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의 HR 커피챗 시리즈
※ 내가 쓰는 글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특정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도, 정답을 말하는 것도 아니니 가볍게 읽어주면 좋겠다. (문의 : AI 클론 채팅, 자문/컨설팅 문의 )
조직의 성장단계를 이야기할 때 스타트업 씬에서 가장 흔하게 쓰는 기준은 투자 라운드다. 시드면 초기, 시리즈A면 성장기, 이런 식으로. 혹은 프로덕트 관점에서 MVP를 몇 번 돌렸는지, 피벗을 거쳤는지, PMF를 찾았는지로 현재 위치를 가늠하기도 한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두 가지 모두 회사 중심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투자 라운드는 투자자와 소통하는 언어고, MVP니 PMF니 하는 건 초기 단계를 버텨내는 실행의 언어다. 둘 다 내부에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방식이고, 외부 특히 시장이나 고객의 관점은 빠져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 기준이 인원수나 매출로 바뀐다. 내부 언어로는 서로 소통이 잘 안 되니까,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공통의 기준을 찾다 보면 결국 숫자로 가게 된다. 50명 넘으면 중간관리자가 필요하다거나, 매출 100억 넘으면 CFO를 써야 한다거나. 그런데 이건 굉장히 결과 지표 중심적인 이야기다. 그 숫자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 안의 구조와 역학에 대한 고민은 빠져있다. 숫자는 결과일 뿐이고, 정작 중요한 건 그 숫자를 가능하게 하는 내부의 변화인데.
물론 본인 회사의 성장단계를 본인이 정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굳이 성장단계를 정의하는 이유는, 그 단계에 따라 뭔가를 판단하고 적용하기 위해서다. 단계 구분이 의미를 갖는 건 그 이후의 액션 때문이다. 기준이 엉성하면 액션도 엉성해진다.
대표님들이나 리더들과 커피챗을 하거나 자문을 할 때, 내가 가장 먼저 파악하려는 건 하나다. 이 회사가 지금 '사업(Business)'의 단계에 와 있는가, 아니면 아직 '장사'의 단계인가.
장사라고 하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데, 무시하려는 게 아니다. 사업 이전 단계를 내 식으로 표현하면 장사에 가깝다. 특정 목표나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사람이 모이고, 열정 있는 사람들이 뭔가를 만들어가는데,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방향을 바꾸거나 접는다.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활동이지만, 운영의 문법이 다르다. 장사는 장사의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하고, 사업은 사업의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문제는 본인이 어느 쪽인지 모르거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을 때 생긴다.
장사의 특징은 관계가 느슨하다는 거다. 계약보다는 신뢰와 합의로 돌아가고, 역할보다는 사람 중심으로 돌아간다. 의사결정도 빠르고 유연하다. 대표 한 사람의 판단으로 거의 모든 게 돌아간다. 이게 초기의 강점이기도 하다. 근데 이 문법을 사업의 단계에서도 그대로 쓰면 문제가 생긴다. 편의점을 백화점 방식으로 운영할 수 없듯, 반대도 마찬가지다.
비즈니스의 난이도와 얽히는 관계들이 한꺼번에 올라간다. 고객 한 명, 파트너 한 명이었던 게 어느 순간 이해관계자가 여러 겹으로 쌓인다. 계약서도 그냥 간단한 메모 수준이 아니라 조항이 붙고, 위반하면 페널티가 따른다. 계약의 무게가 달라진다는 건, 이제 비즈니스가 의지와 열정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열정과 추진력만으로 새로운 시장을 뚫기도 어려워진다. 예전엔 아무도 모르는 영역에 먼저 뛰어들어서 만들어가는 게 무기였다면, 이제는 그 분야에 실제로 발을 담가본 사람, 업계의 문법을 아는 사람이 필요해진다. 열정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열정만으로는 이제 상대가 안 된다.
투자사가 있다면 요구하는 내용의 결도 달라진다. 예전엔 비전과 팀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제는 실행 계획과 숫자, 그리고 리스크 관리에 대한 질문이 들어온다. 투자사가 요구하는 내용이 어려워졌다는 건, 사실 그들도 이 회사를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현금 흐름이 머릿속 암산으로 돌아가던 게 이제 반기, 혹은 연 단위의 계획으로 관리해야 하는 숫자가 된다. 단순히 돈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얼마가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예측하고 관리해야 한다. 현금 흐름을 모르면 흑자도산이라는 말이 현실이 된다.
