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의 HR 커피챗 시리즈
※ 내가 쓰는 글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특정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도, 정답을 말하는 것도 아니니 가볍게 읽어주면 좋겠다. (문의 : AI 클론 채팅, 자문/컨설팅 문의 )
초등학교 이야기로 시작해보려 한다. 우리가 선생님이라고 생각해보자. 한 반에 30명쯤 되는 아이들이 있다. 이 중에서 선생님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아이들은 누구일까. 아마 선생님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하고, 시키면 척척 하는 모범생들일 것이다. 대략 10~15% 정도. 그다음은? 수업시간에 돌아다니고, 친구들이랑 매번 트러블을 일으키고, 학부모 상담 전화를 해야 하는 아이들. 이쪽도 한 15~20% 정도 된다고 치자.
그러면 나머지 50~60%는? 물론 그 안에서도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운동을 잘한다거나, 어떤 뚜렷한 특징으로 선생님 레이더에 잡히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다 빼고 나면, 딱히 큰 문제도 안 일으키고, 딱히 눈에 띄는 것도 없고, 그냥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수업 듣고 가는 아이들이 최소 40%는 된다.
이 아이들은 나쁜 아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말을 잘 듣고, 규칙을 따르고, 선생님을 귀찮게 하지 않는 아이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다. 선생님이 이 아이들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모범생은 칭찬해줘야 하고, 문제아는 잡아줘야 하고, 학부모 민원은 대응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끝난다. 착하고 조용한 아이들은 알아서 잘 하겠지 하는 전제 아래 자연스럽게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재미있는 건, 이 아이들이 관심이 필요 없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 아이들도 인정받고 싶고, 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고, 잘했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다. 다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손을 번쩍 드는 것이 아닐 뿐이다. 그래서 더 안 보인다.
이 이야기를 회사로 가져와보자.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구조가 반복된다. 성과를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자기 가치를 스스로 세일즈하는 직원이 있다. 외국계 성과주의 회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반대편에는 매번 불만을 제기하고, 이거 이상하다 저거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직원이 있다. 이 두 부류는 좋든 싫든 회사의 관심 안에 있다. 전자는 성과로, 후자는 리스크로. 이유는 다르지만 어쨌든 회사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있는 직원들은 어떨까. 회사 정책이 바뀌면 일단 따르고, 불합리하다 싶어도 크게 이슈를 만들지 않고,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 한마디로 순응적인 다수다. 이 사람들이 회사에서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기 쉽다. 이유는 단순하다. 관심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니까. 그래서 급하지 않으니까. 학교에서 조용한 아이가 선생님 시야에서 벗어나듯이, 회사에서도 순응적인 직원은 경영진의 우선순위에서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 구조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게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평가·보상제도가 아직 세팅되지 않은 초기 기업이다. 보통 이런 회사는 입사일 기준으로 1년이 되면 대표와 개별적으로 보상 협의를 한다. 그런데 아직 초기 기업이다 보니 모두에게 넉넉하게 해주기는 어렵다. 한정된 재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면담이니까. 여기서 갈림길이 생긴다.
면담 자리에서 연봉이 시장 대비 낮다, 업무량 대비 보상이 부족하다, 다른 곳에서 오퍼가 왔다 하며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회사가 반응한다. 그 사람이 나가면 안 되니까. 결국 그 요구를 어느 정도 맞춰주게 된다. 때로는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더 줘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그러면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별다른 이슈를 제기하지 않는 직원은 어떻게 될까. 회사가 먼저 나서서 더 줄까?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대표 입장에서도 면담에서 별 이야기 없이 넘어가면 현재 수준에 만족하고 있다고 해석하기 쉽다. 결국 조용한 사람은 조용한 대로 그대로 남고, 목소리 낸 사람은 목소리 낸 대로 얻어간다.
그리고 이건 생각보다 빠르게 퍼진다. 같이 입사한 동기가 연봉 협상에서 더 받았다는 이야기는 어떻게든 돌게 되어 있다. 공식적으로 공유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안다. 느낌으로, 태도로, 사소한 단서들로. 이 상황이 누적되면 어떤 메시지가 만들어질까. 여기서는 참고 묵묵히 하면 손해고, 요구하면 얻는다는 메시지다. 회사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행동이 곧 메시지가 된다.
