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회가 기회인지 모르고

2025년을 돌아보며

by iinnocuous

이윽고 2026년 병오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26년이 벌써 3주 차에 접어들었지만, 절기상 2월 4일 입춘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병오년이 시작되기에 아직

2주 정도 시간이 더 남아있다.


저마다 마주할 26년을 향한 새해 각오와 다짐으로 분주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자꾸만 길을 잃은 아이처럼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 네 가지를 꼽아 보자면


1) 친했던 직장 동료와 내적 손절 후 본격적인 고과 경쟁을 시작하고,

2) 2년을 만난 여자친구와 끝끝내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어버리고,

3) 이후 알게 된 여자에게 홀라당 마음을 뺏겨 24시간 365일 감정의 파고에 휩싸이다,

4) 얼렁뚱땅 이력서만 제출하고 자기소개서조차 제출 안 한 회사에 면접만으로 덜컥 합격하기까지.


지나고 보니 매 순간순간에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고, 26년이 시작되기 전 그 선택들로 말미암아 발생한 지극히 개인적인 에피소드들을 시리즈 형태로 나열해 보고자 한다.


나는 비교적 타인에게 관대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관계에서 기싸움을 하는 것에 굉장한 피로감을 느끼고, 다소간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다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거고 내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타인이 느낄 감정을 조금 더 고려해서 최대한 볼멘소리 하지 않으려 한다.


※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은 망각이라고 했던가. 본래 기억력이 굉장히 좋다고 자부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 수록 사소한 기억과 감정은 빨리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행복에 보다 가까워지는 지름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최근 들어 자주 하게 된다. 이래서 나이가 들면 사고가 유연해진다고 하는 건가..?


25년이 채 시작하기 전에 손절한 직장 동료는 나보다 경력이 4년이 많았고 나이는 만으로 두 살 정도 많다. 그럼에도 나와 동일 직책인 것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관리자와 주변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선임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내게 서슴없이 반말을 했다. 처음에는 정중하게 경칭을 써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앞에서는 웃으면서 뒤에서는 언제라도 내 평판에 흠을 내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간 봐온 정이 있어서 무반응으로 일관하니 정말로 나를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대체 어떤 뇌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도 회사라는 조직에서 만만하게 봐도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서 대하는 걸까?(속으로나 생각하든가)


그가 내게 그렇게까지 무례하고 몰염치하게 행동한 기저는 직장 내에서 소외되고 쓸모 없어지는 것에 대한 발작에 가까운 유기 불안 때문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나는 업무용으로 사둔 녹음 기능이 있는 볼펜을 조용히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실제로 녹음을 할 생각도 없었고 감사 업무는 녹취가 일상인지라 단순 보관 목적으로 책상에 올려 두었는데 그제야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카뮈는 "원칙은 큰 일에나 적용하고, 작은 일에는 연민으로 충분하다"라고 했었는데..

아마도 21세기에는 통용되지 않는 명언이지 않을까 의구심을 자아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진부한 권선징악 스토리가 현실이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운동선수는 운동 실력으로, 게이머는 전략으로 승부를 보듯 직장에서는 고과로 승부를 보게 되었고 다행히도 올 한 해 보란 듯이 한방 먹여줬다.(사장님 감사합니다.)


올해 인사발령에서도 승진을 누락한 그는, 다른 부서 경쟁자의 승진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가뜩이나 험상궂게 생긴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혹시나 승진자 명단에 본인 이름이 누락된 것이 아닌지 인사발령 공지조회만 수십 번. 그는 눈앞에 이익 때문에 직장에서 관계도 잃고 고과도 잃었다.


처음엔 그가 엄청 똑똑하게 처세하고 정치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래서 정치적이지 않은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는가. 어느덧 나는 그의 사내 정치를 온몸으로 흡수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그를 상대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내 인생에 발을 들일 수 없게끔 명확하게 선을 긋는 방식으로. 이쯤 되면 나의 잠재된 처세를 깨워준 은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를 보면 이천 년대 초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들의 경기를 보는 것 같다. 투게이트 질럿 압박으로 테란을 상대하는 전략. 처음에는 쉽게 대처하기 어려웠지만, 테란이 건물로 입구를 막는 전략을 사용하면 쉽게 무력해지는 전략.

시대가 바뀌면 사람과 상황을 대하는 방법도 바뀌어야 할 텐데 그는 2025년에도 구 시대적인 투 게이트 질럿 압박 전략을 사용하면서 왜 결과가 바뀌지 않는지 고뇌하고 있는 것 같다.

그에게 직장 동료 관계 이상으로 일관성 / 진정성 있게 대하면 바뀔 것이라고 기대한 내 순수했던 마음까지 부정하고 싶진 않다. 다만 확실한 건 그는 기회가 기회인 줄 알지 못했을 뿐이다.


알베르 까뮈는 어쩌면 이런 상황을 두고 작은 일은 연민으로 충분하다고 했을까. 이제는 테란을 상대로 투게이트 질럿 빌드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그가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하다.

마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 엄석대의 쓸쓸한 말로처럼.


아마 이 글을 끝으로 그가 내 브런치에 언급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그와 다른 트랙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도 업무적으로도.


그와 사이가 좋았을 때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본인은 타인이 좋게 바뀌길 원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게 어떤 조언도 하지 않는다고.


위인의 명언에 잠시나마 의구심을 가진 점, 이 글을 빌어 카뮈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 P.S 1. 위 에피소드를 두고 GPT는 "가까운 사람이 남이 되는 게 아니라, 남이 될 사람을 가까이 두고 있었

던 시간이 끝난 것"이라고 말했다.(GPT는 천재 아닌가 정말)


- P.S 2. 을사년 정관운이 이렇게 작용할 줄이야. 사주 is Science

※ 아마도 내가 그와 같은 부서에서 직장 동료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는 애진작에 승진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 관운이 의도치 않게(?) 그의 앞길을 막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외모가 주는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