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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신문이란 무엇인가?

by 권단

#1.보통 풀뿌리 신문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지역주간신문’이 보편적이다. 재정과 인력상황 때문에 지면으로 못 내보내고 인터넷으로 운영하는 신문사도 있고 격 주간, 혹은 한달에 한,두번 지면 신문이 나오는 곳이 있다. 하지만, 시군단위 풀뿌리 언론과 광역거점단위 지방일간지는 지역을 대하는 방식이 정서적, 체계적으로 다르다.

지방 일간지는 보통 광역거점에 본사를 두고, 시군 기초단위 지역에 주재기자를 두는 방식으로 지역을 커버한다. 서울과 지방의 위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지방 안에서도 광역거점과 기초단위지역의 위계는 그만큼 존재한다. 거점이 중심이고 그 외 지역은 변방인 셈이다. 지방일간지가 광역거점도시 소식을 중심에 두고 그 외 지역의 기사들을 주재기자들이 시군에서 매일 발행하는 보도자료 중심으로 챙긴다면, 지역 주간지는 사는 지역이 중심이기 때문에 보도 자료보다는 생활속 발굴 기사를 더 챙기게 된다. 물론 지역주간지도 면보다는 읍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지방일간지와 규모 말고 뭐가 다르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시군 단위 기초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안다. 자동차로 30분 이내의 지역은 그야말로 초밀접 생활권이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 훌쩍 갈 수 있는 그런 곳이기 때문에 차원이 다르다.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동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밀착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거리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형성된 유구한 전통과 지속된 관계를 아무리 날고 기는 뉴미디어라도, 그리고 서울에서 온, 광역거점도시에서 온 이름있는 레거시 미디어라도 넘지 못하는 선이 분명 있는 것이다. 일간지 등 기존 레거시 미디어들이 체계를 우려먹고 산다면 풀뿌리 미디어는 관계 안에서 뿌리내리고 성장한다. 건강한 풀뿌리 언론은 주민들의 필요 속에 생존하기 때문에 필요를 잃어버리는 순간 그냥 그저 그런 사이비 언론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처럼 지역주간지 중에도 사이비 신문이 즐비한 지역도 많다. 언론사 간판 걸어놓고 정치놀음하려고 하는 신문도 참 많다. 우후죽순 사이비신문이 창궐하는 지역보다 차라리 없는게 나을 수도 있다. 말과 글을 왜곡하는 것은 민심을 어지럽히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지역은 과잉과 결핍으로 고통 받는다. 어떤 곳은 사이비신문의 범람으로, 어떤 곳은 지역신문이 하나도 없어 언론의 사막화로 권력이 전횡을 휘두르면서 힘들다. 지역신문은 취재기자 하나하나가 일당백이고 힘이다. 보통 옥천, 보은, 영동군 세 지역을 연합뉴스 기자 하나가 커버한다. 그런데 옥천 한 지역을 옥천신문 기자 10명이 커버한다. 저인망으로 쫙 기사를 아래로부터 훑기 때문에 기사의 깊이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굳이 ‘특종’과 ‘단독’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다 특종이고 단독이기 때문이다. 제보와 민원이 이미 몰리고 있고 밑바닥 기사를 싸그리 훑고 지내기 때문에 기성 언론이 외면하는 특종은 사실 풀뿌리신문에 즐비하다. 눈 밝은 지방일간지나 방송사 기자, 또는 작가들은 그래서 지역신문을 구독한다. 특종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대충 매주 훑어도 그냥 그대로 써도, 아니면 조금만 발전시켜서 써도 좋은 기사가 나올 것이 분명한데 이들은 지역에 오지 않는다. 주재기자들은 보도자료 챙기고 광고 관리하는데 여념이 없고 거점에 있는 기자들은 거기서 나오는 소식 챙기기도 버거우니 사실 지역은 기존 레거시미디어의 저널리즘 방임지역이다. 그 틈새를 지금 수십년 동안 주민 속에서 뿌리내린 풀뿌리언론이 커버치고 있는 것이다.


