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d] HR이 중요한 회사? HR이 필요한 회사?

이드의 HR 커피챗 시리즈

by iid 이드

※ 내가 쓰는 글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특정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도, 정답을 말하는 것도 아니니 가볍게 읽어주면 좋겠다. (상담/미팅 문의 )



부러움의 정체

얼마 전 한 주니어 HR 분이 나한테 부럽다고 했다. HR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에 다녔다면서. 물론 내가 경험한 회사들은 HR 브랜딩을 꽤 했고, 겉으로 보기엔 HR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였던 곳들이긴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좀 더 정확하게 짚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부러워하는 게 정확히 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 채용 공고에 적힌 복지 리스트나, 링크드인에 올라온 조직문화 콘텐츠, 혹은 인터뷰에서 들은 HR의 역할에 대한 멋진 말들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근데 그건 회사가 HR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증거가 아니라, HR 브랜딩을 잘한다는 증거일 뿐이다.


사실 이런 착각은 꽤 흔하다. 특히 주니어 입장에서는 더 그렇다. 회사 밖에서 보이는 모습과 실제 내부가 다르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 전까지는, 겉으로 보이는 것들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체계적인 HR 제도가 있다는 것과, 그 제도가 실제로 회사 의사결정의 중심에 있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인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주니어분의 부러움이 어쩌면 환상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

어쩌면 많은 회사들은 HR을 중요하게 여기기보다는, 강하게 필요로 하는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HR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건, HR이 만든 정책과 약속, 규칙과 가이드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에 맞게 의사결정을 한다는 의미다. 그러면 당연히 대표도 그 원칙을 따라야 한다. 본인이 만든 회사지만, 본인이 정한 제도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거다. 회사 규모가 크든 작든, 긴급한 상황이든 아니든, 제도가 우선이다.


근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가? HR이 고도화되고 체계화될수록, 개인의 주관이 끼어들 여지는 줄어든다. 대표가 아무리 마음에 드는 직원이 있어도, 평가 기준에 맞지 않으면 낮은 등급을 줘야 한다. 반대로 개인적으론 영 별로인 사람이라도, 성과가 좋으면 높은 등급을 줘야 한다. 예외를 0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제도는 만들 수 있지만, 예외 없이 지키는 건 사람의 문제니까.


실제로 이런 회사가 있긴 하다. 대표가 연봉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도 HR이 정한 밴드를 못 벗어난다. 핵심 인재라며 데려온 사람도 시용 기간 평가에서 탈락하면 내보낸다. 전 직장 동료라서 데려오고 싶어도, 채용 프로세스 예외를 만들지 않는다. 심지어 대표가 급하게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도, 정해진 프로세스와 기준을 건너뛰지 않는다. 이게 진짜 HR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다. 불편하고, 때론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그게 원칙이라면 지키는 거다.


대부분의 회사가 그렇게 못하는 이유

그런데 대부분의 회사는 이렇게까지 하지 못한다. 아니, 하지 않는다. 대신 뭘 하냐면, HR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채용 페이지엔 수평적 문화와 투명한 평가 시스템을 강조하고, 블로그엔 우리 회사 온보딩 프로세스가 어떻게 체계적인지 자랑한다. 외부 강연에서 CHRO가 나가서 조직문화 이야기를 한다. 이게 나쁜 건 아니다. 실제로 그런 제도들이 있고, 노력하는 건 맞으니까. 근데 문제는 그게 회사 의사결정의 최우선 순위는 아니라는 거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HR 원칙보다 비즈니스 판단이 앞선다. 그리고 그게 정상이다. 회사는 HR 하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라, 비즈니스를 하려고 존재하니까.


