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때문이 아니라 생존 때문이다
지방의 산업 전략을 보면, 여전히 많은 지역이 특산물 중심의 구상에 머물러 있다.
전통적인 품목을 활용한 유통・관광・체험・홍보가 핵심이고, 정책과 예산, 마을단위 협업까지도 대부분 특정 작물이나 식재료를 중심으로 엮여 있다.
어떤 지역은 복분자이고, 어떤 지역은 김이거나 감귤이다.
그런데 질문이 하나 남는다.
“왜 여전히, 그리고 구조적으로 특산물을 중심으로 삼을 수밖에 없을까?”
“우리는 이것밖에 없잖아요.”
이 말은 자조가 아니라 현실이다.
지방이 특산물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생계 기반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특산물은 단지 자랑할 만한 지역 자원이 아니라 그 지역의 경제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산업 루트이다.
예를 들어, 한 지역에 특정 작물을 기반으로 한
[농가] – [가공업체] – [지역 식당] – [체험 업체] – [마을기업] – [유통 채널]이 연결되어 있다면,
그 작물은 단지 '상품'이 아니라 고용의 연결 고리이기도 하다.
국내 지역 농가 소득 구조 (농림축산식품부, 2023)
전체 농가 중 약 74% 이상이 단일 작물 중심 수익 구조
이 중 고령 농가는 생산-직거래-가공까지 분산되어 있는 경우는 20% 미만
지역별 특산물 종사자 비율 (지자체 R&D 정책보고서 기준)
완도(김): 인구 대비 약 17%가 관련 업종 종사
보성(녹차): 농가 기준 53%가 녹차 단일작물에 집중
영동(포도): 2022년 기준 전체 농가 중 약 63%가 포도 중심 생산
즉, 하나의 특산물이 흔들리면 한 지역의 경제 생태계가 함께 흔들릴 수 있는 구조이다.
특산물에 대한 행정 지원은 단순 마케팅을 넘어서 지역 예산, 지원사업, 교육훈련, 유통망, 전시회, 국제 교류까지 전방위적으로 얽혀 있다.
어느 날 “이건 이제 경쟁력이 없으니 줄이자”는 말은 “그동안 투자한 수억 원의 지원 구조를 정리하자”는 말과 거의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장 생계를 특산물에 의존하고 있는 다수의 주민이 그 전환을 감당할 수 있는 시간과 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행정과 정책 설계자들이 자주 말한다.
“이제는 새로운 지역 브랜딩이 필요하다.”
“더 이상 특정 품목 중심 전략은 낡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꽤 동의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 논리가 지역에 도달하면, ‘우리가 잘해왔던 걸 버리라는 말인가?’라는 감정과 충돌하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특산물은 더 이상 ‘제품’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쌓아온 기억, 투자, 실패, 수고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환 논의는 자주 감정적 저항과 맞닿고, 현실적으로는 움직이지 못한 채 ‘조금씩 줄여나가자’는 식의 소극적 조정에 머무르게 된다.
특산물 전략의 문제는 그것 자체가 아니라, 그 외의 생계 구조가 설계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전환은 “이걸 버리고 저걸 하자”가 아니라, “이 위에 무엇을 더할 수 있는가”라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특산물은 산업의 종착점이 아니라, 지역 경제가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특산물 중심 전략이 낡았다는 말은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낡음’을 넘어서는 대안을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지역은 많지 않다.
특산물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연결된 구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환은 무엇을 버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덧붙이고 확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설계로 접근해야 한다.
정체성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선 먼저 생계의 구조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시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