#2.광역에는 일간신문이 있는데 주로 도청이나 광역시청이 있는 거점도시 소식을 주로 다루고 각 시군에 주재기자를 파견하여 그냥 기사들을 추수한다. 구색을 맞추고 일간형식으로 발행하는데 다른 시도는 모르겠지만, 충청도에서는 거의 구독을 하지 않는다. 관공서 아니면 돈을 주고 사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네이버 뉴스 검색을 해봐서도 알겠지만, 네이버나 구글, 다음에 '옥천'을 치고 뉴스 검색을 해보면 똑같은 뉴스들이 줄 나래비로 10여개씩 매체 이름과 기자이름을 달리 한채 묶음으로 나온다. 100% 관공서 보도자료라고 보면 된다. 군 홍보팀 보도자료 담당이 각 부서의 일을 취합해 매일 3-4개씩 보도자료를 생산하면 제목과 리드, 문장만 약간 다듬어 본인 이름으로 출고한다. 얼마나 편한 직업이냐. 지금도 당장 확인할 수 있다. 군청에서 보내는 보도자료와 거의 흡사하다고 보면 된다. 지역주간신문은 주재기자실에 안 들어간다. 거기에도 급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주재기자실의 기자 대장이 들어오는 것을 심사한다. 옥천신문은 안 들어가고 기자실의 폐해를 여러차례 지면으로 지적한 바 있다.


#3.여러가지 재정과 인력상황 때문에 지면으로 못 내보내고 인터넷으로 운영하는 신문사도 있고 격주간, 혹은 한달에 한번 지면 신문이 나오는 곳이 있다. 지역주간지와 지역 일간지와는 지역을 대하는 방식이 정서적으로 다르다. 일간지는 대상화하여 멀리서 조망하는 방식을 취한다면 주간지는 그 속에 사는 사람으로서 조금 더 지역주민과 밀착된 취재가 가능하다. 물론 주간지 중에도 사이비 신문이 즐비하다. 언론사 간판 걸어놓고 정치놀음하려고 하는 신문도 참 많다. 우후죽순 사이비신문이 창궐하는 지역보다 차라리 없는게 나을 수도 있다. 말과 글을 왜곡하는 것은 민심을 어지럽히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지역은 과잉과 결핍으로 고통받는다. 어떤 곳은 사이비신문의 범람으로, 어떤 곳은 지역신문이 하나도 없어 언론의 사막화로 권력이 전횡을 휘두르면서 힘들다. 지역신문은 취재기자 하나하나가 일당백이고 힘이다. 저인망으로 쫙 기사를 아래로부터 훑기 때문에 기사의 깊이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지역신문의 재정 형편이 나아지면 취재인력을 하나씩 늘려가는 것이 살길이다. 만나는 사람과 커버하는 지역이 달라지고 이는 뉴스의 질에 단박에 영향을 미친다. 다다익선이다. 주재기자들은 정보를 알고도 못 쓰는 기자들을 옥천신문은 쓴다. 비교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옥천신문은 일부러 옥천 출신 기자를 안 뽑는 게 아니지만, 기자 구성을 보면 전국 팔도에서 다 올라왔다. 혈연, 학연, 지연에서 그나마 자유롭다. 만일 내가 옥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면 기자생활하기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아버지 친구, 학교 선배, 지역 선배 등의 청탁과 등쌀에 내가 과연 기자직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아득하다. 지역출신이면서 정론직필을 하는 기자들에게는 경의를 표하고 싶다.


