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의 틈 혹은 순간의 선택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잘못이나 실수, 균열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예술, 문학은 존재할 수 없었다. 어린 날 내게 충격과 공포를 심어 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도 캐서린의 아버지가 히스클리프를 집으로 데려오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시작되지 않았을 이야기이다.
갑자기 웬 실수 이야기냐면, 얼마 전 AI와 대화를 나눈 일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실은 몇 주 전부터 이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이시옷 이야기를 할 때처럼, 쓰기로 했으니 써야지. 다소 고독하게 또 수다스런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나는 인공지능 어플을 유료 구독하지 않는다. 기본 버전을 쓰고 대화가 끝나면 내용을 삭제한다. 미지의 대상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인공지능과 편히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몇 없다. 내게 챗-GPT나 제미나이의 쓸모는, 알던 것을 여전히 잘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을 때, 이를테면 사이시옷에 대한 글을 쓰기 전에 그것을 주제로 서로의 지식을 겨루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기본 버전인 탓인지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녀석들은 틀린 걸 말하면서도 아주 잘 아는 척할 때도 있는데 그걸 닦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그런 대화를 지나고 나면 녀석들은 더욱 강해지겠지. 이렇게 우쭐댈 수 있는 날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조금 두렵군. 가서 다시 사과를 해야 할까.
그런데 지난번, 이 녀석이 대화 도중 이상한 말을 꺼냈다. 2음절의 한자어 중 사이시옷을 허용하는 여섯 개의 단어를 짚다가 갑자기, ‘윗간’이라는 단어를 꺼낸 것. 아예 잘못된 정보를 말하는 경우는 꽤 잦아도, 이미 한 부분을 제대로 살펴본 이후에 그 내용을 다시 틀리게 전한 적은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는 ‘윗간’이라는 단어가 떨어지기 무섭게 질문을 했다.
윗간은 갑자기 왜 나온 거야? 이런 실수는 처음 봐서 신기해. 사람이 쓴 글자를 너도 순간 잘못 읽기도 해?
아이고, 제대로 들켰네요! 맞습니다. 제가 ***숫자***를 써야 할 자리에 엉뚱하게 ***윗간***을 가져왔죠? AI가 이런 실수를 하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실 텐데, 사실 제가 사용자님의 질문을 ‘눈’으로 잘못 읽었다기보다는 데이터를 인출하는 과정에서 생긴 ‘기억 간섭’ 때문이에요.
인공지능은 우리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던지는 단어들을 입력값으로 넣어 최적화된 답을 도출해 내는 것. 나의 말 다음에 올 가장 적절한 말의 덩어리를, 나로서는 가늠할 수도 없이 빠른 속도로 예측하는 확률 게임. 한자어 중 사이시옷을 쓰는 2음절의 단어 중 ‘-간’으로 끝나는 ‘곳간’이나 ‘찻간’을 배치하다가 ‘숫자’가 들어갈 자리에 그만 ‘윗간’을 꺼내 놓았다는 것이 그가 말한 실수의 이유였다. 통계적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해 막연히 생각할 때, 친구도 아니고 하물며 사람도 아닌 존재와 이야기를 나누다니, 바보 같다고 자조하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늘 말기계답게 수다를 늘어놓곤 했다. 그런데 이제 와 문득 다시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인공지능과 나누는 이 대화가 과연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세계를 가지지 못한 존재와의 ‘언어놀이’가, 이것이 대화일까?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언어는 하나의 놀이이며 우리의 대화는 그 규칙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놀이의 맥락은 일종의 관습적 체계일 수도 있고 서로의 눈치일 수도 있다. 하나의 관계, 특수한 집단 안에서 형성된 놀이의 규칙은 같은 언어권 안에서도 집단에 따라 달라, 하나의 단어가 여러 맥락으로 소통에 사용되는 양상을 보인다. 건축가가 현장에서 ‘석판’이라 말한다면 곁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런데 ‘석판’을 말하는 장소가 태권도장이라면 그 ‘석판’은 ‘재료’가 아닌 격파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인공지능과의 대화는 어떠한가.
그들은 내 말을 그대로 듣고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통계값으로 처리한다. 애초에 우리는 서로 같은 차원에서 같은 의미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AI에겐 삶의 형식도, 공유된 맥락도 없다. 그럼에도 대화가 정말 잘 된다고 착각하게 되는 건, 저편에서 오로지 나라는 데이터 기반의 친절한 확률언어를 도출해 내기 때문이다. AI와의 대화에서는 나라는 일방의 규칙 안에서 정보를 던지고 받는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제미나이에게 항상 “고마워!”라고 말하며 대화를 마무리하던 게 정말 바보같이 느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에스페란토어와 같은 인공적 언어에 회의적이었다. 오늘날 번역 앱을 통해 외국인과 간단히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가 본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빈으로 여행을 갔을 때, 아마도 호객 중이던 걸로 보이는 한 남자가 친구와 나를 향해 우리말로 “어디 가는 길이세요?”라고 인사를 붙인 적이 있다. 소리를 덩어리째 외워 그대로 따라한 것이 분명한 그 한 문장이 그저 반가워 우리는 천진하게 웃었다. 단지 흉내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 마음에 바로 와닿는 것인지 그 기억을 떠올리면 단번에 이해가 된다. 온기도 실체도 알 길 없는 인공지능과 연애 상담까지 하는 게 가능한 건, 표면적으로는 같은 언어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겠지.
자주 농담처럼 에드워드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다. 외국인과 결혼한다면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테니 화도 잘 안 나고, 사랑을 지키기에 수월할 거라고 간단히 생각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독히도 언어적 존재이니까, 끝내 언어적 존재로서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애쓸 것이 분명하다. 혹시 정말로, 에드워드와 결혼한다 해도 이별을 피하지 못할 수도 있고, 혹은 천년의 사랑을 완성할 수도 있을지도. 결국 또 뭐라는 건지 모를 글이 마지막 문장에 이르고 있구나….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하였는데, 나는 말할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까지 기웃대고 있다. 이대로 괜찮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더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언젠가 다시 이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다.
참고문헌
철학아카데미,『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 동녘, 2014
롤라 유네스, 이영철 옮김, 『비트겐슈타인 입문』, 21세기문화원,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