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농촌이 회생되어야 모두가 사는 길이다
야마시타 유스케의 지방회생을 읽고
대전시 중구 산성동이 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지만, 지금 가면 그 흔적을 찾기가 요원하다. 건물과 건물 사이 여백이 있었던 공간들은 빼곡하게 건물들이 들어 찾고 논과 밭과 작은 야산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억을 재생할 수 있는 추억의 공간들이 정말 하나도 없다. 그 어릴 적 자주 가던 동네 현대문구점도, 두꺼비 슈퍼도, 사진관도, 동네 아이들과 놀던 골목길도, 연날리기를 하며 놀았던 자그마한 야산도 없다. 아마도 ‘상전벽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지도 모른다.
낯선 고향땅, 그 때만 해도 도시 변두리로서 공동체적인 삶은 공존했다. 은혜상회에 가서 가게 앞에 내어놓은 막걸리 상자 뚜껑을 누르면 막걸리가 조금 베어 나왔는데 그 막걸리를 찍어 먹고 했던 기억들, 비가오고 난 후 둑쌓기 놀이를 했던 그 기억, 전봇대를 기점으로 나이먹기 놀이를 했던 그 기억들이 여전히 새록새록한데 그런 공간들이 증발해버렸다. 아마 이런 것들이 야마시타 야스케가 쓴 <지방회생>의 '도시의 정의'로 진행된 사례에 해당되는 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일정규모의 인구를 고밀도로 유지하는 장소가 곧 도시이고, 이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하고 인구 과소지역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법을 도시의 정의라고 썼다. 일제시대 조성된 대전이란 도시는 인근 군단위를 야금야금 먹고 자랐다. 옛날 향교가 있던 회덕(대덕구)과 진잠(서구 가수원 쪽)을 삼키고서 점점 커졌다.
80년대 후반 직할시란 명칭을 획득하고 지금의 광역시가 되기까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다. 인구가 팍팍 늘었고 건물이 쭉쭉 들어섰다. 도시는 인근 농촌의 고혈을 빼서 성장한 거나 진배없다. 1980년대 즈음에 옥천의 많은 마을을 수몰시키면서 대청댐을 만들었다. 옥천은 땅의 일부 육신을 빼앗기며 강제로 수몰당했다. (옥천은 상류지역 상수원이라는 것 때문에 전체 땅의 80%가 개발제한으로 묶여 있으며 지금도 금강유역환경청은 옥천 땅을 사들이고 있다.) 댐으로 인한 물과 전기가 공급됐고 이는 도시가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인근 농촌에서 젊은 인력들까지 다 데리고 갔다. 도시의 성장은 농촌을 몰락시키면서 가능했다.
대전 사람들이 드라이브 코스로 교외 나들이를 하는 옥천으로 향하는 대청호는 단지 수려한 경관만 갖고 있는게 아니라 수몰로 인해 대대손손 이어져온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실향민의 아픔도 있다. 그리고 각종 개발제한으로 인해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슬픔도 그만큼 들어있다.
