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d] 한약이냐 항생제냐, HR 솔루션을 고르는 법

이드의 HR 커피챗 시리즈

by iid 이드

※ 내가 쓰는 글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특정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도, 정답을 말하는 것도 아니니 가볍게 읽어주면 좋겠다. (문의 : AI 클론 채팅, 자문/컨설팅 문의 )


오랜만에 국립과천과학관에 갔다가 한의학 특별전시를 봤다. 사실 기대 없이 들어갔는데, 맥을 짚어 몸 전체의 기운 흐름을 읽는다는 설명 패널 앞에서 발이 멈췄다. 같은 증상이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처방된다는 내용이었다. 직업병이랄까, 갑자기 요즘 HR 자문 현장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겹쳐졌다.


HR 자문이나 컨설팅을 받는 회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패턴이 꽤 비슷하다. 제도 설계나 실제 문제 해결은 대부분 단기 프로젝트로 진행되고, 길게 이어지는 경우는 주로 대표나 리더층 코칭이다. 근데 아이러니한 건, 그 둘 다 정작 HR 실무진에게는 제대로 공유되지 않는다는 거다. 단기 프로젝트는 HR 실무자가 자료 준비를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참관은 시키지만, 코칭은 내용 자체가 공유되지 않으니 HR이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흘러간다.


그러다 보니 자문을 받으면서도 별도로 노무 법인이나 정부 지원 프로그램을 따로 쓰는 묘한 상황이 생긴다. 자문은 자문대로, 실무는 실무대로 따로 굴러가는 거다. 처음엔 이게 비효율처럼 보이는데, 가만 들여다보면 사실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 전시를 보면서 문득 이 질문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HR 자문이란 게 어떤 의미여야 하는 걸까.




① 빠르게 낫는 것과 잘 낫는 것은 다르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병을 바라보는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

한의학은 당장의 증상을 잡는 것보다 몸이 스스로 낫는 힘을 길러주는 쪽에 집중한다. 침을 놓고 뜸을 뜨고 한약을 달이는 건 다 그 흐름을 되살리려는 시도다. 병의 원인도 특정 바이러스나 세균을 지목하기보다, 몸의 기운이 어디서 막혔는지, 어떤 환경과 생활 습관이 몸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먼저 본다. 그래서 같은 두통이라도 사람마다 처방이 달라질 수 있다. 치료의 속도보다 방향을 중요하게 여기는 의학이다.


서양의학은 반대로 원인을 정확히 찾아서 제거하는 데 강하다. 혈액검사로 수치를 확인하고, 현미경으로 균을 잡아내고, 필요하면 수술로 들어간다. 증거 기반이고, 빠르고, 결과가 명확하다. 증상이 급할 때는 이쪽이 압도적으로 효과적이다. 방향보다 속도와 정확도를 우선하는 의학이다.


어느 쪽이 더 좋은 의학이냐는 사실 의미 없는 질문이다. 급성 충수염에 한약을 달일 수 없고, 만성 피로에 수술을 할 수도 없다. 중요한 건 지금 내 몸 상태가 어느 쪽 치료를 필요로 하는지를 먼저 아는 것이다.


HR 자문도 두 종류가 있다

한의학 스타일은 코칭으로 대표된다. 대표나 리더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 의사결정 패턴, 생각하는 구조를 천천히 바꿔가는 작업이다. 빠른 효과보다는 조직이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쪽이다. 서양의학 스타일은 지금 당장 타오르는 불을 끄는 쪽이다. 취업규칙을 정비하고, 평가 체계를 만들고, 갈등을 중재하고, 제도를 손본다. 명확한 결과물이 있고 기간이 정해져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조직이 어떤 상태이고, 어떤 치료가 먼저인지를 판단하는 게 먼저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판단 없이, 가격이 맞아서, 아는 사람이 소개해줘서, 정부 지원이 나와서라는 이유로 그냥 받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다 보면 조직은 코칭을 받으면서도 제도 문제를 따로 외주 주게 되고, 제도는 고쳐지는데 사람은 그대로인 상태가 반복된다. 자문이 두 갈래로 따로 굴러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② 좋은 처방에도 함정이 있다


