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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i were there Aug 11. 2022

있지도 않은 경고

[09] 서울 쥐와 하동 쥐 이야기 - 서울 쥐 편

[편집자 주]

"서울 쥐와 하동 쥐 이야기"는 서울 쥐와 하동 쥐의 주고받는 편지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서울 쥐와 하동 쥐는 함께 지역을 위한 연구를 하다가 만났습니다. 서울 쥐는 여전히 서울에서 비루한 삶을 살고 있고, 하동 쥐는 지역 현장에서 새로운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진 둘의 푸념들이 여러 청년(혹은 중년)들에게 조그마한 즐거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적어봅니다.


이번 아홉 번째 글은 서울 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편지들은 본 브런치와 함께 하동 쥐가 운영하는 경쟁사 블로그에도 공동 게시될 예정입니다.






네가 씻김과 고착화된 생각을 동시에 마주했던 그곳에서 나 역시 어떤 씻김을 만끽했어. 내가 너무나도 싫어하는 여름이었지만 너무나 좋았다. 덕분에 나 역시 뭔가 시원해짐을 느꼈다.


오랜만에 가까운 사람들과 네가 있는 곳으로 가서 너무 좋았어. 물론 언제나처럼 술만 부어라 마셔라 하느라 깊이 있는 이야기는 시작도 못했지만 말야. 유독 나이를 얼마나 먹든 요즘 무슨 생각을 하던가와 상관없이 우린 술을 참 잘 마시는 것 같아. 예전처럼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니 쉬이 지치지만 말야.



이번 만남에서 네가 나의 글을 성토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네가 쓴 말을 잘 읽지도 않고 내 이야기만 한다고 말야. 반은 맞고 반은 틀렸거나 오해이니 그냥 한 귀로 흘려보내고 내가 할 말만 해볼게. 농짓이고, 이번엔 네가 지난 글 말미에 남겼던 이야기들을 나도 한 번 고민해보면서 답신을 해보고자 한다.


돈이란 무엇일까. 물론 가끔 주식 이야기에 열을 올리기는 하지만 우린 여전히 돈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네 집 책장에 먼지 쌓여가는 자본론을 통해 자본의 무자비함, 자본에 의한 불평등과 그에 따른 사회문제, 사회변혁을 위한 활동 등에 대해서는 날이 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지만 '돈'이라고 하면 우리 둘 다 헛제삿밥 먹는 구한말 양반들마냥 뒷짐만 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네.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우리 둘 모두 '돈'을 대하는 태도는 비슷한 것 같아.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그렇게 얽매이지도 않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렇게..


그런 우리였는데 네가 쓴 글의 네 상황과 같이 나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다만 너는 현실적 어려움에 직면했는데, 나는 아등바등 서울살이가 안겨줄 가까운 미래의 어려움을 앞서 맞는 선행학습(?)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게 다른 점이랄까.


우리의 생물학적, 아니 사회적 나이가 만들어 내는 여러 상황들은 우리에게 일종의 '어려움'을 안겨주는 것 같아. 그건 (네 워딩을 빌려보면) '있지도 않을' 어려움일 수도 있는데 말야. 사실 있지도 않다는 것은 비겁한 회피이고 우리 앞에 있는(을) 어려움은 너무나 명징하다. 가끔은 두렵다. 너도 알다시피 나라고 무슨 벌이가 매달 언발에 오줌 누고 있는 형세이니.


그래서일까. 나 요즘 가까운 미래를 조금씩 떠올리고 다가가다 보니, 폭포 곁 '내려가지 마시오', '기대지 마시오' 등의 경고가 눈앞에 펼쳐진다. 물론 경기장 밖에서 나를 본다면 분명 현재의 행복한 순간과 아름다움들이 워낙 커서 그 경고가 '있지도 않은 경고'라고 쉬이 말할 테지만, 당사자인 나는 '있는 경고'라는 게 참 씁쓸하다.


하지만 또 네 폭포 맞이의 경험에서 배웠듯이 그 경고의 '있음'은 그저 내 고착화된 생각이 만들어낸 사실 '있지도 않은', '존재하지 않는' 경고가 아닐까라는 희망도 든다. 넉넉함과 풍족함에 둘러싸인 삶도 분명 좋겠지만, 지금처럼 조금씩 힘들고 조금씩 부족하더라도 떨어지는 폭포를 맞으며, 흐르는 계곡물에 발 조금 담그고 차가운 맥주를 데워(?) 먹는 것만으로도 (있다고 의심이 되는)경고의 '희석'을 맞이한달까. 나이가 불혹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전히 생각은 이팔 본전이다.


글을 마무리하려고 하며 생각해보니, 내 예민함과 고민의 소용돌이들은 내 상황과 상관없이 계속 존재하고 있구나 라는 걸 또 여지없이 깨닫는다. 며칠 전만 해도 수많은 과업 속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야근을 하며, 수많은 담당자들과 기싸움 아니 비루한 을(乙)질을 시전 할 땐 내 어떤 '마지막'에 직면했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형태의 미래를 고민하고 그 경고들을 어찌 해석할지를 고민하고 있네.


상황이 호전되어도 나는, 아니 어쩌면 우린 끊임없이 생각할거리, 고민할 거리를 만들어내는 걸까. 경고는 차치하고 사실 우리에겐 아무 문제도 없는 게 아닐까. 사실 우린 평범을 넘어 '어떤 문제도 없는' 엄청난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게 아닐까.


헛소릴 하는 거 보니 진짜 마무리해야겠다. 말복이 지나면 이 여름의 기세도 물러나겠지. 당분간 네 덕분에 만끽한 계곡이 시원함의 기억을 동력으로 이겨내 보련다.


기후위기가 우리 삶을 앗아간다. 뭐라도 하자. 너는 거기서. 나는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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