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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단 Jul 04. 2024

작지만 중요한 의견들을 존중할 때

김수영 시인은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썼다. 어떤 맥락에서 이 같은 말과 시가 쓰여지는지는 익히 알고 있지만, 그 작은 것의 본질과 근원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사실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끈도 놓치는 게 아닌가 싶다.      

지역에서 청소년 기자단을 운영하면서 청소년을 자주 만난다. 직장을 다니기 싫어하는 것처럼 학교를 다니기 싫어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누군가는 일보다 공부가 쉽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공부는 온종일 좁은 교실 속 책상에 갇혀 있어야 하는 고역이다.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물어본다. 그 이야기를 하면 끝이 없다.

눈빛이 반짝이고 초롱초롱해진다. “급식 시간이 한시간밖에 안 되는데 밥 먹을 시간이 빠듯해요. 왜 3학년 먼저 먹는 것을 전통이라면서 당연하게 여기는 거죠? 제비뽑기라도 하면 안 될까요?” “왜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없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4층에 있는 교실까지 올라가려면 정말 힘들거든요. 장애인용이라면서 선생님들은 왜 이용하시는 걸까요? 저희들은 이용하다가 벌점을 받기도 했어요.” “등교하면 휴대폰을 일제히 수거하고 하교할 때 나눠줘요. 내 물건인데 의사를 묻지 않고 강제로 수거하는 방침이 저는 맘에 들지 않아요.” “교복 말고 체육복이나 생활복을 입고 등교하는 것도 뭐라고 하시더라고요. 슬리퍼를 신고 등교하면 왜 안 되나요? 파마나 염색도 못하게 해요. 장신구 착용도 막으시고요. 내 몸인데 누구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신체의 자유가 있지 않나요?”      

이런 말들은 대부분 성적과 대학입시에 묻힌다. ‘너 대학 안 갈 거야? 그런 자율은 대학 가서 누려’라는 말과 ‘학생답게’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된다. 심지어는 학생들이 뽑은 학생회도 이런 논리로 학생들에게 캠페인을 한다. 이미 학교의 논리가 내면화된 채 학생들을 계몽하는 방법으로 전파되고 있다. 청소년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하나도 반영되지 않는 학교는 그래도 꿋꿋하게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강변한다.

중·고등학교 6년은 참 변화가 더디다. 학생들이 대입에 볼모로 잡혀 있어 거의 민주주의가 스며들 틈이 없다. 누가 그랬던가.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고. 자율적으로 원하는 과목을 듣고 시간표를 스스로 짜고 원하는 옷을 입으며, 친구와 담소를 나누며 천천히 밥을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사실상 박탈당하고 있다. 묵인하고 방조하는 것 자체가 공모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는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특정 연령대의 자유를 학교라는 공간에서 묶어두고 있다. 유엔총회가 제정한 세계인권선언문에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가족, 주택, 통신에 대해 타인이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의 명예와 평판에 대해서도 타인이 침해해서는 안 된다’(12조) ‘어느 누구도 자기 재산을 정당한 이유 없이 남에게 함부로 빼앗기지 않는다’(17조) ‘모든 사람은 직접 또는 자유롭게 선출된 대표자를 통해, 자국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21조) 등의 항목이 나온다. 이에 견주어 볼 때 현행 학교의 규정은 심각할 정도로 문제가 많다. 시민권을 박탈당한 학교, 여전히 이를 방임하는 사회와 국가가 있다.

그래서 청소년 기자단 활동에서는 스스로 말하고 쓰는 것을 통해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배우고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공부한다. 지역 공동체에 살고 있는, 부끄러운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검찰개혁, 언론개혁 못지않게 이 나라 교육개혁을 이루지 않는다면 답이 없다. 아직 볼모로 잡혀 있는 어린 ‘시민’들을 구제하지 못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다. 이를 작다고 치부하는 어른들의 그릇이 작을 뿐이다. 지역에서부터 ‘어린’ 시민들과 매주 만나서 결코 ‘작지’ 않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그것이 서울의 서초동이나 여의도의 촛불만큼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 모두에게도 역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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