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이면

by iinnocuous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소설 中 lunatic과 Insane에 대해서 구분한 내용이 있다.

Insane은 선천적인 정신병에 속한다면, lunatic은 달에 의해 일시적으로 정신을 빼앗긴 것.

19세기 영국에서는 lunatic이라고 판정받은 사람은 실제로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한 등급을 감형해 주었다고 한다. 그 사람의 책임이라기보다 달빛에 홀렸다는 이유로. 믿을 수 없겠지만 달이 인간의 정신을 어긋나게 한다는 것을 법률적으로 인정했다는 말이다.


밤하늘을 들여다 본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달이 떠있는지, 별이 떠있는지 알 턱이 있나. 어쩌다 한가위에, 또 어쩌다가 다른 날에 월식이니, 풀문이니.. 사람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에서 왁자지껄 달 얘기가 나오면 그제야 "으이구 평소에 하늘 한번 안 쳐다보는 양반들이 유난들은"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다가 이내 옥상으로 향한다. 아무 말 없는 달이 유달리 밝게만 느껴진다.


"달님 제 소원은요"


무신론자이지만 이럴 때만큼은 사뭇 진지해지다가, "진짜로 소원이 이루어지겠어 설마"라고 되뇌며 이내 발걸음을 돌린다.


가만 보자.. 예전에 내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달에 관한 명언을 올렸던 것 같은데..


[사람들은 달에 갈 생각만 하느라 자기 발 밑에 핀 꽃을 보지 못한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평소에 주변이나 잘 살피지 라며 시니컬하게 코웃음 치며 과거에 어떤 모습의 내가 있었는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슬쩍슬쩍 넘겨 본다.


어라.. 보름달 표면이 엄청 잘 보이는 사진이 하나 보인다. 아마 3년 전 갤럭시 S22 울트라로 100배 줌 해서 찍었던 사진인 것 같다. 또 다른 사진에는 보름달 반만큼 크기의 달 표면이 보인다.


어떤 달은 한 밤 중 만개한 벚꽃 사이에 걸터 있고, 또 어떤 손톱달은 퇴근길 해 질 녘이 아름다워 간직하고 싶었었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사진 배경에도 달이 있었네. 심지어 영화 E.T주인공 앨리엇이 자전거 바구니에 E.T를 태우고 보름달 앞을 지나가는 모습까지도.


알고 보니 내가 달을 참 좋아했었구나.

무기력했던 11월 초반과는 다르게, 중순과 하순을 거치고 나서 생각의 알고리즘의 급격하게 변했다.

내가 아무리 피하려고 애써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며, 내가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마음 가짐이 보다 더 확고해졌다고나 해야 할까.


11월 어떤 날엔 급한 일이 있어 부랴 부랴 잠옷을 화장실 세면대에 걸쳐 놓고 외출 후, 집에 되돌아와 다시 잠옷을 입는 순간에 내 몸에서 날 리 없는 좋은 향기가 물씬 풍겨온다. 잠옷 소매가 스쳐 지나가듯 디퓨저 스틱에 살짝 닿아 있었나 보다.


또 11월 어떤 날은 치킨이 너무 먹고 싶어서 수십 번 고민하다 배달시켰는데, 배달 시간 30분을 못 기다리고 잠들어버려서 다식은 치킨을 부여잡고 아쉬워했지만, 아침에 먹으니까 살은 덜 찌겠지라며 생각 회로를 바꿨던 기억.


청룡영화제 끝난 지 3일씩이나 지나고 나서 박정민 & 화사 퍼포먼스를 잠을 줄여가며 일주일째 수백 번 돌려보다가 회사에 지각할 뻔한 찔한 에피소드까지.


덧붙여 지금 당장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이 일로 말미암아 어떤 재밌는 에피소드가 생길지 기대되는 수준까지 희망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퇴근 직전에 갑작스럽게 회의가 잡히고 집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놓쳤음에도, 이상하리만큼 퇴근길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달을 봐서 그런가?


어쩌면 하루키 작가의 소설 1Q84를 읽고 난 후 그때부터 나는 달을 좋아했었나 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달빛에 홀린 lunatic 한 내 모습을 좋아했을지도. 여전히 온라인 게임 ID에, SNS ID에 lunatic이라는 단어를 포함시켜서 존재를 드러내고, 어쩌면 누군가는 내 ID를 보고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오글거리는 표현을 사용하는 허세충으로 볼 것만 같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달을 좋아한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자면, 나는 Insane이 아니라 lunatic에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적당히 감형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살짝 미친 것 같지만 어쩌면 미치도록 섬세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으려나. 혹여나 제가 평소 써왔던 글들과 결이 다르다면 오늘 밤엔 주 오랜만에 달을 마주 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P.S : 최근 챗 GPT에게 유행하는 명령어를 아래와 같이 입력해 봤다.

아마도 내 촉이 좋은 이유는 Lunatic이기 때문인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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