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함을 생각할 때│기역 디귿 시옷

by 윤세영


요가를 열심히 하던 때가 있었다. 아직 어리던 시절에 일을 하며 알게 된, 지금도 내가 참 많이 좋아하는 선생님을 따라 등록한 요가원에서 일주일에 세 번, 인생보다 힘든 것만 같은 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마음의 고단함이 조금은 잊히는 듯했다. 수업 마무리에 사바사나 자세로 누워 가만 눈을 감고 있으면 우주의 먼지가 된 것만 같은 기분. 먼지에게는 걱정도 고난도 가당찮지,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숨을 고르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내 근력은 그런 고강도의 운동을 견딜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 물론 근력은 지금도 형편없다. — 그래도, 진창을 허우적대는 것만 같던 이십 대 후반의 시간을 지나는 데 요가가 도움이 많이 됐다.


수업 첫날 수업을 담당한 선생님이 내게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물었을 때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서서는 새빨간 얼굴로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근력도 부족하고 허리도 안 좋아서 걱정이라고. 그때 선생님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내가 지닌 허리 질환은 사고방식이 경직된 사람들이 주로 겪는 것이란 말을 했다. 하,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유연해야 하는 것이었나요….


선생님이 과학적이지도 않은 이야기를 꽤나 선지자 같은 투로 이야기한다고 생각돼 약간의 반감이 들었지만 스스로 돌이켜 봐도 정신의 유연함이랄지, 포용력이 넓은 편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 그 말을 웃으며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선생님…. 제가 바로, 이 구역 제일의 고지식쟁이입니다.


의식적으로 매사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받아들이려 애써 노력하며 사는 편이다. 그마저도 조금이라도 바쁘고 최소한의 기력마저 고갈되고 나면 이내 마음이 나부대고 쉽게도 분개한다. 온전한 내 몫의 부끄러움이 항시 차고 넘친다. 의식하지 않고도 타고나길 마음이 따뜻한 친구들이 주변에 꽤 있는데 그네들을 가만 바라보면, 일단 모든 상황 앞에 즉시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마음의 공간이 널찍하고, 여유가 있다. 그것이 천성이고 기질이겠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런 건 흉내 낼 수가 없다.


단순히 따뜻한 사람이나 아니냐의 문제뿐 아니라, 나의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思考)는 약간의 변수에도 쉬이 긴장과 짜증을 일으킨다. 지독한 통제광인 탓에 무어든 내 뜻대로 하고 싶어서 일을 나눌 줄도 모른다. 내가 할게, 내가 다 할게, 제발 그냥 두고 저리 가서 쉬어.라고 말하는 통제 광인(狂人)이 바로 나다. 이렇게 찬찬히 자기 고백을 하고 나니, 내 허리 병, 정말 유연성의 부재(不在) 탓일지도….


뜻하던 바나, 계획에 차질이 생길 때 융통성 있게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 정말 부럽다. 내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면, 그럼 이렇게 하자, 말하며 등을 쓸어주는 멋쟁이들. 그런 마음의 자세….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그게 되지 않는 스스로에 질리는 지경에 이르다가, 이내 숨을 내쉬고 주문처럼 기역, 디귿, 시옷을 한 번씩 눈 앞에 그리곤 한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온전한 완성체의 한 부분이 되는 대안들을.


많이들 알다시피, 한글은 1443년 12월에 창제되었다. 이때 반포된 한글은 현재 『월인석보』첫머리에 실려 있는 ‘예의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취지문과 자음과 모음의 발음법, 각 글자의 운용 규칙과 사성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 서리들에게 한글을 교습시키고, 각종 문헌을 간행하였는데, 최세진의 『훈몽자회』(1527)는 한자 학습서로 오늘날 우리가 가리키는 한글 자모의 명칭과 순서의 시작이 되는 문헌이다. 『훈몽자회』는 초성과 종성에 두루 쓰이는 여덟 자음의 이름을 그 자음자를 넣어 제시한다.


ㄱ기역(其役) ㄴ니은(尼隱) ㄷ디귿(池末) ㄹ리을(梨乙)

ㅁ미음(眉音) ㅂ비읍(非邑) ㅅ시옷(時衣) ㅇ이응(異凝)


이를 통해, 자음의 명칭을 2음절로 짓되 첫음절의 중성(모음)은 ㅣ, 둘째 음절의 중성은 ㅡ를 넣고, 각 음절의 초성과 종성에 해당 자음을 넣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예외는 기역, 디귿, 시옷. 이들이 다른 이유는 둘째 음절을 위의 규칙대로 쓸 수 있는 음가를 지닌 한자가 마땅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귿의 ‘귿’과 시옷의 ‘옷’은 해당 한자음도 없어 한자의 뜻을 빌려 쓴 것이다.


무언가 계획하던 대로 되지 않아 두 눈을 질끈 감게 되는 순간을 지나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길 때면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자음자의 이름을 지었다면 저런 예외라곤 없는 완벽하게 통일된 명칭을 지었을 거라고. 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려 다시 깨닫는다. 나는 그 완벽한 이름을 찾지 못해 끝내 어떤 책 한 권도 내지 못했을 거라고. 저 세 글자의 예외가 통일성을 깨는 것이 아닌, 큰 줄기를 해치지 않는 멋진 대안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요가에 대해 내가 품은 막연한 이미지는 관절의 움직임과 척추의 모양새를 무시한 듯한 기괴한 자세들이었기에 유연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나의 몸뚱이가 과연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지가 시작할 때의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런데 웬걸, 어차피 그런 난도 높은 자세는 초심자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고, 당장에 중요한 것은 근력이었다. 도달하고자 하는 바까지 해내는 힘 안에 유연성이 실현되는 것. 이제까지는 그저, 나에게선 나올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나 하게 하던 기역, 디귿, 시옷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제야 처음 그런 생각이 든다. 단순히 긴장을 풀어야 한다거나 넉넉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막연한 부담이 아닌, 어디에 시선을 두고 마음을 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참고문헌


고영근, 『우리 언어철학사』, 집문당,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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