더 씁쓸한 건, 이 메시지를 가장 먼저 학습하는 사람이 원래 조용하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성실하게 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나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아니면 조용히 이력서를 쓰거나. 어느 쪽이든 회사가 원하는 결과는 아닐 것이다.
이쯤 되면 이상적인 조직 운영 관점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맞다. 안 되는 거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대표도 알고 있다. 이게 형평성 이슈라는 것도, 메시지가 잘못 갈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이슈를 제기한 사람을 달래주지 않으면 당장 이탈 리스크가 생기고, 그렇다고 조용한 사람들까지 전부 챙겨주기엔 회사 재정이 따라주지 않는다.
이걸 중간에서 가장 생생하게 체감하는 건 사실 HR이다. 대표한테는 형평성을 이야기하고, 이슈 제기한 직원한테는 일단 상황을 달래야 하고, 조용한 직원들 눈치는 계속 보인다. 이 사람들이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니면 괜찮은 척하는 건지. 알면서도 당장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 HR도 결국 같은 딜레마 안에 갇히게 된다. 급한 불부터 꺼야 하니까.
결국 눈앞의 불이 먼저다. 시끄러운 쪽부터 끄고, 조용한 쪽은 다음에 생각하자. 이것이 현실이다.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홀대하려는 게 아니라, 급한 불부터 끄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어쩔 수 없음이 반복되면서, 순응적인 다수가 계속 뒷순서로 밀리는 구조가 굳어진다. 한두 번이면 예외지만, 이게 패턴이 되면 그건 더 이상 상황 탓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나는 이걸 착한 아이의 딜레마라고 부르고 싶다. 규칙을 따르고, 조용히 제 역할을 하고, 불만을 삼키는 사람이 오히려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역설. 착해서 손해보는 구조.
여기서 흔히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 조용한 사람들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1on1을 정기적으로 하고, 익명 설문을 돌리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들어주면 되지 않냐고. 틀린 말은 아니다. 다 해볼 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접근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결국 개인의 성향을 바꾸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원래 조용한 사람에게 목소리를 내라고 하는 건, 학교에서 내성적인 아이한테 발표를 시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채널을 만들어줘도 쓰는 사람은 원래 쓸 사람이고, 1on1을 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은 여전히 괜찮다고 말한다. 사람의 성향에 기대는 해법은 구조적 문제의 답이 되기 어렵다.
보통 이런 고민을 나에게 이야기하면, 나는 그 상황 자체를 어떻게 개선하겠다는 이상적 접근보다 다른 이야기를 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평가·보상제도를 만들라고.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머릿속에 아주 거대한 그림을 그린다. 전사-개인 연계 KPI 체계, OKR 프로세스, 역량 모델링, 다면평가 시스템 같은 것들. 마치 평가·보상제도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오히려 엄두를 못 내기도 한다. 우리 회사는 아직 그런 걸 할 단계가 아니라고.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도는 그런 게 아니다.
그냥 모두가 같은 프로세스 안에서 동일하게 다뤄지는 것. 목소리를 내면 해주고 안 내면 안 해주는 구조가 아니라, 목소리를 내든 안 내든 동일한 시점에, 동일한 기준으로, 동일한 절차를 통해 한번은 다뤄지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1년에 한 번 정해진 시기에 전 직원이 같은 평가·보상 프로세스를 거치게 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달라진다. 찾아와서 요구한 사람만 챙기는 게 아니라, 안 찾아온 사람도 같은 테이블 위에 올라오게 되니까. 대표가 개별적으로 기억하고 챙겨주는 것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프로세스가 자동으로 모든 사람을 검토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조용한 사람도 최소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기존 구조보다 훨씬 낫다. 완벽한 제도가 아니어도 된다. 정교하지 않아도 된다. 일단 모두가 같은 판 위에 올라오는 것, 그 자체가 출발점이다.
