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콩달콩 이야기만 전달할 수 없다

마을-지역신문에서도 지역 공동체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

by 권단

#1.알콩달콩한 이야기만 전달할 수는 없다. 아름답고 선한 이야기만 할 수는 없다. 좋은 생각만 한다고 세상이 좋게 변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비춰져야 내 삶에 녹아든 거품을 걷어낼 수 있고 현재 위치를 재정립하고 성찰이란 기능이 작동될 수 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그냥 스킵하려 할 때 비극은 잉태되고 파국은 바로 저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다. 언론의 기능이란 본시 그런 것이다. 비판의 기능이 고장나고 감시의 역할이 상실됐을 때 본능적으로 넘쳐나는 권력과 자본의 부조리와 부패는 스미고 번지듯 양산될 것이다.


#2.지역에서 언론을 한다는 것은 더 많은 윤리성과 고민이 요구된다. 삶이 맞부딪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골 농촌에서 기자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지역 출신이라 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지연, 혈연, 학연과 무관하게 누구를 비판한다는 것은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인구와 좁은 생활권에서 하루에도 몇번씩 마주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는 것은 사실 스스로의 관계를 갉아먹고 정서적 타격을 입히는 일이다. 때론 내 이웃이, 같은 동호회를 하는 사람들이, 내 아이의 친구 아빠와 엄마가 비판의 대상에 오르기도 한다. 비판 기사를 쓰면 관계는 서먹해지고 어색해지는 것을 넘어서 끊어진다. 나 뿐 만 아니라 가족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사실 큰 부담이다. 익명성이 남아있는 도시와는 달리 사실 시골 농촌에 산다는 것은 투명한 유리상자에 사는 것과 같다. 내 삶이 노출되며 관계망속에서 회자된다.


#3.지역 출신이 아니더라도 지역에서 5년 이상 굴러먹다보면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자유로워지기 힘들다. 만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른 정보들이 들어오고 어떤 정보가 장착되느냐에 따라 기사의 방향이 달라진다.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하고 친해지기 시작하면 그들의 논리를 내재화되기 쉽고 질끈 눈 감고 하나둘 넘겨버리다보면 사실 그것은 언론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늘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불가근 불가원,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그 특유의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사실 힘이 드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스로를 보호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여러번 비판 기사를 쓰고 삶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을 경험하면 스스로의 보호막을 작동하기 시작한다.


#4.보수적인 어떤 틀에서 각을 세워 이야기 하기는 어렵다. 옥천신문이 도매금으로 비난 받을 여지가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사가 외부에 알려져 외화되기 시작했을 때는 더 많은 비난에 직면하고는 한다. 옥천 출신도 아닌 사람들이 기자가 되서 옥천 망신을 시키고 있다는 이 말이 평소 옥천신문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급속도로 확산된다. 지역일 수록 어떤 피해의식이 사실 작동하고 그것이 지역 안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외화되며 외부 세력에 의해 감놔라 배놔라 할 상황이 되면 극한 반응이 사실 발견되곤 한다. 우리 일은 우리끼리 해결하려는데 왜 니들이 뭐라 그러느냐는 프레임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면 내부 논리와 결속력이 연동되며 또 먹히고는 한다. 이것은 지역을 또한 갉아먹는 지점이기도 하다.


#5.시대가 변하고 프레임도 달라지고 있다. 20년 전 옥천신문은 지역 학교에서 서울대를 간 학생을 별도로 인터뷰 해줬다면 그 이후에는 고등학교 입구에 서울대 펼침막을 건 것 자체를 인권침해 사례로 문제 삼아 보도했다. 물론 서울대 인터뷰는 없어졌다. 당시 서울대에 자녀를 보낸 학부모가 신문사에 찾아와서 왜 우리 아이를 욕보이게 하느냐며 신문을 박박 찢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기억한다. 비판을 별로 받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저항이 극렬하다. 주로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배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인적 네트워크가 누구보다 화려하고 많다. 그래서 옥천신문을 욕하는 목소리는 급속도로 확장된다. 여론을 조성하고 또 신문을 끊거나 광고를 해지하는 물리적 행사를 하는 것은 사실 일상다반사다. 신문이 나오는 금요일에 욕지거리를 듣는 것은 일상이 되어 있다.


#6.지역이 좁다보니 사람이 많지 않다보니 슈퍼마켓에 갈 때도 식당에 갈 때도, 쓰레기 분리수거를 할 때도 공무원도 수시로 만나고, 의원이나 지자체 장, 그리고 단체 회장도 많이 본다. 분리와 격리되지 않고 삶의 현장속에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직접 민주주의의 중요한 단초이고 장점이기도 하지만, 늘 비판을 하는 입장에서는 껄끄럽고 불편할 수 있다. 그리고 싫어한다는 눈빛은 워낙 강렬하여 뚫고도 남는다. 신문을 비판하는 논리는 거의 유사하다. 이렇게 크게 다룰 사안이었는가. 왜 대안 없이 비판을 하는가? 왜 옥천 망신을 시키는가. 어떻게 책임지고 누가 수습을 할 것인가? 그리고 이것 말고도 얼마나 문제가 많은데 왜 이것만 보도하는가? 이 보도로 인한 명예훼손과 피해를 받는 이들을 생각하지 않는가?


