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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을 설계하는 사람 : 지역형 매개자

제도와 지원으로는 부족한 그 다음의 이야기

by 이니프

지방 청년 창업은 제도적으로 다양하게 설계되어 있다.
지자체는 창업지원금, 공간, 컨설팅, 네트워크 구축 프로그램 등 다양한 정책을 제공한다.
그러나 창업 이후에도 그 지역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청년은 드물다.

프로그램은 종료되었고, 정산도 완료되었지만 왜 사람은 떠나는가


정착은 창업보다 복잡하다.
그곳에서 산다는 전제 아래, 일과 사람, 제도와 일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설계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설계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있다.
이름은 없지만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 우리는 그들을 ‘지역형 매개자’라고 부른다.


제도는 있지만, 설계자는 없다


지방 창업의 실패는 자원 부족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창업의 초기 단계에서는 다양한 제도적 지원을 받는 것이 수도권보다 수월하다.

하지만 이후의 지속성은 제도의 손이 닿지 않는 지점에서 무너진다.

외지 청년에게 지역은 행정적으로는 열려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낯설고 불투명하다.

지역민과 연결되지 못한 청년은 ‘기회는 있었지만, 뿌리는 없었다’는 말과 함께 지역을 떠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정착 설계자다.

그는 행정이 놓치는 틈을 메우고 지역사회와 외부인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설계해 내는 중간자다.


지역형 매개자가 하는 일: 정착을 위한 실무 설계


‘지역형 매개자’는 특정 직함이나 조직에 속하지 않아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역할을 통해 지역 정착을 실현 가능하게 만든다.


1. 제도와 현실 사이의 조정자

정책은 있지만 현실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다르다.

지역형 매개자는 정책과 청년 사이의 실무 간극을 좁히는 실질적 조정자다.

청년 창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업비 항목 분류, 정산 방식, 행정 용어 등을 실무 언어로 풀어준다.

“임대료는 지원 안 됩니다” 같은 말 대신, 기존 항목을 어떻게 조정하면 실질적으로 공간 사용이 가능한지 함께 검토한다.

공간 사용 시 계약서 작성, 농지 전용, 지역 주소지 전환 같은 관계기관 협의 과정을 동행하거나 사전 정리해 준다.

필요한 서류가 바뀌었을 때 공무원의 입장과 청년의 현실 사이를 조율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만든다.

이 역할이 없다면 청년은 ‘지원은 있는데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느끼고,
스스로 포기하는 길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


2. 관계적 경로를 설계하는 연결자

정착은 행정적 절차가 아니라 사회적 승인 과정이다.

지역형 매개자는 청년이 지역 커뮤니티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사회적 진입 경로를 설계한다.

청년이 지역 행사에 처음으로 등장할 때 동행자가 된다.
누군가 먼저 “이 사람은 여기에서 함께할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역할이다.

마을 이장, 지역 농민회, 협동조합 등과의 첫 만남을 주선할 때,
단순 소개가 아닌 청년의 맥락을 미리 설명하고 신뢰를 얻는다.

청년이 지역 자원을 활용하고 싶어 할 때, 예를 들어 농산물 가공, 전통시장 입점, 지역 브랜드 협업 등을 제안할 때, 기존 질서에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가교 역할을 한다.

필요시 갈등 중재자가 되어, 청년과 지역민 사이의 문화적 충돌을 설명하고 완화한다.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접속 가능성을 설계하고 조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3. 실패 이후를 감당하는 후견자


지속 가능한 정착은 실패 이후에 결정된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 계속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에 따라 창업자의 방향이 달라진다.

실패한 이유를 심리적으로도, 실무적으로도 분석해 주고, 재도전 가능한 경로를 정리해 준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지역 행사, 소모임, 네트워크 자리로 연결해 주면서 청년이 지역 커뮤니티의 ‘게스트’에서 ‘구성원’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청년이 겪는 고립감, 지역 내 갈등, 가족 문제 등 공식화되지 않은 변수까지 함께 견디는 비공식 후견인이 된다.

이 역할이 없다면 실패는 곧 이탈로 이어진다.
정책이 닿지 않는 시간 속에서 정착을 설계하는 존재, 그것이 지역형 매개자다.


지역형 매개자의 조건 :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렇다면 이런 역할은 어떤 사람이 수행할 수 있을까?
단순한 ‘정보 브로커’나 ‘인맥 보유자’는 아니다. 지역형 매개자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지속성 : 단기 외주가 아닌, 지역에 계속 존재하는 인물일 것

신뢰성 : 지역 내에서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된 신뢰를 갖고 있을 것

균형감각 : 공공과 민간, 청년과 지역민 사이를 공정하게 조율할 수 있을 것

이해력 : 외지 청년의 말과 속도, 감각을 열린 태도로 수용할 것

실행력 : 실제로 연결하거나 자원을 설계할 수 있는 실무 능력이 있을 것

이 조건은 외부에서 파견한 인재로는 채워지기 어렵다.
지역을 오래 살아낸 사람, 그리고 그 시간을 타인과 나누려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지원 이후를 설계하는 사람

지역 창업은 이제 단기 성과로 평가될 수 없다. 정착의 지속 여부가 정책의 성패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 지속성은, 결국 사람이 설계하는 문제다.

“이 지역에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이 질문이 창업 가능성을 묻는 새로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제도는 틀을 만들지만, 살아 있는 연결은 사람을 통해서만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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