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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i were there Mar 15. 2022

U턴의 변명

[02] 서울 쥐와 하동 쥐 이야기 - 하동 쥐 편

[편집자 주]

"서울 쥐와 하동 쥐 이야기"는 서울 쥐와 하동 쥐의 주고받는 편지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서울 쥐와 하동 쥐는 둘 다 지역을 위한 연구 및 실행을 수행하며 살다, 서울 쥐는 여전히 그 일을 하고 하동 쥐는 지역 현장에서 새로운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진 둘의 푸념들이 여러 청년(혹은 중년)들에게 조그마한 즐거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적어봅니다.

이번에 싣는 2번째 글은 하동 쥐의 이야기입니다. 해당 글은 하동 쥐가 운영하는 경쟁사 블로그에도 공동 게시될 예정입니다. 부디 즐감하시길~




어제는 지리산학교 사진반 출사가 있는 일요일이었어. 차를 타고 모임장소로 향하는 섬진강변에는 습기를 잔뜩 머금은 뭉게뭉게 구름이 해드는 방향으로 흘러드는 게 딱 봄비 맞기 좋은 하루겠구나 싶더라고. 동트기 전의 어스름함과 비오기 전 들숨과 날숨 사이로 전해지는 그 어떤 잔잔함이 기대되는 건 모처럼만의 출사였기 때문이야. 모처럼만의 만남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말이지.


3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매화가 하동에도 광양에도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뜨려 온 사방이 은은함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어. 봄의 시작을 저절로 받아들이게 되는 빼박 향기랄까. 머지않아 서울에도 그 향기가 퍼져 가겠지! 너의 가내가 안녕하도록 말이지! 주말까지 바쁜 업무로 출근을 해야 한단 소식에 잘 지내고 있겠구나 넘겨짚어 안부인사쯤은 묻지도 않으련다.


막상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야길 풀어보자 했지만 쉬이 일이 써지지 않는 건 글이라는 수단이 주는 무게감 때문인가 싶다. 그럴싸하게 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일까? 아님, 나의 이야기를 온전히 전하려는 그 욕심 때문일까? 그 어중간함의 경계처럼 어제 날씨도 그랬었지. 비가 오기 전까지의 그 먹먹함, 하지만 비가 오고서야 훈풍을 전하는 봄비였단 반가움이 시간을 경계삼아 뭔가 태세 전환이 일어났구나 싶더라. 결국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고 사진을 찍느라, 아니 실은 봄비 머금은 꽃놀이에 빠져있다가 신난 마음에 낮술과 벗 삼아 낮잠까지 자게 됐지. 그 덕분일까 으슬으슬함이 전해져 저녁까지 이불을 끼고 있어야 했어. 그렇게 미뤄둔 글을 쓰기 시작했어.


뭔가 의도치 않는 것, 그저 상황에 따른 의식의 흐름을 맡겨보는 내가 되는 것, 그것이 네가 물었던 지역으로의 회귀에 대한 오늘만의 답변이 아닌가 싶다. 딱히 거창한 삶의 꿈꾸고 싶지 않았어. 나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일지도 몰라. 큰 꿈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해보고 싶다던 겁쟁이가 막상 서울에서의 삶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단 사실을 받아들인 거라고 할까? 그래, 더 솔직히 말해서 그냥 뭔가 두렵고 무섭더라. 시골 촌뜨기가 대략 10년쯤 서울에 살다 보니까, 독해져야 하는 내가 싫었다고나 할까? 강대강의 부딪힘이 아니라, 강물이 바다를 거스르지 않듯 묵묵히 흘러가는 길을 택하기에는 자연과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지 싶어.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거창하게 나를 표현해줘서 고맙다. 우리가 살아가는 어디에서든 지역에 대한 고민은 항상 했지만, 혁신적이거나 선진의 사례들을 찾고 연구해 그것을 현실에 접목하는 일을 도시에서 하기에는 나의 그릇이 모자람을 인정해야만 했어. 그렇다고 이 일을 하지 않겠다거나 내가 모자라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야. 다만 우리가 함께 했던 조직이 찾아가고 고민하고 제안했던 사례들을 내가 살아가는 곳에서 조금은 더 적극적인 주민의 입장으로 실행해 보고 싶다는 방향성, 범위를 나에게 좀 더 맞추어 정착을 마음먹었다고 말하고 싶어. 


그런 의미에서 네가 말하는 도시에서 기생하는 삶에 대한 변명을 내가 대신해보자 싶어. 

나같이 살아가는 이들, 또 지역에서 새로움을 찾는 이들에게 대안이 되는 정책들을 발굴하고 제안하는 그 중한 일을 너가, 같이 일했던 우리 조직이 해오고 있는 거 아닐까? 지역에 정착해 지역만의 정책을 만들어가는 것이 이상적으로 좋은 거라지만, 개입한 그만큼 객관성을 잃은 정책이 나오거나 다른 지역에 접목하기에는 그 일반성을 잃겠다 싶기도 해.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양성을 위한 근본적인 원칙이 되어 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너의 일은 아닐까 싶어. 기생이라고 자위하는 너에게 굳이 그 자위를 자부하라고 하고 싶네!