한약을 받아놓고 제대로 못 먹는 이유

한의학이 효과를 내려면 조건이 있다. 꾸준히 먹어야 하고, 그 기간 동안 기름진 음식과 술을 멀리해야 한다. 당연히 알고 있다. 근데 막상 한약을 받아들고 집에 가면 어떻게 되는지는 다들 안다. 며칠은 잘 지키다가, 회식이 생기고, 야근이 쌓이고, 귀찮아지면서 흐지부지된다. 효과를 느낄 틈이 없으니 그냥 돈만 쓴 셈이 된다.


코칭도 비슷하다. 세션 때는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뭔가 바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근데 다음 주에 투자자 미팅이 있고, 팀원이 갑자기 퇴사하고, 분기 목표 압박이 쏟아지면 세션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금세 흐릿해진다. 변화가 체감되지 않으니 슬슬 회의감이 든다. 그러면서 코칭은 대표가 한 달에 한 번 좋은 말 듣는 자리가 되고, 조직은 그대로다.


스타트업은 특히 이 부분이 어렵다. 사업 사이클이 빠르고 사람도 자주 바뀌는 환경에서 6개월짜리 변화 프로그램을 끈기 있게 유지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긴 호흡을 갖기 어려운 구조에서 긴 호흡의 처방을 받는 거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짚고 싶은 게 있다. 코칭의 내용 자체가 문제인 경우도 있다. 제대로 된 진단 없이, 그냥 경영진이 듣기 좋은 이야기 위주로 흘러가는 코칭이 생각보다 많다. 리더십의 중요성, 구성원을 아끼는 자세, 심리적 안전감의 필요성.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근데 그게 지금 이 조직의 실제 문제와 연결되지 않으면, 결국 경영진 자존감만 살짝 높여주고 끝나는 세션이 된다. 좋은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해서 조직이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미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는 착각만 강화될 수 있다. 듣기 불편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어야 진짜 코칭이고, 그게 없으면 비싼 위로에 가깝다.


항생제만 쓰다 내성이 생기는 이유

반대편도 마냥 편하지 않다. 단기 프로젝트로 취업규칙을 정비하고 평가 제도를 만들면 당장의 문제는 해결된다. 근데 그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으면, 환경이 그대로면, 몇 달 지나지 않아 비슷한 문제가 다른 이름으로 다시 올라온다.


제도는 바뀌었는데 그 제도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그대로면, 결국 새 제도도 이전 방식으로 운영되기 마련이다. 그러면 또 외부에 손을 내밀게 되고, 이번엔 조금 더 강한 처방을 요청하게 된다. 이게 반복되다 보면 조직 내부에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근육이 생기지 않는다. 뭔가 터지면 외부 전문가를 부르면 된다는 패턴이 굳어지는 거다.


처음엔 예방주사 수준이었던 게, 나중엔 수술로 가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면서도 체질을 바꾸려는 시도보다는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방식으로 흐르기 쉽다. 약에 내성이 생겨 더 강한 약이 필요해지는 것처럼, 자문 의존도가 올라갈수록 정작 내부 역량은 약해진다. 외부 처방이 반복될수록 스스로 진단하는 감각도 무뎌진다.


결국 자문 없이는 아무것도 판단 못하는 조직이 되어가는 거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문 계약이 끊기거나 담당자가 바뀌면, 그동안 쌓인 맥락이 한꺼번에 사라지면서 조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외부에 의존할수록 조직의 면역력은 조용히 낮아지고 있다는 걸 숫자로 보여주는 지표가 없으니, 눈치채기도 쉽지 않다.


③ 진단이 빠진 처방의 문제


문진 없이 처방할 수 없다

한의학이든 서양의학이든 제일 중요한 단계가 문진이다. 환자와 직접 대화하면서 증상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 같은 두통이라도 언제부터인지, 어디서 시작됐는지, 평소 생활이 어떤지를 들어야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온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단계가 빠지면 나머지는 다 무너진다. 아무리 좋은 약재도, 아무리 정교한 수술도 잘못된 진단 위에서는 효과를 낼 수 없다.


