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을 펴는 데 있어 감수성은 중요한 요소다. 현장과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마음이 멀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수많은 농업 정책, 농촌 정책이 실패하는 이유는 거기에서 기인했다. 기껏해서 서울특별시에서 탈출해 내려왔지만 또다른 도시의 철옹성에 갇혀버렸다. 농촌과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긴 했지만, 도시의 피부는 두껍고 자본의 껍질은 공고해서 농업과 농촌의 숨과 결이 들어갈 틈을 내주지 않는다. ‘내 일’과 ‘우리 일’이 아니라 ‘남 일’처럼 느끼게 되고, 함께 하는 게 아니라 해주는 것으로 인식되는 순간 그것은 사실 한계가 분명하게 보이는 일이다. 타자화, 대상화, 사물화하는 인식과 태도는 농업과 농촌을 이 지경까지 만든 주범이나 다름없다.
농업만 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농산물, 먹을거리로만 봐서는 해결이 요원하다. 산업적 관점에서만 접근하면 농촌은 생산기지에 불과하다. 삶의 공간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농산물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취급한다. 이렇기에 온실에서 원예를 하듯이 무결점의 친환경 농업을 전자기기로 하겠다는 이야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거기에다 청년과 바이오, 혁신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서 국적 불문의 농업·농촌에 대한 환상을 매끈한 영상을 통해 보여준다. 몇초짜리 광고 영상을 보는 순간, 그들이 원하는 건 이런 거였구나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사실 답이 없다고 한다.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는 것이 농업·농촌이라고 할 정도로 천덕꾸러기가 돼버렸다. 폐교 위기, 공공기관의 통폐합, 지역 소멸이 회자되는 이 시기에 농촌의 사막화에 대해 다들 무감하다. 너무 많은 뉴스가 반복적으로 나오다 보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만다. 패배주의적인 인식들이 농촌의 안과 밖에서 삶을 포박한다. 가끔 부농인 사람들과 ‘신박한’ 아이디어를 들고나온 청년들이 언론에 나오며 인기를 끌기도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본질을 흐리는 반짝 이슈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농림축산식품부를 농촌의 면 지역으로 옮기는 과감한 결정을 내릴 것을 제안한다.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농촌에서의 삶이 관료들의 삶이 되지 않는 이상, 늘 그 안에서 한 걸음도 더 못 나갈 것이다. 어린이집이 없는 곳에서, 도서관·약국 하나 없는 곳에서, 심지어 파출소와 농협이 통폐합된 그곳에서 한번 아이를 키우며 살아보길 권한다. 잠시 잠깐 동안에 하는 극한 체험이 아니라 실제 삶을 살아보길 희망한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들이, 일상적으로 소통하며 얻어지는 것들이 정책으로 나오길 바란다.
농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면 단위다. 농식품부는 지금까지 마을이니 권역이니 하면서 수조원대를 흩뿌리며 마을 사업을 해왔는데 이것은 전부 헛다리 짚기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신공을 보여주는 것에 그쳤다. 삶의 공간마저 줄세우기를 하면서 경쟁으로 내몬 정책들은 부작용이 더 크다. 행정안전부와 협의해 농촌 면 단위의 헝클어진 행정구역을 생활권으로 재정비하고 면 소재지에 최소한의 공공서비스 인프라를 갖추면서 면 소재지 구심을 강화해야 한다. 사라진 오일장이 살아나야 하고, 면에서도 오롯하게 사는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
지금 인구 이동의 추세로 보면 이촌향도는 끝난 게 아니라 급속하게 진행 중이다. 면에서 읍으로 읍에서 인근 도시로 향하는 ‘엑소더스’ 행렬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들은 대책을 세울 줄 모른다. 농식품부는 각 정부부처와 태스크포스팀을 가동해 농촌의 재생에 대해 계획을 짜야 한다. 행안부와 보건복지부,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등과 함께 농촌에 맞는 틀거리를 만들지 못하면 답은 없다. 농촌을 삶의 공간이 아닌 생산기지만으로 볼 때 농촌의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부디 살아봐라’는 말이 ‘꼭 살아봐야 아는 건가’라는 비판으로 돌아오거나, ‘살아봐도 모를 수도 있다’는 말을 꺼낸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살아봐야 아는 것이 있다.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이 다양성에서 벗어나 한쪽에 몰리기 시작할 때 그것은 분명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미 농업·농촌은 잊혀가고 있다. 값싼 동정과 시혜를 원치 않는다. 농식품부를 농촌의 면 지역으로 옮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