하동에 들어와 살아온 지 4년 차, 그간 우리가 함께 일하면서 행정에 접목하고 연구했던 몇 가지 행정혁신 사례들을 내가 사는 시골에서는 어떻게 접목하고 있는지 찾아보았어. 주민참여예산사업이나 협치, 주민자치회 사업, 도시재생사업, 청년정책사업 등등 주민이 주인이 되고 행정 또한 함께 책임을 지는 그런 관계, 누구나의 참여가 근본이고 필수였음에도 시골지역을 들여다보면 그것을 추진할 주체인 주민들의 역량 부족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곤 했어. 근데 서서히 그것이 바뀌는 느낌이 들어. 


언급했던 사업들의 근본적 방향성에는 공동체가 함께 우리가 사는 곳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라고 봐. 이미 다른 형태로 주민의 입장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거야. 다만, 정주인구의 고령화와 전입인구가 부족한 지역의 현실적 여건상 새로운 참여 주민의 활동을 활발히 격려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던 거고. 

그와 함께 새로운 정책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쩌면 도시형 정책은 아닌가 싶어. 그러한 정책이 다양한 주민의 목소리를 듣고 다양한 의사결정구조를 가지도록 한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도시적 입장이었다는 생각이 들거든. 지역 중에서도 인구가 적은 지역, 젊은 세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역에서는 그런 구조가 애초에 힘들어. 


좋은 혁신사례들이 지역에 들어와 지역만의 것으로 변화할 여유를 가지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껴. 그간 나 같은 얼뜨기들이 중앙중심주의에 빠져, 왜 서울처럼 우리는 하지 못할까란 답답함만 표출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중앙 사대주의 서울 사대주의에 빠져있었던 건 아닐까?


니가 감히 언급한 신영복 선생님의 “변방을 찾아서”란 책의 한 대목이 떠올라.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가장 결정적인 전제가 있다.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콤플렉스가 없어야 하다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변방은 그야말로 변방에 지나지 않는다. 중심부에 대한 허망한 황상과 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변방은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하고 교조적인 틀에 갇히게 된다.

또 하나 더.


이번의 변방을 찾아서라는 기획은 바로 감성적 관점을 반성하려는 것이다. 변방을 낙후되고 소멸해 가는 주변부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전위를 읽어 냄으로써 변방의 의미를 역전시키는 일이 과제가 될 것이다.... 공간적 의미의 변방이 아니라 담론 지형에서의 변방, 즉 주류 담론이 아닌 비판 담론, 대안 담론의 의미로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민하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는데, 쓰다 보니 이 글이  마음해우소가 된듯한 느낌이 든다. 막혀있던 뭔가를 배설한 이 기분이 드는 건 뭘까? 네게 하고 싶었던 말을 마구 쓰다 보니, 뭔가 내 마음이 한 단계 정리한 느낌이 들어버렸거든. 그렇게 서로 자신의 입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싸우기 일쑤였는데, 문득 그 시간이 그리워진다. 거친 싸움이 아니라, 생각차에 대해 확인하는 시간, 그 차이가 뭔지 서로 묻고 목소리를 높이는 시간, 서로를 비난하면서도 다음날 아침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로 사과하는 시간, 그 하나하나의 시간들이 그립다. 


그렇게 물었지만, 또다시 묻고 싶은 것이 문득 생각났어. 

우리가 함께했던 조직에서 누군가가 너를 비난할 줄 알면서도 그렇게 목소리를 내는 너는 왜 그런 입장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거니? 너는 타인에게 친절하면서도 뭔가 비난받고 싶어 하고, 뭔가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듯한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어. 게다가 그럴 줄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그 변태성은 또 어디서 오는 거니?

물론 그런 너이기에 지금도 이렇게 친구라고 말하며 너를 욕할 수 있을 만큼 애정 하기에 묻는 거란 걸 알리라 믿어.


한창 언쟁하던 너와 지금의 너는 또 어떤 다른 변명을 늘어놓을지 궁금해!


코로나가 바로 우리 옆에 와있는 듯해. 오미크론에 걸리더라도 이불 꽁꽁 한 이틀 싸매고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봄이 되길... 가내 평안하길... 




[작가 주] #지리산학교란?

지리산권역 내 하동 근교의 지역주민과 예술가들이 만든 생활문화 공동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숲길 걷기, 민화, 숲길 걷기, 브런치 만들기, 인형 만들기, 목공예, 프랑스 자수, 퀼트, 가죽공예, 발효 산채요리, 글쓰기, 그림, 산야초 야생화 알기, 태극권 등등을 주제로 귀촌인과 원주민들, 예술가들이 함께 놀고 배우는 우리만의 학교지. 동호회도 아닌 것이 학원도 아니고 딱히 규정지을 필요는 없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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