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의 HR 커피챗 시리즈
※ 내가 쓰는 글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특정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도, 정답을 말하는 것도 아니니 가볍게 읽어주면 좋겠다. (문의 : AI 클론 채팅, 자문/컨설팅 문의 )
예전에 HR 시니어에게 필요한 역량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인내, 눈치, 정무감각. 이 세 가지는 업무 역량, 그러니까 일을 잘하기 위한 기술에 가깝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스킬이 아니라 애티튜드, 마인드셋 영역이다.
나는 시니어라면 어떤 것들을 직면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로 하면 굉장히 심플하다. 직면하고, 수용하고, 해결한다. 뭐 이렇게 쉬운 걸 가지고 글까지 쓰나 싶을 수 있다.
그런데 10여 년 넘게 일하면서 봐왔는데, 이게 되는 사람이 생각보다 드물다. 왜냐하면 단순히 무섭고 겁나는 것 이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직면한다는 건 때로는 내가 맞다고 믿어왔던 세계관이 흔들리는 경험이기도 하다. 그동안 쌓아온 자기 확신, 나름의 철학, 이런 것들이 현실 앞에서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감당해야 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그동안 믿어왔던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어렵다. 단순히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의사결정의 실수, 외부 경쟁 환경의 변화, 사업 자체의 쇠퇴, 믿었던 구성원에 대한 신뢰의 실패. 조직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수많은 케이스가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필요한 건 해당 상황에 대한 직면이다. 누구 잘잘못이냐, 책임이 누구냐를 따지는 게 아니다. 진짜 문제가 뭔지, 이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그게 핵심이다.
그런데 대부분 하기 싫어한다. 회피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못 본 척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상주의대로라면 생기면 안 될 예외 상황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직은 그러면 안 되는데, 이 사람은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래서 현실을 인정하기가 더 어렵다. 근데 그게 현실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중요한 건, 그 현실은 그냥 현실이라는 거다. 원래 이상주의대로 되는 게 맞고 내가 잘못하거나 실수한 게 아니다. 다만 이상대로 안 된 상황이 눈앞에 있을 뿐이다. 거기서 회피하면 안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합리화를 시작한다. 상황이 특수했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저 사람이 문제였다. 이런 설명들이 틀린 건 아닐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요인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설명이 문제 해결을 위한 분석인지, 아니면 직면을 피하기 위한 변명인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안다.
심지어 어떤 리더는 그 상황에서 자기만 사실 책임이 없고 잘못이 없다는 합리화를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한다. 아무도 당신 책임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먼저 나서서 자기 방어를 시작한다. 정말 책임이 없다면 그냥 굳이 언급하지 않는 게 정상이다. 먼저 꺼내는 순간, 그건 스스로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직면해야 할 걸 회피하고 있다는 걸.
내가 제일 좋아하는 네이버 웹툰 중에 '나이트런'이라는 작품이 있다. 거기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이 많은 경우 악을 저지르는 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약해서지. 어째서 그럴 수 있는지 고민하고 이유를 찾으며 깊이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는, 그냥 그것이 인간이다.
또 이런 대사도 있다.
가능성만으로 사람을 미리 벌하고 예측만으로 선을 정하면 불안과 공포, 의심만으로 누군가를 괴물로 매달아 죽이는 걸 정당화시키는 끔찍한 세상이 되겠지. 어느 쪽이든 마음속 불, 공포에 매몰되어 그 악행은 영원히 계속될 거야. 모든 사람을 죽여도 불안도 의심도 영원히 풀리지 않고, 불안을 떨칠 때까지 영원히 사냥감을 찾아 괴물로 정하곤 또 새로운 걸 매달겠지. 스스로가 뭐가 될지는 저놈들이 정하는 게 아닌 네 스스로가 정하는 거다. 자기가 정하고 행동해서.
대사만 보면 굉장히 아름답게 들린다. 마치 사람을 믿어야 하고, 현실의 어두운 면을 외면하라는 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이 대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정반대다. 이건 현실을 회피하라는 말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약해서 잘못을 저지른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게 인간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어긋나거나 고정된 이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은 선하다고만 믿으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은 악하다고만 믿으면 모든 사람을 의심하게 된다. 둘 다 현실을 직면하지 못한 거다. 그냥 그게 인간이라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거기서부터 진짜 문제 해결이 시작된다.
HR 시니어로 내부에서 진짜 문제들을 겪어봤다면 인정해야 하는 게 있다. 본인의 철학이나 이상과는 별개로, 현실에서 사람은 맥그리거의 Y이론보다는 X이론에 더 가깝게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이 설명력이 높을 때가 많다. 모두를 성숙한 어른으로 대하고 싶지만, 그게 안 되는 상황이 생각보다 자주 온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핵심가치, 도덕, 배려, 희생. 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100만원의 현금이 더 강력하다. 회사의 미래를 위해 함께 고통을 나누자는 말보다, 구조조정 대상이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더 솔직한 본심일 때가 많다. 회사의 경영 악화를 걱정하는 것보다 당장 내 복지 혜택이 줄어드는 게 더 피부에 와닿는다. 이게 나쁜 게 아니다. 그냥 사람이 그렇다. 그리고 이걸 인정하는 데서 현실적인 해결책이 나온다.
자율을 줬더니 오히려 혼란이 생기고, 믿었더니 배신당하고, 기다렸더니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이상주의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정상이다. 흔들려야 정상이다.