#7.옥천신문 청소년 기자단은 그래서 현재 교육에서 실종된 비판적 사고를 가르친다. 이것이 미디어리터러시의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냥 수다나 뒷담화로만 풀지 않고 공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시민으로서 자리매김하는 연습과 노력을 하는 셈이다. 글을 어떻게 풀어쓰는가도 중요하지만,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도 훨씬 중요하다. 그런데 비판 기사를 쓰면 학교에서 일단 난리가 나고 이차로 학부모들이 그거 당장 끊으라고 하는 사례도 종종 있다. 어렸을 때부터 기사를 쓰면서 표현의 자유와 언론 탄압을 몸소 겪고 심각한 타격을 입기도 한다. 뭐 이런 식이다. 앞선 논리와 비슷하다. 왜 학교 일을 학교에서 해결하지 않고 왜 기사를 통해 써서 학교 망신을 시키느냐. 너 상의하지 않고 이렇게 기사를 쓰는 것은 친구들과 학교한테도 문제가 될 수 있는 거다라는 식으로 학생들을 겁박한다.


#8.지난주에 야간자율학습을 강제하는 고등학교 교사의 강압적인 고시문, 거의 겁박에 가까운 고시문을 보고 학부모와 학생들이 놀라서 신문사에 제보를 많이 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느냐는 하소연과 분개에 찬 목소리들이 많이 들렸다. 이것을 기사화했고 기사화한 이후에 또한 항의전화도 많이 받았다. 지역 고등학교 명문고로 키워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학교 망신 시키면 수습하고 다시 재기하기 힘들다. 다니는 학생들은 뭔 죄냐. 비판을 키워서 학생들 좋은 대학 못 가면 옥천신문이 대신 책임질거냐. 뭐 이런 말들. 한치도 비켜가지 않는 동일한 레퍼토리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생각의 다양성과 각자 서 있는 위치와 생각하는 지점들이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옛날에는 목소리를 높여 같이 맞대응하는 일이 많았으나 요즘에는 항의전화를 받으면 조용히 들어주고 있다.


#9.그런데 기사가 난 후 여론광장에 올라온 청소년 기자단 운운하면서 이들이 제보한 것 아니냐는 뉘앙스, 마치 쁘락치를 심어놓고 학교 비판 거리를 찾는다는 이런 방식의 비판은 용납하기 힘들다. 진실은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일이다. 그는 또 이렇게 썼다. 필명도 무려 '진실'이다. '직접 기자가 들어가 본 것도 취재한 것도 아닌데 외부로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전파된 것인지 모르겠지만(혹 청소년 기자단?) 학교를 선생님을 징계하라는 취지의 기사와 외부 지역의 이름도 모르는 단체의 의견으로 과격하게 옥천의 학교와 교육현장을 무너트리려는 이런 기사는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떨어진 학업력 상승시키자고 옥천군에서도 학교 교육 현장에서도 큰 성찰의 파도가 일어나고 있는 요즘인데 학교 야간자율학습에 옥천신문은 여기 분들이 아니라 너무 부정적인 것 아닌가요?' '이젠 험악하게 보도되는 내용의 폄 옥천교육, 학교 기사로 인하여 옥천교육의 발전과 이미지가 이제그만, 훼손되어지지 않도록 어떤 대책을, 행동을 권고들을 보여주셔야 할 시점인 것 같은데'' 이런 글이 나오는 것도 사실 예상되어지는 부분이었지만 마음이 아팠다.


#10.그럼에도 이 글에 많은 댓글이 달렸다. '옥천에서 초중고를 다 나왔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율이라는 말로 강제하는 타율학습에 대해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학생 입장에서 야간타율학습시간은 강제로 붙잡힌 시간이었습니다.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 교육이 어떻게 재대로 된 교육이라고 생각하시는 지 오히려 작성자분께 묻고 싶습니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어른들이, 그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공개된 곳에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저런일이 아직도 생겨나는 겁니다. 설사 저렇게 자율학습을 하면 애들 성적이 올라가나요? 애들 성적이 올라가더라도 그렇게 오른 성적이 아이들의 자율성과 인생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까요? 교사는 성적을 올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지요. 혁신학교 왜 합니까? 줄 세워서 서울대 보내는 게 최고라는 사람들만 모여 있었으면 혁신학교 왜 필요한가요? 기숙형 입시 학원을 만드시죠. 차라리' 이런 댓글들의 힘이 옥천신문을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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