그런데 주니어 입장에서는 이 차이를 알기 어렵다. 겉으로 보이는 건 비슷하거든. 둘 다 HR 제도가 있고, 둘 다 그걸 운영한다. 차이는 제도가 흔들릴 때 드러난다. 위기 상황에서,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한 순간에, 대표가 원하는 사람을 뽑고 싶을 때. 그때 HR 원칙이 버티느냐 무너지느냐로 진짜가 가려진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이 원칙을 지키기가 정말정말 힘들다.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회사가 정체되거나 안정화되기 어렵다. 여기서 정체와 쇠퇴는 다른 개념이다. 하락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변동 요인을 만들어낸다. 정체나 안정화는 성장도 하락도 아닌, 그 수준을 계속 유지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게만 해도 회사가 생존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외부와 내부 환경의 변화가 많을수록, 결국 창업자의 의사결정과 인사이트가 중요해진다. 그러면 거기엔 예외도 원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창업자만 존재할 뿐이다. 시장이 급변하는데 HR 정책 지키느라 핵심 인재 못 잡으면 누가 책임지나? 조직 문화 지키느라 구조조정 타이밍 놓치면 어쩌나? 이런 상황에서 원칙은 사치다.


시리즈 B 받은 스타트업인데, 평가 제도를 꽤 잘 만들어놨었다. 그런데 펀딩 받고 6개월 만에 시장 상황이 급변했다. 투자 집행이 막히고, 런웨이를 늘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때 평가 제도가 무슨 소용이었나? 대표는 HR한테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본인이 판단하기에 꼭 남겨야 할 사람들 리스트를 먼저 만들었다. 평가 점수는 참고 자료일 뿐이었다. 그게 잘못됐다고 할 수 있나? 아니다. 그게 맞는 판단이었다. 회사가 살아야 HR도 의미가 있으니까. 역설적이지만, HR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회사가 먼저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서 스타트업에서는 HR의 원칙이 절대적일 수 없다. 그걸 모르면 브랜딩과 현실을 구분 못한다.


중요와 필요 사이

그럼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나는 이럴 때 HR을 매우 필요로 하는 회사라고 말한다. 그 회사는 사실 HR의 필요성이 진짜 높은 곳이다. 없어서 필요할 수도 있지만, 회사 경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제대로 된 HR을 해야 하는 필요성도 높은 거다. 다만 필요성이 높다는 건, 모든 게 HR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중요도와 필요성은 다르다. 중요하다는 건 우선순위가 높다는 거고, 필요하다는 건 성장을 위한 여러 요소 중 하나라는 뜻이다.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많다. 제품도 필요하고, 영업도 필요하고, 재무도 필요하다. HR도 그중 하나다.


HR이 중요한 회사는 HR의 원칙이 최우선이 되는 곳이다. 반면 HR이 필요한 회사는 HR이 회사의 생존과 성장에 기여해야 하는 곳이다. 전자는 HR을 목적으로 보고, 후자는 HR을 수단으로 본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까? HR이 중요한 회사에서는 제도를 먼저 만들고, 그 안에서 비즈니스를 한다. HR이 필요한 회사에서는 비즈니스를 하면서, 그걸 지탱할 제도를 만든다. 전자는 제도가 비즈니스를 제약할 수 있고, 후자는 비즈니스가 제도를 바꿀 수 있다.


물론 현실은 이렇게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다. 대부분의 회사는 이 둘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회사 상황에 따라 이 스펙트럼 위에서 이동한다. 초기 스타트업은 당연히 필요 쪽에 가깝다. 살아남는 게 먼저고, HR은 그걸 돕는 도구다. 그러다 회사가 성장하고 안정화되면, 조금씩 중요 쪽으로 이동할 수 있다. 사람이 많아지면 제도 없이는 못 굴리니까. 규칙이 생기고, 예외를 줄여야 하고, 대표도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 이동이 일직선은 아니다. 시장 상황이 나빠지면 다시 필요 쪽으로 돌아간다. 급성장하면 또 흔들린다. 대표가 바뀌면 리셋된다. 그래서 HR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를 만드는 건, 제도를 잘 만드는 것보다 그 제도를 지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먼저다. 회사가 안정적이어야 하고, 대표가 그럴 의지가 있어야 하고, 조직이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어느 쪽이 나은가?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의 회사는 후자여야 정상이다. 그리고 그게 나쁜 게 아니다. HR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회사들 중에도, 실제로는 HR이 필요해서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냥 마케팅을 좀 잘하는 거다. 중요한 건 그 필요를 어떻게 채우느냐다. HR이 필요한 회사에서 HR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역할이 회사 생존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원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회사가 망하면 원칙도 소용없다. 반대로 회사가 살아남는다고 해서 아무 원칙 없이 움직이면, 그건 HR이 아니라 그냥 잡무 처리다.