#4.기초 시군단위 지역신문은 일간은 무리이고 주간이 딱 적당하다. 격주간은 너무 멀고 월간은 잡지의 영역에 들어선다. 적어도 주간은 나와야 한다. 기자 2명이면 대판 12p가 적당하고 취재기가 3명이면 16p가 적당하다. 물론 더 많은 기자들이 밀도있게 신문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들은 신문의 질 못지 않게 페이지 수, 크기 등 양의 측면에서 구독료에 대한 효능감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콘텐츠의 질이다. 적절하게 타협을 해야 한다. 지역신문은 운동적 성격이 강하지만, 시장에서 또한 지속가능하게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생존은 중요하다. 기자들 월급도 제대로 못 주고 신문을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못할 짓이다. 지혜롭게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구독과 광고의 선순환이 이어져야 하는데 이 선순환이 제대로 자리잡을 때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초심은 아름다웠지만, 재정에 허덕이면서 변질되는 신문이 많이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당장 뗏거리도 안 생기는데 기자들한테 헌신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구독료는 찔금찔금 나오니 비교적 덩어리가 큰 광고에 신경을 쓰게 되어있고 기자한테 광고를 해오라고 하는 순간 이 신문은 사망선고에 직면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구독 그래프를 그린다거나 창간기념일에 광고 수주를 기자한테 떠미는 신문사는 망조가 들린 것이다. 그런 신문사는 오래가지 못한다. 오래 가더라도 지역에 그저그런 신문으로 생명연장만 길게 할 뿐이다.


#5.창간을 하려면 사람을 모아야 한다. 창간준비위원회를 발족해 적어도 1-2년 정도 버틸 수 있는 총알을 마련해야 한다. 일단 기자 한명을 상근직으로 채용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러려면 적어도 최소 5천만원에서 1억원 정도의 자본금을 모아야 한다. 군민주 형태나 협동조합으로 지역신문의 꼴을 갖추고 사회적기업 신청을 하는게 좋다. 지역신문처럼 사회적 목적과 필요가 분명한게 어디 있으랴. 그럼 인건비 지원과 사업개발비 등 버틸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 만들어진다. 제도적 지원이 끝날 때까지 자립 기반을 갖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새로 시작하는 신문은 월 만원의 구독료를 권장하고 싶다. 왠만한 시민단체 후원도 만원부터 시작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역신문은 대판 12페이지를 내고 구독료 월 5천원을 받는게 일반적이다. 이 정도로는 답이 안 나온다. 물론 구독료 문턱을 낮추고 더 많은 구독을 하기 위해 5천원의 구독료를 유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참 지난한 길이다. 기존 구독료를 올리려면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처음 시작할 때는 아예 월 만원으로 시작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지로는 없애라. 괜히 두번 일만 만든다. 자동이체나 씨엠에스로 받는 것이 좋다. 무가지는 하나도 뿌리지 않는게 좋다. 그래서 초창기 월 만원짜리 구독자 300명만 확보한다면 출발이 좋은 거다. 당장 월 300만원이 생기는 것 아닌가. 창간준비위원회나 군민주, 협동조합원들의 관계망을 통해서 월 300독자는 확보를 하는 것이 좋다. 그 밑천으로 이제는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줄 때이다. 매주 나오는 지면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야 한다. 독자들의 눈높이는 갈수록 높아지기 때문에 구독자가 늘어날 수록 취재기자를 확보하는데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구독이 많아지면 광고는 따라붙게 되어 있으나 초창기에는 대표나 이사, 운영위원 중심으로 광고 영업도 해야 한다. 광고는 보통 1면 66만원, 칼라 속면 55만원, 흑백 33만원, 줄광고는 한 줄에 5천원 정도 내외로 적정한 광고 가격을 매겨 매뉴얼화하는 게 좋다. 광고단가가 들쑥 날쑥하면 신문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 구독료 외에 들어오는 광고를 덤으로 여기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렇게 탄탄하게 자리잡기 시작하면 보통 취재기자 3명(편집국장 포함)이 되면 비교적 기사의 질을 담보하는 지역신문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신문사 운영은 뭐 다른게 없다. 구독료와 광고료로 번 돈을 인건비와 운영비로 쓰는 것이다. 운영비는 되도록 단촐하게 해야 인건비로 많이 지급할 수 있다. 결국 신문사는 능력있는 취재기자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6.‘풀뿌리 민주주의’를 입버릇처럼 내뱉지만, 이것을 장착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풀뿌리 언론 없는 지방자치란 지역 유지들의 권력다툼과 돈 잔치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역신문을 풀뿌리민주주의의 초석이자, 마지막 보루라고 하는 것이다. 알아야 참여를 하고 자치를 할 것 아니겠는가. 지역 정보를 도무지 모르는데 어떻게 직접 행동을 하는가. 이를 위해서는 전문적인 풀뿌리 언론이 생활 속, 체계 속에 파고들어 끊임없이 정보를 제공하고 권력과 자본을 감시, 비판, 견제하는 저널리즘의 툴을 일상적으로 작동해야 가능한 일이다. 지자체 1년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 내가 뽑아준 의원들이 어떤 공적인 일을 하고 있는 지 일상적 감시체계의 레이더망이 필요하다. 주민들의 생활 속 민원을 바닥에서 끌어올리고, 지역 변방 소수자의 삶에 감수성의 더듬이를 들이밀면서 지역의 변화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려면 지역에 살아야 한다. 살아야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알아지는 것들이 있다. 직접 주민이 돼서 일상의 언어를 듣고 체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바닥부터 언론의 신뢰를 쌓는 일이다. 신문사가 바로 지척에 있고 언제든 가면 기자를 만날 수 있고 기자에게 언제든 제보할 수 있는 이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산성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서울의 이슈에 매몰되지 않고 뉴스의 사막에서 지하수를 파는 심정으로 관정을 꽂아 물을 길어 올린다. 척박한 논밭에 그렇게 물을 댄다. 목을 축이고 양질의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그런 노력 때문이다. 권력과 자본의 갑질, 부조리, 부패, 예산낭비 사례를 실시간으로 감시한다. 말의 물꼬를 트기 시작하면 글밭에 있는 양식들은 저절로 자란다. 주민이 주인인 생활정치, 풀뿌리가 살아있는 민주주의가 비로소 구현되는 것이다. 풀뿌리 공론장을 제대로 지키면서 가능한 일이다. 치우침 없는 모두의 목소리를 공론장에 올려놓기 위한 노력, 기울어진 공론장을 재건하여 무너지려는 공동체를 다시 복원하는 일은 사실 풀뿌리언론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지역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그 자체로 ‘지역 역사’이기 때문이다.