HR 자문도 마찬가지인데, 현실에서는 이 문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표나 임원이 전달한 내용을 기반으로 진단이 이루어지지만, 그게 현장 실제와 얼마나 가까운지는 직접 들어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HR 실무자는 자료 준비 역할에 그치거나 아예 배제되고, 결국 대리인을 통해 전달받은 증상으로 처방이 내려진다.


대표 입장에서 보이는 조직의 문제와 실무자 입장에서 체감하는 조직의 문제는 생각보다 많이 다르다. 그 간극을 좁히지 않은 채 진단이 내려지면, 자문은 처음부터 살짝 어긋난 방향을 향하게 된다. 자문이 자문사와 대표 사이에서만 맴도는 이유가 여기 있고, 그래서 실무 현장에서는 따로 또 다른 채널을 찾게 되는 거다.


체질을 모르면 좋은 약도 독이 된다

의사 중에도 이전 환자에게 잘 들었던 약을 제대로 묻지도 않고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로 바로 처방하는 경우가 있다. 인삼이나 녹용 같은 좋다고 알려진 약재도 체질 확인 없이 쓰면 오히려 몸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좋은 것과, 이 사람에게 맞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증상이 비슷해 보여도 그 뿌리가 다르면 처방도 달라져야 한다. 문진을 건너뛰는 순간, 의사는 환자를 보는 게 아니라 증상을 보게 된다.


HR 자문도 마찬가지다. 어느 회사에서 효과를 봤던 솔루션이 비슷해 보이는 다른 회사에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가 있다. 업종도 다르고, 구성원 구성도 다르고, 조직 문화도 다른데, 겉으로 드러난 증상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처방이 내려진다. 결과가 달라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어떤 조직은 제도보다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 하고, 어떤 조직은 사람보다 구조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그 순서를 잘못 짚으면 공들인 처방이 엉뚱한 곳에 가 닿는다. 자문사 입장에서도 검증된 솔루션을 꺼내드는 게 훨씬 편하고 안전하다. 하지만 그게 이 조직에 맞는 솔루션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좋은 자문사란 좋은 솔루션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 조직이 지금 어디가 아픈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어서다. 그리고 그 읽기는 경영진만 만나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처방보다 진단이 먼저, 그리고 누가 진단하느냐

지금 조직에 당장 꺼야 할 불이 있는지, 아니면 불이 잘 나지 않는 체질을 만드는 게 먼저인지. 그 판단 없이 자문사를 고르는 건 몸 상태도 모른 채 약국에서 아무 약이나 달라고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 판단 자체를 자문사에게 맡기는 순간 이미 주도권을 잃은 거다. 자문사는 자기 솔루션을 팔아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 판단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HR 실무자다. 현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사람이니까. 대표가 보는 조직과 실무자가 보는 조직은 같은 조직이지만 다른 풍경이다. 그 두 풍경이 자문 과정에서 같이 다뤄지지 않으면, 진단은 절반짜리가 된다. 그러니 자문에서 HR 실무진이 배제되는 구조는 단순한 비효율이 아니라, 처음부터 진단이 어긋난 채로 시작하는 것과 같다. 결과가 기대에 못 미쳤을 때 자문사 탓을 하기 전에, 진단 과정에 누가 있었는지를 먼저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자문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한약이든 항생제든 효과를 내기 어렵다. 조직이 건강하게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고, 그 목적이 선명할 때 어떤 방식의 자문이든 제대로 된 효과를 낼 수 있다. 자문의 형태보다 자문을 대하는 태도가 더 중요한 이유다. 외부 전문가는 좋은 처방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어디가 아픈지를 가장 먼저, 가장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건 그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게 빠지면, 아무리 좋은 처방도 엉뚱한 환자에게 가는 약이 된다. 한약이냐 항생제냐를 고르기 전에, 지금 우리 조직이 어디가 아픈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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