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d] 열심히 만든 HR제도가 퇴짜 맞는 진짜 이유

이드의 HR 커피챗 시리즈

by iid 이드

※ 내가 쓰는 글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특정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도, 정답을 말하는 것도 아니니 가볍게 읽어주면 좋겠다. (문의 : AI 클론 채팅, 자문/컨설팅 문의 )


HR 담당자로 일하다 보면 분명히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대표로부터 어떤 제도나 정책을 만들어보라는 요청을 받는다. 평가제도든, 직급 체계든, 유연근무제든 뭐든. 담당자 입장에서는 나름 열심히 한다. 레퍼런스 찾고, 비슷한 업종의 다른 회사 사례 뒤지고, 필요하면 외부에 조언도 구하면서 초안을 잡는다. 예상되는 부작용까지 선제적으로 고려해서 보완 장치까지 달아놓고 보고한다.


그러면 대표가 말한다. 음, 이건 좀 다시 해줘. 혹은 조금 더 우리 상황에 맞게 다듬어봐. 뭐가 문제냐고 물어보면 전반적으로 방향이 좀 다른 것 같아, 또는 요즘 트렌드랑은 좀 다르지 않나 정도로 끝난다. 구체적인 피드백이 없으니 담당자는 혼자 머릿속으로 추론한다. 아 이 부분 때문에 그런가. 그 부분을 손봐서 다시 가져간다. 그러면 또 이 케이스는 어떻게 할 거야, 이런 부분은 생각해봤어 같은 질문이 들어온다.


이 패턴이 서너 번 반복되면 데드라인이 슬슬 다가온다. 결론은 둘 중 하나다. 일단 이 정도라도 오픈하자, 아니면 다음에 다시 검토하자. 후자가 훨씬 낫다. 전자로 런칭했다가 이슈가 생기면 대표는 자신은 완전히 동의한 게 아니었는데 HR에서 밀어붙인 것처럼 된다. 이슈가 없어도 대표 마음에 들지 않으니 런칭 이후로도 수정 요청이 계속된다. 그렇게 제도는 누더기가 된다.


그런데 이게 대표 탓일까. 사실 그렇지 않다. 이 패턴이 반복되는 데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핵심은 단 하나다. 대표가 그 제도를 요청한 진짜 이유를 파악하지 않은 채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담당자도 물론 추론은 했을 것이다. 평가제도를 만들라고 했으면 당연히 이런 이유겠지, 하고. 성과체계를 정비하고 싶은 거겠지. 공정한 평가 기반을 만들고 싶은 거겠지. 그 추론이 틀린 건 아니다. 근데 그게 핵심이 아닐 수 있다는 게 문제다.


모든 제도와 정책에는 의도가 담긴다. 그리고 그 의도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심지어 정치적이거나, 외부 환경에 반응한 것이거나, 사전에 공개하기 어려운 속내가 담긴 경우도 많다. 평가제도 하나만 봐도 경우의 수가 이렇게나 많다.


인건비를 줄이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특정 인력을 정리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본인의 인사권을 강화해서 조직 내 권위를 세우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투자자나 외부에 체계 있는 회사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IT 회사처럼 OKR을 해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 평가 솔루션 업체 대표와 친해진 계기로 관심이 생긴 것일 수도 있고, 자기가 직접 직원들한테 싫은 소리 듣기 싫어서 제도 뒤에 숨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맞고 틀린 의도가 아니다. 실제로 저 이유들 중 하나, 혹은 여러 개가 조합된 채로 제도 만들기 요청이 들어오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그 진짜 의도를 모른 채로 아무리 완성도 높은 보고서를 만들어봤자, 대표가 원하는 답이 아닌 다른 질문에 열심히 답한 것에 불과하다.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지 않고 혼자 열심히 만들어온 제품과 다를 바가 없다.



대표의 머릿속을 먼저 열어야 한다


일 시작 전에, 직접 물어보는 것이 첫 번째다

제일 좋은 방법은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직접 물어보는 것이다. 다만 복심이 뭐냐고 대놓고 물어봐선 안 된다. 대부분의 대표들은 자신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는 걸 꺼린다. 속 좁거나 나쁜 경영자처럼 보이기 싫어서이거나, 내부적으로 부담이 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줄 이유가 없기도 하다.


물어보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 평가제도의 일반적인 효과와 목적들을 먼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중에서 우리 회사 상황에서 특히 더 중요하게 다루거나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어느 부분을 좀 더 특화하거나 커스터마이즈하면 좋겠냐는 식으로. 사실 그 지점이 메인인 경우가 많다. 겉에 드러난 이유가 아닌 이유를 살짝 건드리는 방식이다.


물론 이조차도 대표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그 위치가 아니라면, 그리고 대표가 쉽게 말해줄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루트를 뚫어야 한다.


직접 안 된다면, 주변에서 편린을 모아야 한다

대표와 직접 확인하기 어렵다면, 대표 주변에서 정보를 모아야 한다. 왜 대표가 평가제도 만들라고 했을까요가 아니라, 평가제도 만들 때 어떤 부분을 고려하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여러 사람에게 던지는 방식이다. 회사 입장에서, 대표 입장에서 어떤 부분이 중요하게 반영되면 좋겠냐는 식으로. 의도를 직접 묻는 게 아니라 반영해야 할 요소를 묻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대상은 대표의 말을 가까이서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들 위주가 되어야 한다. 각 사업 담당 리더들은 물론이고, 외부 미팅에 동행하는 리더나 비서, 대표와 자주 독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대표의 기본 성향과 캐릭터도 따로 파악해두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예민해지는지, 어떤 방식의 보고를 좋아하는지, 평소에 어떤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는지. 이런 것들이 다 단서가 된다.