#7.사실 사례는 차고 넘친다. 이미 전북민언련에서는 무주신문, 완주신문, 부안독립신문, 김제시민의소리, 고창해피데이, 열린 순창, 진안신문 등은 매주 KBS전주방송총국과 함께 ‘풀뿌리K’라는 코너를 운영하며 각 지역의 특종을 그냥 훑어내고 있다. 매우 현명한 방책이다. 직접 변방의 지역 뉴스를 뽑아낼 능력이 부재하거나 의지가 없으면 이미 지역에서 뿌리내린 풀뿌리언론과 연계하는 것은 사실 ‘손 안대고 코 푸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마저 품과 곁을 내어준 것 만해도 고마워해야 하는 일이니 얼마나 지역을 아래로 내려보고 기존 레거시미디어의 문턱이 높은가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절대 보도자료에 나오지 않는 소식들, 11월3일 풀뿌리K를 보자. 부안독립신문에서는 ‘캠핑트레일러 보관소로 전락한 공영주차장’ 소식을, 열린순창은 ‘특정영농조합의 지자체 예산 특혜 논란’, 완주신문에서는 ‘완주군, 분양자격없이 농공단지 매입추진 논란’, 진안신문에서는 ‘사라져 가는 토종씨앗 보존사업 대책 필요’ 등의 보도가 나왔다. 제목만 봐도 굵직한 뉴스들이다. 공영방송에서 풀뿌리언론의 힘을 빌어 제대로 된 지역의 이야기를 전한 것이다. 이 밑바탕에는 전북민언련이 있었다. 제대로 된 지역신문이 없었던 무주나 완주에 지역신문이 나올 수 있도록 바탕과 배경을 만들어주고 힘겹게 나온 지역신문들을 다시 연결하여 근육을 키우는 일, 그리고 지역 공영방송과 연결을 해줬던 것도 지역에서 꾸준히 지역민언련이 역할을 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매월 전북 방송 3사 시군의제 실태보고서를 작성해 각 방송사의 지역의제 보도량을 양적 질적 비교를 감행한다. 이런 모니터링이 공영방송을 풀뿌리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뉴스의 사막에 씨앗을 심고 관정을 파서 풀뿌리가 잘 자라날 수 있도록 하는 힘, 그리고 각각의 풀뿌리가 연대할 수 있는 기틀과 마당을 만드는 힘, 사실 지역신문발전위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이를 전북민언련이 하고 있다는 것에 찬사를 보낸다. 대부분 도 단위의 시민사회단체들 역시 거점 논리를 답습하며 거점도시외에 다른 시군 지역을 하위로 내려보거나 대상화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체계의 수직적 논리를 대항하기 위해 닮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풀뿌리 지역사회를 사실 두 번 세 번 죽이는 일인데 그 방식 자체가 잘 고쳐지질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전북민언련의 활동은 수직적인 방식보다 수평적인 방식, 그리고 보충성의 논리에 충실하다. 왜 광역이 존재하는 지의 그 역할에 대해 제대로 보여준다. 광역은 기초가 잘 설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역할이어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기층을 눌러 성장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왔다. 아랫 돌을 빼앗아 윗돌을 괴는 방식으로 밑바닥을 짙눌러 왔다. 달걀을 가만히 수평으로 눕혀 세워두는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밑바닥을 깨서 세우는 방식에 중독되어 왔다. 기초가 잘 설 수 있도록 보완해주는 일, 그런 풀뿌리가 살아있는 기초단위의 연대가 바로 광역이어야 한다. 그런데 기초를 살릴 생각 없이 광역의 이름만 빨리 탐하고 싶은 성장, 발전 위주의 이런 허세와 허위의식이 많은 풀뿌리들을 여전히 잡아먹고 있다.