하나의 의사결정이 만들어내는 파급 효과도 넓어진다. 어떤 고객을 받을 것인가, 어떤 파트너와 일할 것인가, 어떤 조건에 합의할 것인가. 하나하나가 나비효과처럼 연결된다. 기준이 없으면 매번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처리하게 되고, 그게 쌓이면 조직 안에서 불공정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정책이 필요해지고, 규정이 필요해진다. 있으면 좋은 게 아니라, 없으면 고통스럽기 때문에 만들게 되는 것들이다.
전략이라는 단어도 이때부터 진짜 무거워진다. 예전엔 방향 정도였다면, 이제는 어떤 시장을 어떤 방식으로 공략할 것인가에 대한 실질적인 선택과 포기가 필요해진다. 전략은 무엇을 할지의 결정이기도 하지만, 무엇을 하지 않을지의 결정이기도 하다.
장사일 때는 구성원들이 역할보다 관계로 묶인다. 이 사람이 좋아서, 이 일이 재미있어서, 이 미션이 의미 있어서. 그게 초기 조직의 에너지원이고, 그 에너지가 실제로 엄청난 추진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사업의 단계가 되면 그 문법이 달라져야 한다. 관계 중심에서 역할 중심으로, 열정 중심에서 전문성 중심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이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스포츠로 치면 동호회에서 실업팀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동호회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가 실업팀에서도 주전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요구되는 수준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전환은 사람에 대한 판단도 바꾼다. 초기부터 함께했던 사람이 이 단계에서도 여전히 핵심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 아니면 이 단계에 맞는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가. 이 질문을 회피하면 조직은 성장하는데 사람 구조는 그대로인 상태가 된다. 그리고 그 간극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벌어진다.
또 한 가지, 더 이상 변명이나 어리광이 통하지 않는다. 고객도, 파트너도, 시장도 이제는 우리가 초기라는 이유로 봐주지 않는다. 납기를 못 맞추면 페널티가 오고, 품질이 낮으면 계약이 끊긴다. 냉혹하게 들릴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진짜 플레이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변화가 계단처럼 딱 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자연스럽게 우상향하다가 어느 시점에 단계가 달라진다. 스스로 냉철하게 인지하지 않으면 대응의 타이밍을 놓치고, 그 타이밍을 놓치면 뒤늦게 급하게 세팅하면서 훨씬 더 큰 비용을 치른다. 다만 이 시점에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춰야 한다는 게 아니다. 이때부터는 이런 것들이 필요해진다는 인식이 먼저고, 그 인식 위에서 하나씩 쌓아가면 된다.
역할이 명확해져야 한다.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겸하는 건 초기엔 당연하지만, 사업의 단계에서는 그게 병목이 된다. 누가 뭘 하는지 명확해지기 시작해야 하고, 그 역할들 안에서 경험과 역량에 따른 레벨이 생겨야 한다. 그리고 레벨이 생기면 그에 맞는 권한과 책임의 범위도 따라와야 한다. 권한 없이 책임만 지우거나, 책임 없이 권한만 주는 구조는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이게 관료주의의 시작이 아니라, 조직이 지속 가능하게 돌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인프라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알아야 협업이 된다.
보상 기준도 이때 명문화되어야 한다. 처음엔 대표의 판단으로 결정되던 보상이 조직이 커지면 반드시 기준을 요구하게 된다. 왜 저 사람은 나보다 많이 받는지 알 수 없고, 내가 더 잘하면 얼마나 더 받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 구조는 투명성이 아니라 불신을 만든다. 완벽한 체계가 아니어도 된다. 기준이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기준이 있어야 구성원도 본인이 어디쯤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HR 체계도 같은 맥락이다. 채용이 느낌으로 이루어지고, 온보딩이 없고, 평가가 주관적으로만 돌아가면 사람에 관한 문제가 반드시 터진다. 사람 문제는 항상 늦게 발견된다. 그리고 늦게 발견될수록 해결 비용이 크다. HR 체계는 사람을 관리하는 도구가 아니라, 조직이 대표 한 사람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고 굴러갈 수 있게 하는 구조다. 이 구조가 없으면 결국 모든 판단이 대표에게 수렴되고, 그 에너지가 소진되는 순간 조직 전체가 흔들린다.
회사 전체의 방향에서 팀, 개인까지 연결되는 구조가 없으면 각자 열심히 하는데 회사는 제자리인 기묘한 상황이 생긴다. 성과 관리는 평가를 위한 게 아니라, 조직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는 장치다. 내가 하는 일이 회사의 어느 목표에 연결되는지 모르면 사람은 결국 지친다. 열심히 하는데 뭘 위해 하는지 모르는 상태가 쌓이면, 가장 진지하게 일했던 사람이 먼저 번아웃된다.