‘도시의 정의’로 사고하고 있다
야마시타 유스케는 책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도교를 기준으로 사고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관이야 말로 도교일증집중을 강화하고 인구 감소가 멈추지 않게 된 본질'이라고 썼다. 동의한다. 최근 10년 동안 유입된 각종 농촌 컨설팅이 그렇게 이뤄졌다. 혹자는 말한다. 농촌에 그만한 예산이 투여됐는데도 농촌에 떨어진 예산은 다 어디로 간 것이냐고.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니냐고. 거칠게 말하면 여전히 농촌은 유린당하고 있다. 그 돈 다 도시에 있고 도시에 사는 컨설팅 업체들이 다 가져가 버렸다. 건물 하나 뚝딱 지어 놓고 지역역량강화 사업 한다면서 여기저기 했던 얘기들 복붙하면서 귓청에 흘리면서 열등감만 가중시켜 놓았다. 농촌체험이니 농촌관광이니 농촌 힐링이니 그럴싸한 말로 도시민들의 돈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유치하느냐에 혈안이 되게 해 놓았다. 정주 인구를 늘이는 것은 '그것은 나랏님도 못하는 것'이니 아예 논외로 제껴놓고 어떻게 하면 유동인구를 늘여 거기서 농외소득을 늘일 것인지에만 초점으로 박아놓고 주구장창 설명과 사례를 덧댄다. 거기다 헛발질하며 돈 펑펑 써 제끼는 지자체의 정책도 아닌 정책과 맞물리고, 이를 부추기는 언론하고 짬짜미가 되면 농촌 망치는 주범 콜라보 삼종세트이다. 여기저기 출렁다리가 만들어지고 거대한 조형물이 생기며, 유행따라 예산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진다. 선진지 견학이다 뭐다 하면서 다녀온 후 하나씩 뚝딱 만들어지는데 전국의 농촌이 획일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어떻게 귀결될지 알고 있다.
결국 그 책임을 농촌에게 고스란히 물을 것이다
주민으로 향할 것이다. '너희는 뭐했느냐'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언급된다. '미즈호 종합연구소의 오카다 유타가 주임연구원은 이시바의 (지방창생)정책에 대해 '주민에 대한 경고다'라고 지적, 가만히 있어도 10년 20년 뒤에는 유지할 수 없는 지자체가 생겨난다. 늦기전에 하자는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지자체는 지금가지 무엇을 해왔는지 문제되고 있다며 결과적으로는 자연 도태 될 가능성이 있다라고도 이야기했다'.
물론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렇게 대상화해놓고 책임을 미뤄놓는 것은 최종 발을 뺄 때 사용된다. 니들 망가지는 것은 니들 책임이지, 우리 책임이 아니야. 라는 식의 말들. 그런 발화가 나오려면 적절한 논리가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이 발화의 근거 논리가 바로 '지역 소멸'이고 '중핵도시', 즉 컴팩트 도시이다.
지역과 농촌을 살리려면 인구가 더이상 사라지지 않도록 인구 댐을 만드는 중핵도시가 있어야 한다. 컴팩트하게 대도시에 버금가는 정주 여건을 곳곳에 만들어 놓아야 지역이 살 수 있다는 말. 얼마나 그럴싸하게 보이는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고, 경쟁과 도태 시스템이 작동되어야 그나마 살아남는다는 논리,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그 말 우리가 귀에 딱지 않도록 뼈에 사무치도록 들었던 국민교육과 시장자본주의 교육과 동일시되는 말들이다. 그런 말의 상찬 위에 농촌은 가지껏 요리되고 있다. '지역 소멸'로 사망선고를 내리며 엄포를 놓고 중핵도시로 출구를 마련해준다. 너희가 갈 길은 이 길 밖에 없어 다 손들고 합쳐! 그래야 살길이야.
