스 커리큘럼을 짜고, 링크드인 프로필에는 ‘컨설턴트’라는 단어를 추가한다. 회사가 싫어서라기보다는, 회사 안에만 있으면 뭔가 놓치고 있다는 감각 때문이다. 부와 자산 이야기는 2편에서 다루겠지만, 오늘은 이 조급함이 커리어 선택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먼저 보고 싶다.
평생직장은 사라졌고, IT·스타트업은 계속 성공담을 만든다. 미국에서는 20대 창업자가 회사를 팔았다는 뉴스가 돌고, 한국에서는 유독 ‘청년 영웅 서사’가 잘 팔린다. 동시에 자산 인플레이션은 급여 상승을 가볍게 앞질러버렸다. 월급으로는 집도, 전세도, 미래 계획도 감당이 안 된다는 감각이 꽤 보편화됐다. “회사에서 오래 버티면 된다”는 말이 공허해진 이유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졸업 직후, 혹은 사회 경험을 아주 조금만 하고 창업을 선택하는 흐름도 이어진다. (※ 최근 시니어 베테랑분들이 창업한 ‘리얼월드'의 성공 케이스는 오히려 드물다). 대부분은 아주 작은 단위의 시도이거나, 개인 역량과 브랜딩에 기반한 형태다. 회사 밖으로 나가는 선택이라기보다는, 회사 안에만 있기는 불안해서 만들어낸 출구에 가깝다.
그리고 불경기와 함께 더 선명해진 장면이 있다. 요즘은 정말 자문·컨설팅이 넘쳐난다. 빠른 경력 종료로 인해 제2의 커리어를 고민하는 시니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주니어들도 컨설팅을 한다. 몇 년 이상 일해야만 할 수 있다는 자격 같은 건 원래 없다. 20년 경력이 있어도 전문성은 분야와 맥락에 따라 제한적일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먼저 짚고 가야 할 게 있다. 주니어가 컨설팅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주니어가 훨씬 더 예민하게 감지하는 영역도 많다. 문제는 ‘무엇을 팔고 있는가’다. 툴 사용법, 캠페인 운영, 실무 프로세스 같은 스킬 파츠를 제공하는 것과 조직 구조나 의사결정 방식까지 조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 경계가 흐려진 채 모두가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묶이기 시작할 때부터 일이 꼬인다.
SNS와 마케팅, 그리고 이 조급한 분위기가 겹치면서 주니어 컨설팅은 더 자극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이쯤 되면 꼭 나오는 반론이 있다.
“탑티어 전략컨설팅도 주니어가 실무 많이 하지 않나요?”
맞다. 맥킨지, BCG, 베인에서도 주니어는 중요한 파트를 맡는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들은 개인 1인이 아니라, 회사가 쌓아온 노하우, 데이터베이스, 시니어들의 검증과 책임 구조 위에서 일한다. 혼자서 ‘전문가’로 서는 것과는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크몽, 클래스101, 데이원 같은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이 흐름은 더 제도화됐다. 결국 판단은 사는 사람이 한다. 팔리면 성립하는 시장이다. 문제는 팔리기 위해 점점 더 자극적이어진다는 점이다. “이것 하나면 된다”, “바로 써먹을 수 있다”. 짧고 강한 메시지가 우선된다. 그럴수록 내용의 실체나 검증은 얇아진다. 지금 컨설팅 시장은 점점 숏츠화되고 있다. 짧은 팁, 바로 쓰는 방법, 즉각적인 성과. 소비하기엔 편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지식이 쌓이기 어렵다. 맥락이 없고, 연결이 없고,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결국 남는 건 조각난 방법론뿐이다.