물론 외부에서 말할 때는 다르게 할 수 있다. 강연이나 기고에서는 아름답게 정리된 버전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건 그 나름의 역할이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현재 실제로 HR 실무를 하고 있고,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다면, 결국 이 불편함을 피하면 안 된다.
피하고 싶은 현실을 직면하는 것. 거기서부터 실제 문제 해결이 시작된다. 그리고 막상 해결책을 찾아보면, 생각보다 이상주의적인 접근보다는 현실주의적인 방향으로 가게 된다. 사람을 믿고 싶지만 시스템으로 보완하고, 자율을 주고 싶지만 일정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좋게 말하고 싶지만 직접적으로 피드백해야 할 때가 온다.
직면이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나도 안다. 그래서 내가 실제로 써먹는 몇 가지 방법을 공유해본다.
첫째, 객관화한다. 머릿속으로만 돌리면 계속 회피하게 된다. 감정이 섞이고, 두려움이 커지고, 생각이 꼬인다. 그래서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게 필요하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지금 상황을 글로 써보는 것도 좋고, 마치 이게 어떤 게임이나 시뮬레이션 속 상황이라고 설정해보는 것도 좋다. 내가 플레이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지가 있지?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감정에서 한 발 빠질 수 있다. 이걸 보통 메타인지, 객관화라고 부른다. 특히 조직이나 사람과 관련된 상황은 이 객관화를 하지 않으면 직면 자체가 어렵다. 당사자로 들어가 있으면 뭐가 문제인지조차 안 보인다.
둘째, 최악의 시나리오를 먼저 그려본다. 직면을 피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막연한 두려움이다. 이게 터지면 어떻게 되지, 내가 책임져야 하면 어쩌지. 그런데 막상 최악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그려보면, 생각보다 감당할 만한 경우가 많다. 아, 이 정도면 어떻게든 되겠네. 그런 경우가 꽤 있다. 물론 진짜 감당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그때부터 대비를 하면 된다. 최악을 알아야 준비라도 할 수 있다. 어차피 피한다고 안 오는 게 아니니까. 두려움의 실체를 구체화하면 오히려 덜 무섭다.
셋째, 극단적으로 객관적인 사람과 이야기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사람의 조건이다. 단순히 경험이 많은 사람,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 착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필요한 건 그냥 극단적 T다. 그 상황 자체를 나보다도 더 제3자의 시선으로 봐줄 수 있는 사람. 감정 빼고 팩트만 보고, 네가 지금 회피하고 있는 거야 아닌 거야를 냉정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주변에 그 정도 T가 없으면 차라리 AI에게 물어봐라. 농담 아니다. 상황 설명하고 내가 지금 뭘 회피하고 있는 것 같은지 물어보면 의외로 객관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넷째, 작은 것부터 직면하는 연습을 한다. 갑자기 큰 문제를 직면하라고 하면 당연히 어렵다. 근육이 안 되어 있으니까. 평소에 작은 불편함들을 회피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피드백 주기 불편한 상황, 애매한 이슈를 짚어야 하는 상황, 하기 싫은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이런 것들을 미루지 않고 처리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작은 직면이 쌓이면 큰 문제 앞에서도 덜 움츠러든다. 직면도 결국 습관이다. 평소에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할 수는 없다.
다섯째, 직면과 해결을 분리한다. 직면한다고 해서 당장 해결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일단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과, 그걸 어떻게 풀지는 별개의 단계다. 한꺼번에 하려고 하면 부담이 커서 아예 직면 자체를 피하게 된다. 문제를 인정하면 바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것 같은 압박. 그게 직면을 어렵게 만든다. 일단 인정만 하자. 그래, 이게 문제야. 거기까지만. 해결은 그다음이다. 순서를 나누면 첫 발을 떼기가 훨씬 쉬워진다.
가끔 업계에서 HR 출신이 아닌데 HR을 담당하는 리더나 경영진을 볼 때가 있다. 컨설팅 출신, 사업 출신, 혹은 아예 다른 분야에서 넘어온 분들. 어떤 HR들은 정통 HR 출신이 아니라서 인정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한다. HR의 깊이가 없다고, 기본기가 안 되어 있다고.
그런데 나는 시니어에게 그게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분들을 시니어로 인정하지 못할 때는 HR 경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HR을 이상주의나 자신의 경영 철학, 인재 철학을 보여주는 장으로만 생각할 때다. 그러면 실제 조직 내 문제가 터졌을 때도 직면하기보다는 자기 영역이 아니라고 여긴다. HR 실무자들의 영역이라고 넘긴다. 차라리 떠넘기면 다행이다. 아예 못 본 척한다.
반대로 HR 리더로서 오랜 경험을 쌓아왔고 지식도 풍부해도, 정작 현실을 직면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도리어 HR 자체의 지식이나 경험은 부족해도, 현실을 직면하고 직접 부딪혀서 해결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 나는 솔직히 그런 분들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경력이 중요한 게 아니다. 타이틀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식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다. 눈앞의 불편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그게 내 책임의 영역 안에 있다는 걸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 그게 내가 인정하는 시니어의 자세다. 예쁜 답이 아니라 작동하는 답을 찾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세계관이 좀 흔들리더라도, 그걸 감당하면서 앞으로 가는 것. 결국 시니어가 시니어인 이유는 연차가 아니라, 그 무게를 견디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