이 구조가 없으면 진짜 잘하는 사람이 먼저 나가는 이유도 여기 있다. 잘하는 사람일수록 본인의 기여가 어디로 향하는지에 민감하다. 방향이 보이지 않으면 방향이 보이는 곳으로 간다.
엉성하더라도 사업계획을 세우고 핵심 과제를 관리하는 습관도 필요해진다. 계획이 틀려도 괜찮다. 계획 없이 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계획을 세워야 틀렸다는 걸 알고, 틀렸다는 걸 알아야 고칠 수 있다. 계획 없이 달리면 잘 가고 있는 건지 헤매는 건지도 모른 채 그냥 바쁘기만 한 상태가 된다.
비용 구조 전체를 보는 눈이 생겨야 한다. 지금 회사에서 돈이 어디서 들어오고 어디로 나가는지, 어떤 활동이 수익을 만들고 어떤 활동이 비용만 만드는지. 현금 흐름을 모르는 상태에서 성장을 추구하면 빠르게 달리다가 갑자기 멈추는 상황이 온다. 흑자도산이라는 말이 교과서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 되는 건 생각보다 빠르다. 반기, 혹은 연 단위로 자금 계획을 세우고 실제와 비교하며 관리하는 루틴이 이 시점부터는 필요해진다.
시장을 보는 시각도 달라져야 한다. 예전엔 우리가 뭘 만들 수 있는가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시장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경쟁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포지션은 어디인가를 봐야 한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시장이 원하지 않는 방향이었다면, 그 노력은 아깝게도 허공에 날아간다. 내부를 잘 돌리는 것과 외부를 잘 읽는 것,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해지는 시점이다. 전략이라는 게 거창한 문서가 아니라, 이 두 가지를 연결하는 판단의 연속이라는 걸 이때부터 체감하게 된다.
계약서에 페널티 조항이 생겼고, 실제로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됐다
고객이나 파트너가 우리의 실수를 더 이상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이해관계자가 3개 이상이고, 각자 요구하는 게 다르다
계약 때문에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 생긴 적 있다
투자사나 주요 파트너가 숫자와 실행계획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현금이 언제 바닥날지 머릿속으로 바로 계산이 안 된다
대표 혼자 모든 의사결정을 하면 조직이 멈추는 상황이 생겼다
같은 상황인데 사람마다 다르게 처리된 적이 있다
비용이 어디서 얼마나 나가는지 한눈에 파악이 안 된다
누가 어떤 역할인지 외부에 설명하기 애매한 사람이 있다
보상이 왜 이렇게 책정됐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잘하는 사람이 나가는 이유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채용할 때 역할 적합성보다 사람 자체를 먼저 보게 된다
성과가 좋은 사람과 그냥 있는 사람이 구분이 잘 안 된다
예전엔 대표 판단으로 다 됐는데, 이제 왜 이러냐고 따지거나 문제 제기하는 사람이 생겼다
결과 해석
✅ 0~4개: 아직 장사 단계. 지금의 방식이 맞다. 다만 변화 시점을 미리 염두에 두면 좋다.
✅ 5~9개: 전환점에 와 있다. 지금 세팅하지 않으면 6개월 안에 문제가 터질 가능성이 높다.
✅ 10개 이상: 이미 사업 단계인데 장사 방식으로 운영 중이다. 지금 당장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숫자보다 중요한 건, 체크하면서 뜨끔했던 항목이 몇 개냐다. 그게 진짜 답이다.
사업의 단계에 왔다는 건 사실 꽤 설레는 일이다. 진짜 게임이 시작됐다는 뜻이니까. 다만 그 설렘이 준비의 부재와 만나면 꽤 빠르게 피로감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피로감은 대부분 갑자기 오지 않는다. 조금씩 쌓이다가 어느 순간 한꺼번에 터진다.
커피챗에서 종종 느끼는 건, 이미 사업의 단계에 들어서 있으면서도 아직 장사 감각으로 운영하는 곳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거다. 그리고 그런 조직일수록 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단계를 실감한다. 사람이 갑자기 여럿 나가거나, 중요한 계약이 엎어지거나, 투자사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나서야 우리가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체감한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HR 체계를 찾고, 성과 관리를 찾고, 재무 관리를 찾는다. 못 하는 게 아니라 타이밍이 늦은 거다.
미리 아는 것과 터지고 나서 아는 것, 그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그 차이는 대부분 대표나 리더가 얼마나 빨리 스스로를 냉정하게 봤느냐에서 갈린다. 내가 지금 장사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사업을 하고 있는지. 이 질문에 솔직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결국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다.
사업은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준비된 사람이 기회를 알아보게 만든다. 단계를 아는 것, 그게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