#8.지역신문은 잘 보이지 않게 정말 각 지역에서 고군분투중이다. 해마다 열리는 지역신문 컨퍼런스에서 보이는 것은 정말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포털에 종속되어 연예인 뉴스나 게시판이나 에스엔에스를 훓어서 별 시덥잖은 이야기를 엮어 낚시질 하는 것에 익숙해진 중앙언론에 비해 풀뿌리 지역신문들의 건강성은 비할데가 아니다. 바른지역언론연대에 소속되어 있는 50여개 언론사들이 각 지역에서 구부러진 권력과 자본에 일침을 가하려 무던히도 펜을 벼르고 있고 일간지 중심의 지원체계에 대해서도 꾸준히 투쟁하고 있다. 지역에서는 이미 상당수 폐지된 원시적인 항목의 예산, 계도지 예산이란 골리앗과 맞장 뜨고 있는 은평시민신문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계도지 예산이 아직도 서울시 각 구청 예산으로 편성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후진데가 있나 싶었다. 박원순 시장 시절 마을 민주주의, 마을 자치 이야기를 그렇게 담론화 해놓고서 여전히 계도지 예산이 남아있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런 계도지 예산을 서울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경향이나 한겨레 등 진보언론조차 나눠먹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지역신문은 오래전에 일찌감치 계도지 예산을 반납하고 계도지예산 철폐 운동을 해오면서 이 예산항목을 지운지 오래이다. 은평시민신문은 최전선에서 서서 은평구의 계도지 예산과 관련해 꾸준한 비판을 해왔다. 이런 비판을 짜증낸 은평구는 은평시민신문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해 이미 선정된 마을기업 예산까지 무산시키는 등 비판의 목소리를 옥죄고 있다. 은평시민신문은 1면 백지광고를 통해 지자체 탄압에 맞섰고 다시 의지를 모아 고군 분투 중에 있다. 이처럼 지역에서는 소리없는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감히 생각한다. 풀뿌리 신문없는 지방자치란 정말 삶터를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또 그런 언론마저 지자체 권력과 야합했을 때는 정말 ‘이끼’같은 마을들이 곳곳에 등장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삶의 정치, 주민이 주인인 정치를 꿈꾸고 있다면, 정말 풀뿌리 민주주의를 고대하고 바란다면, 지금 당장 살고 있는 지역에서 지역언론, 마을신문을 시도해보길 적극 권한다. 풀뿌리민주주의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필수불가결로 장착해야 할 기본적이고 가장 강력한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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