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서른 후반에야 나를 보기 시작했을까
어렸을 때 나는 유복하지 못한 집안에서 자라 왔다. 뻔 한 클리셰처럼 읽힐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등 기본 의식주를 최대한 아끼면서 살다 보니 여태 내가 뭘 진짜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스타일이 잘 어울리는지 잘 몰랐고, 서른 후반에서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트여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특정 오행으로 쏠린 사주 구성을 가지고 있다. 사주 용어로는 비겁 다자라고도 한다.
사주 8글자 중 토기운 7개, 화기운 1개. 사주를 잘 모르시는 독자분들에게 알게 쉽게 비유를 하자면 달려 나가는 추진력과 에너지는 KTX인데, 선로도, 운전사도, 사이드 미러도, 브레이크도 없는 그야말로 폭주 기관차에 가까운 사주.
이렇게나 쏠린 사주들은 잘 풀릴 때 한 번에 잘 풀리고, 안 풀린다 싶으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인생이 다이내믹하게 굴곡진 삶을 살아간다.
출력이 좋으니 달려 나가는 힘과 버티는 힘은 좋은데,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My Way로 살아가니 예의와 범절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나라에서는 특히나 타인의 눈총 따가운 시선을 많이 받기 마련이었다.
사회초년생일 때 회사를 다니면서 받은 월급의 60%씩 저축을 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돈은 쌓이지만, 외모 등 주변 관리가 부실할 수밖에 없던 건 당연 지사. 특히 정장 한 벌을 일주일 단위로 로테이션으로 입고 셔츠만 매일 갈아입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저 아연실색일 수밖에 없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뭐가 중요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나름대로 나는 일머리가 좋아 업무를 잘하는 직원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기준 어이없게도 옷 입고 다니는 것 가지고 직원들 사이에서 말이 나왔다.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볼 법했지만 일도 못하는 것들이 깔게 없으니 옷 입는 것 가지고 난리냐며 내 맘대로 가볍게 웃어넘겼던 기억이 난다.(아서라...)
도대체가 순진한 건지 아님 멍청한 건지, 내게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는지 여태 그 출처를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남자치고 작지 않은 키에, 소싯적 연예인 좀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던 내가 본격적으로 외모를 관리하기 시작 한 건 2025년도 하반기부터였다.
처음엔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퇴근 후 옷만 갈아입고 근처 운동장을 하루도 빠짐없이 뛰고, 걸었다.
(당근마켓 앱의 당근 머니와 보물상자는 덤이다.)
저녁 식사는 삶은 달걀 4알, 두유 1팩. 미친 듯이 배가 고팠는데 이 짓도 며칠 해보니 몸이 슬슬 적응해 간다.
(인체는 정말 신비롭다.)
네 달간 위와 같은 루틴으로 거진 11KG 정도 감량 한 것 같다.(78KG ▶ 67KG) 주말엔 도저히 못 버텨서 피자 한판 치킨 반마리는 매주 먹었다.
비단 감량뿐만 아니라, 옷 스타일도 다방면으로 변화를 주었다. 맞춤 정장 여러 벌과 무채색 계열 니트, 슬랙스, 카디건 그리고 오버페이해서 구매한 코트 두 벌까지. 아무렴 으른 남자 VIBE 끝판왕은 클래식이지라며 자화자찬. 고작(?) 몇십만 원 더 비싼 옷 샀다고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네.. 돈이 좋구나
플러스 요새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지. 피부 톤이 어둡다 보니 제일 어두운 25호 파운데이션 하나와 발색 립밤 정도로 타협을 해보고, 레이저 수염 제모는 어느덧 8회 차에 접어들었다.
※ 외모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남자분들은 레이저 수염 제모 정말 강력 추천 드립니다.(★★★★★)
이쯤 되니 주변 반응이 서서히 달라진다.
"Innocuous야, 요새 연애해? 왜 이렇게 멋있어졌어?" 세상 깐깐한 유부녀 상사가 우연히 마주친 정수기 앞에서 내게 말을 건넨다.
나보다 두 살 많고 애가 초등학생인데 정말 관리 잘해서 아직도 30대 초반 같이 보이는 상사분.
본인이 자기 관리에 엄격한 만큼 타인도 엄격하게 판단하는 양반이 내게 이런 워딩을 했다? 이제 됐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나 보고 유X인 닮았다고 한건 안 비밀)
어쩌다 옆팀 남자 팀장님도 오시더니,
"아니 요새 관리 하나 봐? 우리 회사에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있었나 싶었네"
"아이고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팀장님 헤헤"
날 많이 예뻐해 주시는 회사 사장님께서도 요새 얼굴에 뭐 좀 바르고 다니나 봐? 조만간 장가가겠다는 후덕한 덕담을 해주고 가신다.
외모와 스타일, 분위기가 바뀌니 주변에서 나를 바라봐 주는 시선 자체가 호의적이고 나 스스로 자신감이 차오르는 경지에 도달했다. 진작 꾸밀걸..
올해 성과 때문인지 외모 관리가 나비 효과가 되어 가치가 bluffing 된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지만 운이 좋게도 직장 생활 10년 만에 부서 최초 고과 S(상위 3% 이내)를 받게 되었다.
아이러니 한건, 늘 나를 정서적으로 피폐하게 만드는 빌런들이 내 잠재력을 자극해서 Another level로 도약하는 촉매 역할을 해준다는 점이다.
올여름 내내 각종 간 보기 테스트와 모순적인 언행으로 나를 흔들어 댔던 무채색의 그녀(나랑 못 만난다고 해놓고 딴 놈이랑 바로 사귀더라. 길 가다 넘어져라.)
내가 업무적으로 치고 올라오는 게 두려워 본인이 4년이나 선임임에도 불구하고 평가 시즌마다 내 업무를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보고했던 정치꾼 선임.
그 둘에게 올 한 해 정말 많이 시달렸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들을 뛰어넘을 정도로 단단해져 있는 내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랑스럽다.
이처럼 내 사주는 천방지축, 천태 만상 가끔은 천인공노할 일도 생기지만 삶에서 마주하는 여러 유형의 악역들을 발판 삼아 성장할 저력을 갖춰가는 특성을 이제는 아이덴티티로 삼아도 무방하지 싶다.
앞으로 또 어떤 유해한 사람들 속에서 무해한 성장을 이뤄 낼지 내 인생 귀추가 주목된다.
P.S 코코 샤넬의 명언으로 이번 글을 마무리합니다.
"상대를 외모로 판단하지 마라. 그러나 명심해라. 당신은 외모로 판단될 것이다."
P.S 2 여러 연예인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최근 부쩍 뮤지컬 배우 최재림 님이 언급된다. 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