지역의 삶은 부정당하고 있다
'어느지역을 가리켜 더 이상 지킬 수 없다. 없어져 달라라고 말하거나 평범하게 생활하고 있는 어떤 사람들을 가리켜서 당신들에게는 더 이상 비용을 쓸 수 없다. 없어지든지 복지대상이 되어달라고 한다. 선택과 집중을 포함한 도시의 정의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객관주의에 의한 '삶=주관'의 부정이다. 대규모 인간 집단은 바람직하고 살아갈 가치가 있지만, 소규모 집단은 부적절하고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당신들에게 비용을 쓰고 싶지 않다라는 것은 국민들 중 어떤 사람을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지역 소멸을 이야기하는) <마스다보고서> 전체를 지배하는 가치가 바로 이 도시의 정의인 것이다. 게다가 이 바람직하다는 말은 도시 생활이 인간 집단에게 이성적이며 그래서 사회는 이러한 집단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있다'(지방회생, 야마시타 유스케) 정말 이런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슬쩍슬쩍 언론에 흘리면서 간과 눈치를 보면서 그런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 인구가 줄어드는 걸. 없으면 결국 문 닫아야 하지 않겠어? 이런 말들로 농촌을 포박한다. 인근 거점도시로 헤쳐 모여 할 수 밖에 없어. 그래야 그나마 너희가 살길이야. 이런 뉘앙스를 슬그머니 내비친다. 일본에서도 그랬나보다. '현역 관료가 한계취락을 중심부로 옮겨 콤팩트한 마을 만들기를 추진하겠다는 생각을 내비쳤다는 사실에는 변함없기 때문이다. 마을의 유지비용은 국토교통성에서조차 어떤 계기가 생기면 다시 등장할 수 있는 논점인 것이다.' 이런 말을 언론에서 살짝 흘리고 간 보는 것은 이들이 이런 정책을 곧 펴겠다는 신호탄인 셈이다. 방향은 그렇게 정해졌고 언제 어느 시점에 할 지만 남았다는 것이다.
관계성과 공동체성이 사라진 쪽수민주주의는 위험하다
쪽수 민주주의는 이제 그들만의 민주주의이다. 일인일표는 더이상 소외된 이들을 대변할 수 없다. 도시와 농촌의 기울어진 운동장의 이분법적 함의에서는 더더욱이 그렇다. 관계성을 고려하지 않은, 작은 지역공동체를 상정하지 않은 쪽수 민주주의는 큰 규모의 단체의 정체성에 맞게 진행될 개연성이 크다. 벌써부터 작은학교에 대한 낭만적인 감성으로 지탱한 둑은 이제 허물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경쟁과 효율의 잣대를 대면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학생과 교사와 교직원 수를 따지면 일대일 개인교습이나 다름없는데 그런데도 학생수가 왜 줄어드는 거야. 차라리 없애는 게 낫지 않아. 예산낭비잖아. 큰 학교로 얼른 통합해야지. 이런 논리들은 이미 곳곳에 포진되고 잠재되어 있다. 정책 시스템 자체가 학교 수를 고정값으로 묶어놓고 농촌학교를 줄여야 도시 신설학교를 설립할 수 있도록 설계를 해놓았기 때문에 '진보'를 이야기하는 교육감들조차도 농촌학교 고사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기도 한다. 통폐합의 조건으로 막대한 예산을 쥐어줄테니 어서 통합하세요.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넘어간 학교가 벌써 여러개다. 기숙형 중학교니 뭐니 하면서 학교 시설을 요란 뻑적지근하게 만들어 놓고 현혹한다.
그렇게 시간은 그들의 편이다. 방치와 방임을 하면 저절로 고사될 텐데 애써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폐교 예정학교에는 더이상 시설 예산지원을 하지 않는다. 학교가 아마도 커다란 분기점이고 시발점이 될 것 같다. 그 뇌관을 하나둘 건드리면 '지역 소멸'로 가는 지름길이고 중핵도시를 건설하며 관리하기 더 쉬워진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에는 지역 안에서도 거점도시와 주변 농촌과의 생각차이가 확연하다. 거점 도시는 빨리 커져 광역시가 되는 꿈을 키우고 있다. 농촌 지자체와 동급으로 여겨지는 것도, 거추장스럽게 농촌지자체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도'도 필요없이 우뚝 서길 바란다. 그래야 다른 거점도시와 경쟁이 되지. 모두가 그렇게 특별시가 되는 꿈을 꾸고 있다. 군민이 아니라 시민을, 시민보다 광역시민을, 광역시민보다 특별시민이 되는 것을 욕망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방회생은 지역소멸에 대항해 비교적 잘 쓰여진 책이다