하지만 나는 제도의 가장 첫 번째 역할은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순응적인 인력이, 순응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외되지 않게 만드는 것.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고 해서 논의 대상에서 빠지지 않게, 같은 시스템 안에서 같은 기준과 관점으로 대해지게 하는 것. 이게 제도가 존재해야 하는 가장 기초적인 이유다.
물론 제도가 만능은 아니다. 제도 자체가 목적이 되어 형식에 갇히는 순간 그것도 큰 폐해다. 평가 시즌마다 서류 작성에 매몰되고, 프로세스를 지키는 것 자체가 일이 되어버리면 본말이 전도된다. 제도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라는 최소한의 틀이 있어야 조용한 다수가 시스템 안에서 동등하게 다뤄질 수 있다. 개별 면담을 요청해야만 보상이 논의되는 구조에서, 요청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검토 대상이 되는 구조로 바꾸는 것. 그것이 제도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제도를 도입하면 당장 모든 게 공정해지느냐. 솔직히 말하면, 아니다. 제도가 있어도 평가자의 편향은 존재하고, 같은 기준을 적용해도 해석의 차이는 생기고, 보상 재원이 한정되어 있는 건 마찬가지다. 제도를 만들었다고 해서 목소리 큰 사람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것도 아니고, 조용한 사람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달라진다. 누가 빠졌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제도 없이 개별적으로 운영할 때는 누가 논의 대상에서 빠졌는지조차 파악이 안 된다. 찾아온 사람만 다루니까. 그런데 전 직원이 같은 프로세스를 거치게 되면, 이 사람은 왜 지난 1년간 보상 변동이 없었지, 이 팀은 왜 전원이 동일 등급인지, 이런 것들이 데이터로 드러난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면, 최소한 문제를 인식하고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제도가 만드는 또 하나의 변화는 협상력의 재분배다. 제도가 없으면 보상은 순전히 개인의 협상력에 달린다. 말을 잘하는 사람, 타이밍을 잘 잡는 사람, 대안을 들고 올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하다. 그런데 동일한 프로세스 안에서 동일한 기준으로 검토가 이루어지면, 협상을 잘 못하는 사람도 자기 성과만큼은 테이블 위에 올라간다. 본인이 말하지 않아도 숫자가, 결과가, 동료의 피드백이 대신 말해줄 수 있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과 뭐라도 있는 것 사이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실제로 제도를 처음 도입한 회사에서 종종 보게 되는 장면이 있다. 평가·보상 검토를 전사적으로 돌리고 나면, 대표나 리더가 이런 사람이 있었냐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2년 넘게 같이 일했는데, 그동안 보상 조정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그제서야 인식하는 것이다.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냥 그동안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모르고 지나간 것이다. 제도가 하는 일은 거창한 게 아니다. 이렇게 묻혀 있던 사람을 한 번은 수면 위로 올려주는 것, 그게 시작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혹시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결국 조용한 사람들을 더 챙겨줘야 한다는 이야기 아니냐고. 그건 아니다. 착한 아이에게 필요한 건 특별한 관심이 아니다. 똑같은 관심이다. 목소리 큰 아이에게 가는 관심의 절반이라도 나눠달라는 것도 아니고, 조용하니까 더 배려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같은 기준으로, 같은 시선으로, 한 번은 봐달라는 것이다.
제도는 그 한 번을 보장해주는 장치다. 대표의 기억력이나 선의에 의존하지 않고, 리더의 관심도에 좌우되지 않고, 시스템이 자동으로 모든 사람을 한 번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 그래서 제도의 본질은 성과 관리가 아니라, 사실 관심의 구조화에 더 가깝다.
성과의 정교한 측정, 보상의 시장 경쟁력, 인재 리텐션 전략. 다 중요하다.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이전에, 제도가 해야 할 가장 기초적인 역할이 있다. 조용한 다수가, 조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뒷순서에 놓이지 않게 만드는 것. 순응적인 사람이 순응적이라서 불이익을 받는 역설을 막는 것.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다.
결국 좋은 제도란 뛰어난 사람을 더 뛰어나게 만드는 것이기 이전에, 성실하게 따르는 사람이 성실하다는 이유로 손해보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착한 아이가 착하다는 이유로 잊히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제도를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