의외로 제도 만들기 요청 전에 사전 징후가 보이는 경우가 많다.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발언이나 결정도 사실 복선인 경우가 있다. 최근 외부 미팅에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갑자기 특정 회사 사례를 언급하기 시작했는지, 어떤 이슈에 유독 반응이 강했는지. 이런 것들을 평소에 수집해두는 습관이 있으면, 제도 설계 요청이 들어왔을 때 이미 절반은 파악이 된 상태가 된다.


모은 편린들로 시나리오를 만든다

이렇게 수집한 편린들이 쌓이면 이제 가설을 세운다. 데스노트에서 L이 라이토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수집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 트리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수집한 편린들을 조합해서 대표의 의도를 추론하는 것이다.


이 가설은 단 하나여서는 안 된다. 각각이 독립적으로 존재해서도 안 된다. 분기점마다 조건이 달라지는 시나리오 형태로 만들어야, 실제 보고 과정에서 대표의 반응에 따라 방향을 조정할 수 있다. 가설이 하나뿐이면 그게 틀렸을 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분기형 시나리오가 있으면 어느 가지로 틀어지든 대응이 된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가지로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는 보고를 거치면서 계속 튜닝된다. 대표의 반응 하나하나가 사실 다음 분기점의 단서다. 어떤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는지, 어떤 질문이 나오는지, 어떤 옵션에 관심을 보이는지. 그걸 관찰하면서 가설을 좁혀나가는 것이다.



설계와 실행을 동시에 굴려야 한다


보고를 줄이는 게 아니라 쪼개는 것이다

머릿속 가설이 잡혔으면 이제 실행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흔히 하는 실수가 있다. 보고를 크게 세 번으로 끊는 것이다. 최초 보고, 중간 보고, 최종 보고. 이 구조의 문제는 각 단계 사이 간격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대표의 생각이 바뀌거나, 외부 변수가 생기거나, 담당자가 엉뚱한 방향으로 혼자 달려가도 아무도 모른다. 그러다 최종 보고에서 방향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알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 단계를 최소 열 번 이상의 접점으로 쪼개야 한다. 물론 매번 공식 보고 형태일 필요는 없다. 짧은 슬랙 메시지도 되고, 5분짜리 구두 확인도 된다. 중요한 건 그 빈도다. 단, 매번 대표한테 의사결정을 요구하면 왜 이런 것도 알아서 못 하냐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래서 형태를 구분해야 한다.


의사결정이 필요한 안건은 옵션을 두세 개로 좁혀서 각각의 장단점을 정리해두고, HR 입장에서는 이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식으로 선택을 유도한다. 나머지는 이렇게 진행하고 있는데 방향이 맞는지 확인해달라는 체크 형태로 가져간다. 결정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확인을 요청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이 방식으로 반복하다 보면 수많은 가능성의 가지들이 하나씩 줄어들면서, 최종 결과가 대표의 머릿속에 있던 그림과 자연스럽게 수렴하게 된다. 여러 번의 확인 과정에서 대표의 선택이 이미 그 방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최종 보고에서 퇴짜를 맞을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낮아진다.


만들었으면 팔아야 한다

보고를 통과시켰다고 끝이 아니다. 이제 그 제도를 직원들한테 전달해야 한다. 그런데 이 단계를 가볍게 보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공지 하나 올리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같은 제도라도 어떤 명분으로 공지하고, 어떤 순서로 꺼내고, 누구의 입을 통해 전달하느냐에 따라 구성원의 수용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잘 만든 제도가 현장에서 반발을 사는 경우도 있고, 솔직히 별로인 제도가 아무 탈 없이 안착하는 경우도 있다.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전달의 문제인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이 전달 과정에서도 대표의 의도 파악이 또 한 번 필요하다. 어떤 메시지로 포장되길 원하는지, 대표가 직접 나설 건지 HR이 앞에 설 건지, 어떤 타이밍에 꺼낼 건지. 그 그림을 맞춰두지 않으면 공지 하나 나가는 것도 뒤에서 다시 엎어진다. 제도 설계가 대표를 상대로 한 작업이었다면, 이건 조직 전체를 상대로 한 작업이다. 이건 일종의 프로파간다의 영역이다.




완벽한 보고서보다 중요한 것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게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건 결국 대표의 의도를 파악해서 그에 맞는 제도를 만들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게 항상 옳은 방향일까.


대표의 의도가 틀렸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특정 인력을 내보내기 위한 명분으로 평가제도를 만들라고 한다면, HR 담당자는 그냥 그걸 설계해줘야 하는 걸까. 대표가 원하는 걸 파악했는데, 그게 조직에 해가 되거나 구성원에게 불공정한 결과를 만들어낼 게 뻔하다면. 그때도 그냥 니즈에 맞춰 잘 만들어드리면 되는 걸까.


HR 담당자가 제도 설계에서 진짜로 고민해야 할 지점은 사실 거기에 있다. 대표의 의도를 파악하는 능력과, 그 의도에 어디까지 맞춰줄 것인지를 판단하는 능력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전자는 기술이고, 후자는 판단이다. 기술은 배울 수 있지만 판단은 결국 그 사람의 가치관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판단이 HR 담당자의 전문성과 직업적 윤리가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사실 HR 담당자로서의 색깔을 만든다.


좋은 제도는 대표가 원하는 그림과 조직이 필요한 방향이 겹치는 교집합에서 나온다. 그 교집합을 찾는 것, 그리고 교집합이 너무 작을 때 어떻게 할지를 아는 것. 그게 제도 설계에서 진짜 어려운 부분이고, 그 이야기는 또 다른 글에서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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