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이에 마주한 사랑 다웠던 사랑
그녀는 나보다 열 살 어렸다. 만으로는 열한 살. 165 남짓한 작지 않은 키에 홍염살 가득한 전형적인 미인상.
기억을 더듬어 보니 코로나가 거의 끝나날 무렵이었던가. 내 옆자리로 배치받은 그녀를 처음 마주한다.
작은 얼굴에 피부는 새 하얗고 잡티 하나 없는 얼굴. 그녀가 착용한 분홍색 새부리형 마스크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앳된 얼굴과는 다르게 그녀는 사회 초년생 신입사원 치고 강단 있고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처리해 간다.
가끔 회사 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조잘 재잘 내게 물어보는 모습이 사뭇 귀엽게만 느껴졌다.
처음부터 그녀가 이성으로 느껴졌던 건 아니었다. 그저 나이에 비해, 외모에 비해 성숙하고 단단한 사람이네? 정도의 호기심.
아무렴 회사라는 공간과 적지 않은 나이차이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지라 그저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업무적인 부분 이외 가끔씩 먹고 마실 것을 챙겨주기를 5개월. 확실히 하루 8시간 이상을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그녀도 나도 어느 순간부터 다소간 이상 기류를 느꼈던 것 같다.
운이 좋았는지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고 부푼 마음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는 어리고 예뻤음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동안 쉽사리 연애를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과거 연애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남자가 두려웠다고 했다. 그녀의 사주를 알고 나서야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의 문제점을 교정
하고 지적하고 바꿔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주. 사소한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HSP*
*HSP는 선천적으로 감각이 매우 예민하고, 감정 몰입 정도가 높으며, 심미안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함.
이러한 성격은 일적으로는 완벽주의 성향이 짙어서 인정받지만, 연인 같이 친밀한 인간관계에서는 쉬이 마음을 내주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럼에도 나이만큼 쌓인 적지 않은 연애 경험을 통해 으른 남자의 연애는 이런 것이다라고 우쭐거리듯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피어오른다.
그녀와의 연애는 비교적 순탄했다. 내가 조금만 더 이해하고 바뀌기만 한다면 말이다.
앞서 그녀는 문제점을 교정하는 것에 장점이 있다고 했던가. 나도 몰랐던 내 식사 습관을 이야기한다.
그녀 : 오빠 밥 먹을 때 쩝쩝거리는 소리 때문에 식사에 집중을 못하겠어요
나 : 그래? 알겠어 신경 써서 먹어볼게요.
어디 삼십 년 넘게 굳어진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나. 몇 번을 더 지적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고쳐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몇 개월 뒤 그녀는 두 번째 내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녀 : 오빠 수염 자국 있으면 나이 들어 보이니까 레이저 제모를 하는 게 어때요?
나 : 그래? 알겠어 피부과 등록 할게
사실 그녀의 교정 포인트는 처음엔 내게 와닿지 않았다. 속마음은 여태 그렇게 불편함 없이 살아왔는데 왜 이렇게 나를 바꾸려고 하지? 방어기제가 올라오기 다반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잘 지내기 위해서, 으른 남자는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해야 으른이지라는 말을 곱씹으며 생각 회로를 바꿔갔다.
그녀의 말은 사실 옳고 그름으로 따지면 정답에 가까운 말이었고, 실제로 그녀로 인해서 나는 더 나은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특이한 점은, 이전 글 들에서도 팔자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는 기간 동안 나 혼자 있을 때는 벌어지지 않는 일들이 여럿 연출되었다. 아마도 상관격 사주와 함께 할 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랄까.
식당에 방문하면 늘 그녀가 고른 메뉴에서 이물질이 발견되어 컴플레인 걸기를 다반사.
(혹은 같은 음식인데 그녀의 음식만 식어 나온다던가, 우리가 먼저 주문했는데 타 테이블부터 서빙이 된다던가..)
나와 함께 짙은 밤을 보낼 때면 우리 집 건물 화재경보기는 어찌나 눈치 없이 비명을 질러대는지. 뜬눈으로 그녀의 불안을 달래주던 숱한 나날들.
삼척의 어느 허름한 펜션에 방문했을 때, 펜션 현관문 위에 유리로 누가 본인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뒤로 비용이 들더라도 최대한 숙소는 번화가에 깔끔한 곳으로 잡았다.)