그럼 필요를 잘 채운다는 게 구체적으로 뭘까?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어떤 스타트업에서 대표가 급하게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했다. 원래 채용 프로세스는 3단계인데, 2주 안에 뽑아야 한다는 거다. 이때 HR이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안 된다고 버티는 것. 다른 하나는 프로세스를 줄이되, 최소한의 검증은 유지하는 방법을 찾는 것. 후자가 필요를 채우는 HR이다. 2단계로 줄이되, 필수 평가 항목은 놓치지 않는 식으로. 완벽하진 않아도, 최악은 막는 거다.


급성장하는 회사에서 평가 제도를 만들어야 했다. 이때 6개월짜리 완벽한 제도를 설계할 수도 있고, 2개월짜리 작동 가능한 제도를 만들 수도 있다. 전자는 HR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접근이고, 후자는 HR을 필요로 하는 접근이다. 회사 상황에서 어느 쪽이 맞는지 판단하는 게 실력이다. 대부분은 후자가 맞다. 일단 돌아가게 만들고, 부족한 부분은 다음 사이클에 개선하는 거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면서도 방향은 잃지 않아야 한다. 지금은 급해서 프로세스를 줄이지만, 다음엔 다시 복구한다는 걸 명확히 한다. 지금은 간단한 제도로 시작하지만, 언제쯤 고도화할지 로드맵을 그려놓는다. 필요에 따라 움직이되, 중요로 가는 방향을 잃지 않는 것. 이게 균형이다. 결국 이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가 진짜 실력이다. HR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를 부러워할 시간에, 지금 회사가 왜 HR을 필요로 하는지, 그 필요를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는 게 더 생산적이다. 부럽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거니까.




부러워할 게 아니라 이해할 것

HR을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있긴 한데, 그런 회사들은 대부분 이미 엄청나게 안정적이거나, 창업자가 특이한 케이스다. 대부분의 회사는 HR이 필요하다. 그게 정상이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이 차이를 모르고 환상을 품는 거다. HR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에 가면 뭔가 다를 거라고 기대하는 거. 거기 가면 원칙이 지켜지고, 내 의견이 존중받고, HR답게 일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 근데 그런 회사도 결국 비즈니스를 해야 살아남는다. 완벽한 곳은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부러워할 필요 없다고. 내가 다닌 회사들도 결국 HR이 필요한 회사였다고. 다만 그 필요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라고. 브랜딩이 좋았던 건 맞지만, 그게 본질은 아니었다고. 본질은 그 필요를 어떻게 채웠느냐였다. 중요한 건 회사가 HR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느냐가 아니라, HR 하는 사람이 자기 역할을 얼마나 명확히 이해하고 있느냐다. 내가 지금 있는 회사에서 HR이 왜 필요한지,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이걸 아는 게 실력이다.


어차피 대부분의 회사는 HR을 필요로 한다. 그럼 그 필요를 제대로 채우는 HR이 되면 된다. 그게 더 현실적이고, 솔직히 더 재밌다. 완벽한 제도 안에서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것보다, 제약 속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는 게 훨씬 고민할 거리가 많으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쌓이는 게 진짜 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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