<지방회생>이라는 책은 그나마 잘 쓰여진 책이다. <지역 소멸>이 음험한 음모를 갖고 있다면 <지방회생>은 이에 반박할 수 있도록 나름 논리정연하게 쓰여인 책이다. 이 책에는 '체계'와 '관계' 이야기까지 파고든다. '도시화는 사회와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가족과 공동체중심에서 공공서비스와 시장 이용의 효율성에 중심을 두는 방식으로 전환시켰다. 행정과 시장에 대한 의존성이 강한 도시는 가정이나 지역생활에서 문제해결 능력이 낮아진다. 행정이나 시장에 의존함으로써 행정이나 시장이 대신해주기 때문에 도시민은 다양한 자유를 누리지만 이것은 또한 역으로 행정이나 시장이 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인구가 집중된 고밀도화 도시에서의 삶은 가까운 사람들가의 직접적인 관계나 교류가 없어도 지탱이 가능하다. 도시는 낯선사람들과의 교환의 장인 시장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 등을 설계하고 배치해 운영하는 행정기구인 셈이다. 그것이 도시화의 전제이며 이런 조건이 갖추어지고 사람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도시적 생활방식은 더 발달하고 다시 도시화는 더 빠르게 진행된다.' 도시가 행정체계와 시장자본체계에 상당부분 의존한 삶이라면 농촌은 이런 체계자체가 무너진 삶이다. 이런 체계가 부족하면 공동체적인 체계와 공공행정체계에서 이를 채워줘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미디어를 타고 들어온 시장자본주의 삶은 공동체적 관계를 갈수록 끊어놓고 시장은 이미 철수한 지 오래다. 딱 보면 견적이 안 나오고 돈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단박에 이미 눈치챘기 때문이다. 시장이 철수한 그 자리에 공공행정체계도 이를 메워주기는 커녕 마지못해 남아있거나 슬그머니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있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내핍상태에 들어섰다.
숫자에만 매몰된 인구, 세대별 지역별 편차를 응시해야
야마시타 유스케는 저출생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일반적으로 도시가 농산어촌에 비해 출산력이 낮다는 것은 역사인구학 등의 연구결과에 부합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기 제일 어려운 도쿄나 대도시에 젊은이들이 흡수되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반대로 아이가 태어나기 쉬운 농산어촌에는 고령자들만 남아있다. 결국 인구밀도가 많고 고밀도인 장소는 도시이기 때문에(시카고파 도시사회학, 인간생태학의 정의에 따르면) 도시화의 정도가 심화될수록 인구재생산능력은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도시화가 출산율을 낮추고 인구 감소를 일으킨다. 이것을 인구감소의 도시화 원인설이라 정의하자.' 농촌은 그가 말한 것처럼 20대부터 50대가 진공상태로 빠져 있다. 옥천만 해도 고령화 비율이 30%에 달할 정도로 젊은이는 없고 노인들만 늘어나고 있다. 바람직한 인구구조는 아니다. 미래가 없는 인구구조인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인구 감소 문제를 단지 숫자에만 천착하는 데 이는 그렇게 단편적으로 외피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숫자에만 집착하지 말고 사람들의 삶을 바라봐야 한다. 또한 구조를 봐야 한다. 숫자 이면에는 젊은 세대의 인구 유출이 여전히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고 지역적으로 볼 때는 면 지역 인구가 더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종'형이 아닌 역 피라미드형은 미래가 없는 인구구조이며 읍 집중이 심화되며 면 지역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 자체가 건강하지 않은 구조이다. 농촌인구는 숫자를 넘어서 세대별 지역별로 불건강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절대 숫자가 줄어든다 할 지라도 세대별 인구가 균형적으로 유지되고 지역별 인구 편차가 쏠리지 않는다면 그 지역의 미래는 있다.