그럼에도 이 시장이 커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기업이 원하는 것도 딱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엔터프라이즈 전체를 관통하는 설명은 길고, 구조 이야기는 피곤하다. 이번 분기 성과가 먼저다. 조직은 깊은 진단보다 빠른 처방을 원한다. 이 환경에서는 파츠 스킬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여기에 변화의 속도도 영향을 준다. AI, 툴, 마케팅 방식은 계속 바뀌는데 조직의 학습 속도는 그걸 따라가지 못한다. 시니어가 구조를 설명하고 정리할 시간과 권한은 줄어들고, 실무자에게는 “일단 굴러가게만 해달라”는 요청이 쌓인다. 이 구조에서는 파츠 스킬 중심 컨설팅이 늘어나는 게 자연스럽다. 기업의 책임도 분명하다. 많은 조직이 컨설팅을 문제 해결이 아니라 책임을 외부로 밀어내는 장치로 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는 묻지 않고, “그래서 지금 뭘 하면 되죠?”부터 나온다. 이런 수요 앞에서는 깊이 있는 자문보다 잘 포장된 답변이 더 잘 팔린다.
문제는 이 흐름이 계속되면, 지식 자체가 얕아진다는 점이다. 숏츠형 컨설팅은 쌓이지 않는다. 연결되지도 않는다. 결국 조직에도, 개인에게도 남는 게 없다. 그리고 이건 AI 시대와도 연결된다. AI는 아무 생각 없이 답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입력할 지식 체계, 맥락,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한다. 지식이 파편화될수록 AI도 얕아질 수밖에 없다.
왜 이 모든 걸 ‘조급함의 시대’라고 부를까. 과거에는 한 분야에서 20년을 버티면 자연스럽게 전문가로 존중받았다. 지금은 다르다. AI 시대가 열렸고, 회사는 20년 이상 된 인력에 대해 비용부터 계산한다. 연공서열 시절에 만들어진 “연차가 쌓이면 보상도 같이 올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이제 개인과 조직 모두를 압박한다. 오래 쌓는 것보다, 빨리 증명하는 것이 훨씬 중요해졌다. 그래서 이제는 주니어뿐 아니라 시니어도 빨리 전문가로 인정받아야 한다. 축적의 시간은 줄어들고, 대신 노출과 레이블이 중요해진다. 내부에서 오래 쌓은 경험보다, 외부에서 ‘가르쳤다’, ‘조언했다’는 이력이 더 또렷해 보인다. 컨설팅은 이 과정을 가장 빠르게 통과할 수 있는 통로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스킬 중심의 컨설팅 자체는 나쁘지 않다. 툴, 프로세스, 방법론, 실무 요령. 이런 것들은 짧은 경험과 학습으로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오히려 주니어가 더 잘하는 영역도 많다. 문제는 리스크, 이슈, 그리고 사람 문제다. 조직에서 진짜 어려운 문제는 매뉴얼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누군가는 말하지 않고 쌓아두고, 누군가는 예상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고, 상황은 늘 변형된다. 이 영역은 스킬로 커버되지 않는다. 결국 경험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려보면, 이걸 가장 크게 느끼는 순간은 항상 “사람이 개입된 이슈”였다. 제도는 맞는데 반발이 생기고, 구조는 논리적인데 조직이 따라오지 않고, 합리적인 결정이 오히려 더 큰 갈등을 만든다. 이런 상황은 책에서 그대로 나오지 않는다. 유튜브에서도 정리되지 않는다.
책과 유튜브, 강의로 얻는 지식은 대부분 대리 경험이다. 정제된 이야기이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사례다. 실패의 과정, 감정의 충돌, 조직 내부의 정치와 오해는 많이 생략된다. 그런데 컨설팅 현장에서 부딪히는 건 대부분 이 생략된 영역이다. 이 지점에서 미숙함은 생각보다 크게 돌아온다. 제도 하나 잘못 던졌다가 조직 신뢰가 무너지고, 말 한마디로 갈등이 증폭되고, 책임의 방향을 잘못 잡아 리더가 무너진다. 이런 리스크는 사후에 수습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사람과 리스크가 얽힌 영역은 결국 시간을 통과한 경험이 필요하다. AI도 마찬가지다. AI는 스킬을 빠르게 조합할 수 있지만, 무엇을 입력해야 하는지는 사람이 결정해야 한다. 맥락 없는 지식, 파편화된 노하우를 아무리 많이 넣어도 깊은 판단은 나오지 않는다. 결국 AI조차도, 잘 쌓인 인간의 경험과 사고 체계를 전제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시대는 조급하다. 빨리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빨리 팔아야 하고, 빨리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빨라질수록, 사람과 리스크에 대한 이해는 얕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