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용사│지금을 말할 때 그 자신으로 충분한 말

by 윤세영


며칠 전, 같이 실컷 웃고 떠들던 중, 엄마가 불쑥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어쩜, 너 정말 앙큼스럽다, 야.”


앙큼스럽다니. 정말로 싫어하는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앙큼스럽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앙큼-스럽다

형용사 1. 보기에 엉뚱한 욕심을 품고 깜찍하게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려는 데가 있다.


‘깜찍하게’가 잘도 붙어 허영덩어리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지난 글에서 작은따옴표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엄마에겐 그것이 별 소용이 없다. 누구보다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사람…. 엄마가 내 안의 허세와 허영을 간파한 게 틀림없으므로, 섭섭함을 넘어 심각한 자기 검열에 들어가게 된다. ‘앙큼스럽다’ 쓰고 오래 노려본다. 역시, 또 형용사다.


사람을 상처 주는 말은 무수히도 많을 것이다. 단어 자체가 품고 있는 의미가 문제일 때도 있지만, 보통 그 말이 닿는 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상흔이 생기기도, 무용하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앙큼스럽다’에 간단히도 발끈하는 옹졸한 사람이다.


형용사에 얻어맞은 나의 역사는 유구하여 내 성장기는 온통 그에 상처 입은 기억들뿐이다. 태어나 자라면서 단 한순간도 또래보다 큰 키였던 적이 없는 조그맣고, 깡마른. 거기에 두꺼운 안경까지 쓰고 다니는 여자아이는 놀리기 딱 좋은 대상이었을 것이다. 나를 주어로, 청자로 세운 말들의 서술어에는 항상 불편한 형용사들이 자리했다.

조금 자라면서 외모로 놀림받는 일은 거의 사라졌지만, 이후에는 성격을 말하는 형용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들이 칭찬으로 말하는 ‘착하다’나 ‘귀엽다’는 그저 ‘재미없는 아이’를 돌려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기까지 했고, 어른들이 말하는 ‘성실하다’는 어딘지 특별한 구석은 없는 아이란 의미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보이는 나의 이미지가 진정 내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를 어딘지 불쾌하게 만드는 단어들에 매 순간 아주 성실히 주눅 들어 살다가, 그들을 새로이 바라보게 된 건 스무 살이 지나서였다.


대학에 다니며 국어학에 흥미를 느끼면서 문득, 내가 싫어한 단어들 모조리 형용사였네, 깨달은 날이 있었다. 떠오르는 대로 하나하나, 나를 서술했던 단어들을 줄 세워 보다가, 늘 그렇듯 정신은 아득히 멀어져 형용사는 현재 시제를 서술할 때 아무런 활용이 필요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간단하게 다음을 예로 들어 볼까.


미안하다, 사랑한다


2004년 겨울에 방영된,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걸작이라 극찬하는 드라마 제목으로 두 단어가 모두 서술어로서 기능한다. 우리가 저 둘의 의미를 사전으로 찾는다면 ‘미안하다’는 ‘미안하다’ 그대로, 사랑한다는 ‘사랑하다’로 찾을 것이다. 사전을 찾을 때 언중(言衆)이 아주 자연스럽게 찾는 단어의 기본 버전. 그것이 기본형인데, 형용사는 용언으로서 다양하게 활용하는 양상을 보이면서도 현재 시제, 즉 지금을 나타내는 문장을 서술할 때만은 기본형으로 자리한다. 그러니까, 위의 저 예시만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 '미안하다'는 형용사, '사랑하다'는 동사라는 것을.


대개의 문법 개론서에서는 형용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형용사는 ‘사람이나 사물, 장소, 사태 따위의 성질이나 상태를 표시하는 말’이다.1)


이를 놓고 보면, 형용사가 그 외 다른 형태소와의 결합 없이 오로지 기본형으로 현재 시제 문장의 서술어 자리에 놓인다는 사실이 당연하면서 또 제법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지금은 그 자체로 충분한 형용사. 이런 생각을 하다니. 역시 감정 과잉일까. 엉뚱한 지점에서 엉뚱하게 감동하는 나는 그렇게 내 모든 형용사와 (혼자서) 화해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거나 문장을 읽을 때 의미를 헤아리는 일은 물론 중요하지만, 때로 상황에 따라 조금 딴청을 피운다 한들, 뭐 어떤가. 제아무리 내 속을 긁는 형용사라 해도 마치 동네 마실 가듯 무엇도 안 들고 건성으로 걸어오는 모양새를 상상하면 그저 귀엽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자신으로 내게 온 형용사의 서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바른 걸음으로 지나가기. 어떤 의미의 형용사든 그것은 지금 이 시점(時點이자 視點)의 만남일 뿐이니까. 앞에 놓인 형용사를 그대로 바라보고, 알맞은 동사를 찾아 부지런히 활용하며 다음으로 나아가면 될 일이다. 물론 말이 쉽지, 여전히 ‘미련하다’는 내 것이어서 되지도 않는 미련을 부릴 때도 많고, 당장 엄마가 놀리듯 뱉은 ‘앙큼스럽다’ 한마디에도 별수 없이 순간 당황하는 처지이지만, 어렵다 해도 못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은 그렇게, 순간마다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근래에 깨달은 나의 가벼운 습관 중 하나는 평소 형용사에 속하는 단어를 자주 중얼거린다는 것이다. 요사이 많이 떠올리는 단어는 ‘산뜻하다’. 생각이 자꾸만 안으로 파고들고 가라앉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 오히려 자꾸 찾게 되는 듯하다. '산뜻하다’하고 되뇌며 걷다 보면 정말로 조금쯤은 산뜻해지는 기분이 들어 묘하게 즐겁다.





1) 고영근ㆍ구본관, 『우리말 문법론』, 집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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