중심병이란 역병에 걸린 사회, 모두를 망친다
이 나라는 어떻게 된 게 중심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늘 중심과 주변부를 가르고 주변부에서 고혈을 빨고 착취하며 중심부를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커왔다. 균형발전을 외치는 충청북도도 청주 중심이고 충북도의 균형발전을 외치는 옥천군도 읍 중심이다. 역설적으로 외치는 레토릭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텐가. 지역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논리를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변화는 없다. 수직적인 위계 방식이 아니라 수평적인 네트워크식 방식이 되지 않고서는 질적 변화는 힘들다. 체계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 어설픈 지방자치를 시작하고서 자치를 주었다 생각하지 말지어다. 공공기관 몇 개 이전해놓고 균형발전을 언급해서는 아니될지어다. 주변부에는 늘 혐오시설을 설치하고 필요한 알짜배기들은 다 가져가면서 그렇게 성장해 놓고 지역을 또 비하하는 이 구조는 '악마적'이다. 쓰레기장, 하수처리장, 발전소, 상수원 등 발전에 필요하면서도 정작 가까이 하기 싫은 것들은 다 주변부에 설치해놓고 있다. 너희들은 인구도 얼마 안 되니까 돈 조금 줄테니 그냥 감내하고 살아라는 식이다. 그렇게 송전탑이 세워졌고, 그렇게 하수처리장과 쓰레기 매립장, 장묘시설이 설치되었다.
지방분권, 균형발전 넘어서는 구호 나와야
.이제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이라는 구호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분권은 권한을 단순히 나눠주는 것 이상의 자치에 더 근접해야 하고, 균형발전은 기업과 기관 이전을 넘어서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아니 그런 구호는 이제 폐기되어야 함이 옳다.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하면 세상이, 삶의 질이 더 나아지는 가. 그것을 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지향이 없다. 그 발전이라는 것이 서울과 똑같아지는 것을 뜻함인가. 도시화되는 것을 뜻하는가. 서울의 복제품을 여기저기 만들겠다는 것인가. 이제 균형발전이라는 용어는 '순환과 공생의 지역공동체를 만들자'는 구체적인 언어로, 지방분권이라는 용어는 '자치와 자급의 지역공동체를 만들자'는 용어로 구체화 시킬 필요가 있다. 밑도 끝도 없는 성장과 발전대신, 순환과 공생의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잘 되는 놈만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의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부분을 착취해 성장하고, 경쟁과 도태로 거르는 방식이 아닌 협동과 연대의 방식으로 가장 기본적인 지역사회를 구축해야 한다. 행정체계와 시장체계에 예속되지 않고 관계에 의해 제어되고 이를 부릴 수 있는 새로운 지역사회가 건설되어야 한다. 야마시타 유스케도 다양성의 공생이란 표현으로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했다. '사회 구성원들을 어떤 기준에 따라 배제하지 않고 다양한 존재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모두가 함께 손잡고 살아가는 것, 그렇게 공생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도시를 형성하고 국가를 운영해가는 것이다.', '경제에 치중하고 도쿄로 집중하던 것을 일단 멈추고 하나로 묶여버린 것들을 재분할하고 분산시켜 다극화하는 것, 집중을 통해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분산시켜 다수의 극을 형성하고 그것을 서로 연결하고 순환시켜 나가는 방식으로 전체적으로 서서히 통일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코뮌’
그래서 다시 '코뮌'이다. 농촌 어려운 것 다 알고, 지역 힘든 것 다 아는데 언제까지 징징 거릴 것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대안이 뭐냐고 묻는다. 대통령이 바뀌어야 한다고 나라가 바뀌어야 한다는 이런 씨알도 안 먹히는 허무하게 소비되는 이런 말일랑은 하지 않을 런다. 그럼 우리가 조직화해서 선거로 쟁취해야 한다는 그런 말도 전부 믿지는 않을런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 있다. 체계의 힘이 약해진 곳에서 관계의 힘이 자라고, 관계에 의해 재구조화된 체계가 다시 관계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관계가 체계를 기꺼이 아무렇지 않게 부릴 수 있는 사회, 지역사회 공론장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실천하며 생활권 중심의 지역사회를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면단위 중심의 공공체계를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 시장이 철수한 그 자리에 공동의 힘으로 공공의 영역을 재구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무상교통과 기본소득, 사회주택, 사회적농업, 작은영화관, 작은도서관, 수영장, 어린이집, 보건지소와 진료소의 강화 등 새로운 의료시스템 구축, 쓰임새 있는 사회적 공공일자리 창출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아니 이는 새로운 사회가 아닌 이전의 사회를 다시 재복원하는 작업이다.