여느 연인들처럼 가끔 투닥거리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던 우리. 사계절을 보내고 그렇게 다음 계절을 마주할 찰나부터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로 번아웃이 오고, 그녀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아 조금씩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녀 또한 그녀의 방식으로 담담히 위로하고자 했지만, 문제해결능력이 장점이면서 동시에 공감에는 서툴렀던 그녀의 MBTI는 나와 같은 ESTJ였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따뜻하고 친밀한 대화는 사라졌으며 무거운 적막만이 공기를 메워가기를 수차례. 나는 그녀에게 권태기가 온 것만 같다고 말하고 서서히 사랑이 식어가고 있음을 은연중에 알렸다. 마치 "내일은 눈이 많이 올 테니 따뜻하게 입고 외출하세요"라고 알리는 일기예보처럼.
그녀와 충분한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무겁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지독히 꺼려하고 두려워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제들이 화두가 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본인이 공격받거나 비난받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녀와 헤어지기 직전, 비로소 나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고야 말았다.
"오빠는 가성비 남자 친구인 것 같아. 매번 데이트할 때 가성비만 따지는 사람인 것 같아."
본인이 비난받기 전에 나를 먼저 공격한 건지 그녀가 나를 만났던 기간에 느꼈던 말 못 할 응어리가 이때다 싶어 튀어나온 건지, 어쩌면 둘 다 팩트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은 내게 가장 슬프고도 저릿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녀는 이어서 말한다. "오빠와 함께 여행을 갔을 때 오빠가 다음날 같은 옷을 입는 것도 싫었고, 연애 초반에는 향수를 뿌리고 다니더니 이제는 관리를 안 하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라고.
미처 대비하지 못한 말 앞에 그대로 멈춰 선 나는 담담하면서도 울부짖듯 외쳤다.
"옷을 신경 못 쓴 건 맞는데, 내가 데이트 비용을 꽤 많이 부담했다고 생각한다. 만나는 기간 동안 옷 한 벌도 못 사지 않았던 걸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느냐고"
그 일이 있고 나서 채 한 달이 지났음에도 좀처럼 간극을 좁히지 못했던 우리는 그해 여름 여느 날의 일기예보처럼 끝내 남이 되고야 말았다.
혹자는 이야기한다. 우리는 닮기 싫은 사람의 모습을 닮아간다고.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께 원하는 것을 요구하자 아빠는 내게 말했다. "밤낮없이 일하는 거 안 보이냐고. 왜 아빠가 고생하는 건 알아주지 않느냐고".
나는 애석하게도 그녀를 통해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고스란히 마주한다.
헤어질 때 그녀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그녀로 인해 바뀐 내 모습이 나쁘지 않아서 고맙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그녀 또한 편지로 답을 한다. "날 위해 애써준 오빠의 예쁜 마음 고마웠어" 문장 말미 볼펜 글씨가 살짝 번져있었다.
사실 내 글들의 다른 이성보다도, 그녀가 먼저 화두에 올라야 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녀와의 이별은 당시에는 그다지 슬프지 않았었다. 며칠 전 업무 목적으로 꺼내 둔 녹음 볼펜에서 우연히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말이다.
아마도 오작동으로 우리의 일상 대화가 녹음이 되었던 것 같다.
24년 4월 여느 날,
그녀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 쉴 새 없이 조잘 재잘 내게 이야기한다. 한 껏 밝은 톤으로. 내가 저녁은 맛있는 걸 먹자고 이야기한 것을 보니 아마도 그날 점심 구내식당 메뉴가 그녀에게 흡족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와 헤어진 지 7개월.
이제 나는 타인이 쩝쩝거리며 식사할 때 여지없이 불편함을 느끼고, 더 이상 식당에서 실랑이를 벌이지 않아도 되며, 매 새벽 요란하게 울려댔던 화재경보기는 거짓말같이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레이저 제모 11회는 지난달에 끝났고, 매일 다른 옷을 입으며 다시금 향수로 내가 지닌 색깔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녀가 며칠 전 처음으로 꿈에 나왔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꿈속에서의 우리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다정했다. 마치 녹음 볼펜 속 그때의 우리처럼.
어제 새벽에는 나도 모르게 눈이 내렸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이내 곧 눈은 녹아내릴 것이다.
녹음 볼펜이 흩어진 줄 알았던 기억을, 밤사이 내린 눈처럼 다시 데려올 줄 누가 알았을까.
병오년을 맞이하기 전 엄동설한이 되어서야 나는 가장 뜨겁게 이별했고, 이제는 눈이 녹아내리기만을 기다린다. 아니, 어쩌면 너라는 계절이 이대로 영원히 녹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