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처럼 쓰면 안 되는 에세이

처음이자 마지막 에세이를 빙자한 일기장

by iinnocuous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사는데 별반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인연을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과 약속 없는 주말이 싫어서였을까.


그럼에도 당분간 나를 소모시키는 모임은 나가지 않기로 다짐했다. 물론 11월 한정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인연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린 전력이 있던 회사 형님 한분께서

블라인드라는 커뮤니티에서 만든 블릿이라는 어플리케이션을 추천해 준다.

그나마 직장이 검증된 사람만 가입이 되어서 평범(?)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며.


그도 그럴게 모임에서 만났던 사람 중에 돌이켜보니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던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특히나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이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못 잔다고 했으니. 다들 먹고살기 팍팍한 시대에

살고 있긴 한가보다.


앱에 가입 후 각종 신상(MBTI, 키, 학벌, 사는 곳, 직업)을 기입 후 간단하게 자기소개 글을 작성한다.

"무해함"

요즘 들어 내가 밀고 있는 키워드다. 일부 유튜브나 인스타에서도 종종 언급되었던 단어.

하도 체르노빌산 방사능을 여기저기 흩뿌리고 다니는 해로운 인간들과 엮일 때마다 그래도 나는 타인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마음을 다잡고 있을 무렵, 앱에서 알람이 울린다.


"XX님께서 innocuous 님에게 높은 호감을 표시했습니다."

오호라 그래도 나 아직 안 죽었나? '몇 달 전에 비싼 돈 주고 프로필 사진 예쁘게 찍어놓은 보람이 있네' 라며

기분 좋은 혼잣말과 동시에 XX님의 프로필을 열어 본 찰나.


" 33살이고요, 초등학교 1학년 딸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어쩌고 저쩌고 블라 Blah "

아무리 내가 갔다 온 사람 만나는 팔자라지만 벌써 올해 엮인 돌싱만 4번째다. 뭐 그분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내 팔자려니 하고 이내 앱을 종료했다.


요 며칠 마음이 먹먹하기도 몽글몽글하기도 냉탕과 온탕을 진탕 오가고 있었다. 더 나빠질 것도 없는 현실에서 막막함인지 막연함인지 모를 그 어느 중간 지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망할 것도 없지라는 가히 우주의 기운을 방불케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런 감정을 느꼈나?라고 도취될 만큼.


문득 뜬금없이 Threads 앱을 켜본다. SNS는 시간 낭비 서비스라고 했던가. 각종 주제의 글들이 순식간에 유튜브 숏츠처럼 휙휙 지나간다. 그저 영상이냐 활자냐의 차이일 뿐.

최근에 실패를 통과하는 일이라는 박소령 작가님의 책에서 사업을 할 때 중요한 몇 가지 항목이 있었는데,


1. 내가 팔고 싶은 것보다 고객 수요에 집중할 것

2.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 진심으로 고민할 것

3. 상대방의 고통과 업무를 덜어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것(Confident 역할)


이 세 가지를 접목해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가 하나 있었다. 사주 상담.

눈팅만 할지 글을 올릴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사주 관련 무물(?), 스하리(?) 다른 사람의 게시글에서 봤지만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태그 한 후 첫 게시글을 올렸다.


※ 무물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스하리는 스레드 친구, 하트, 리포스트라고 한다. 글을 읽는 여러분도 모르실 거라고 확신한다. 알아도 모르는 척해줘요


첫 게시 이후 30분간 아무 반응이 없길래 민망함을 뒤로한 채 다른 글이나 몇 개 읽다가 씻고 잠이나 자야겠다 생각할 찰나, 아릿한 글 하나가 눈에 밟힌다.


"아무도 내 생일에 연락이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밤 11시가 지나서야 혼자 케이크를 사러 갔다.

쇼윈도 앞에서 망설이다, 조각 케이크 하나를 고르고 돌아섰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나에게 생일을 축하해 줘야 하지 않을까?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제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다른 사람의 축하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괜찮아였다는 걸"


막상 내가 저 상황이었어도 글쓴이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Anyway 글쓴이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댓글과 좋아요를 누른 후 선행(?)을 베풀었으니 오늘은 저녁에도 샤워를 해야겠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다.


유달리 바디샤워 자몽 향이 진하게 느껴진 탓일까, 로이킴의 신곡 달리 표현할 수 없어요를 네 번쯤 흥얼거렸을 때서야 비로소 망설임 없이 온수 밸브를 잠글 수 있었다.


잘 준비를 하고 스레드를 마지막으로 확인했는데, 댓글이 수십 개가 달려있었다. 아뿔싸. 기쁨인지 흥분인지 모를 감정을 뒤로한 채 답글 몇 십 개를 다 달고 나니 새벽 한 시 반. 무려 세 시간 동안 익명의 바다를 항해한 나.


첫 게시글에 좋아요는 오십 개가 넘었고, 팔로워가 42명이 늘었다. 서로 주고받은 댓글은 160개.


나 생각보다 재능 있는데? 3시간 동안 42명이라니. 올해 안에 팔로워 천명까지 달성해보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추신. 에세이를 잘 쓰고 싶어서 "에세이 글쓰기 수업"이라는 책을 읽다가. 에세이와 일기의 차이점은, 나뿐만 아니라 남들도 보는 글이기 때문에 남이 읽어야 하는 이유를 던져야 한다고 했다. 오늘 만큼은 청개구리가 되어야지.














작가의 이전글십 년이 지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