도시와 농촌의 이분법 폐기, 순환과 공생의 지역사회로
도농상생이니 도농공생이니 하는 말도 조금 더 진일보한 용어로 바꾸어 갔으면 한다. 이제 도시, 농촌 가르지 말고 자립하고 연대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도시는 그 속성상 농촌을 계속 잠식하고 개발하여 발전하려 할 것이다. 성장하려 할 것이다. 마구니가 끼어 있어 무한 증식하며 무한 성장하려는 괴물이 되어 가고 있다.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있다. 지향을 세워야 한다. 자치와 자급으로 자립하는 사회, 포용과 협동으로 연대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먹을거리의 자급, 에너지의 자급, 물의 자급을 하려면 더이상 개발을 멈추고 농지를 만들어야 한다. 남의 땅에 쇠말뚝 꼽듯이 송전탑을 만드는 것을 더이상 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엄한 땅에 댐을 만들어 남의 고향 쑥대밭으로 만들지 말고 먹는 물과 사용할 물을 어떻게 만들 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도시에서는 그런 고민은 생략되어 있다. 당연히 공급되는 것이어야 하고, 어디서부터 나오는 지 그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 책에는 명확히 나오지 않고 있지만, 이 책을 넘어 명확하게 주장하고 싶다. 도시와 농촌 이분법은 두가지 지역적 정체성을 고착화시켜 서로의 관계를 더 멀리 할 것이다. 도시와 농촌이라는 이분법 대신에 모두가 조금씩 농촌이고, 농민인 사회를 원한다. 이 책에는 공감하는 내용이 많이 있고 기존 생각해왔던 것들을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를 토대로 조금 더 생산적인 논의를 원한다.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변화를 바란다.
자치와 자급의 감수성이 되살아나야 한다
생활의 토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그 감수성이 결여된 사회에 살고 있다. 이것은 과연 타당한가. 그 무지와 감수성의 결여는 체계의 힘이 작동하고 이로 인해 지배당한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실감할 수 있을까?' 농산물 값이 폭등하면 왜 그렇게 비싸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농산물 값은 항상 싸야 하는 이 엄혹한 현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도농상생, 도농공생이 얼핏 아름다워 보이는 말 같지만, 그 이상을 원한다. 도시와 농촌이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세계를 건사할 수 있는 작은 코뮌이 되길 원한다. 서로를 대상화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런 코뮌들이 보충성의 원리로 협동하고 연대하길 희망한다. 사람이 비로소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지역에서 그런 관계성의 토대로 풀뿌리 민주주의가 발현되길 소망한다.
***에필로그 ; 대전에서 28년 정도 살다가 옥천에 와서 18년 정도 넘게 살고 있다. 다시 대전에 살라 하면 못 살 것 같다. 문화와 교육, 의료 시설이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여백과 자연이 좋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지역, 걸어 다니다 보면 아는 사람이 많은 지역, 관계성과 공동체성이 아직 남아있는 옥천이 참 좋다. 그것은 발전이니 성장이니 이런 말과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돈으로도 그렇다. 돈을 주고 사람을 사고 관계를 살 수 있는가.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애시당초 관계의 본질에 한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할 것이다. 많은 체계가 그나마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관계가 그 안에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 소멸로 우중충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마치 그것을 바라는 것 마냥 많은 언론보도와 정책적 논의가 진행될 때 <지방회생>이란 책은 그나마 브레이크를 잡아주었다. 논의가 예서 멈추면 안 된다. 조금 더 생산적인 논의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