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를 잠시 그만두고 급식 배달을 한 적이 있다. 기자 직함을 떼고 기사로 변신했을 때 느낀 점이 적지 않다. 지역 신문 기자를 10년 넘게 하며 지역 구석구석을 웬만큼 안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큰 오만이란 걸 깨달았다. 기껏해야 만나는 사람 계속 만나고 출입처 중심으로 계속 뱅글뱅글 돌았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자괴감이 문득 들었다. ‘한 줌 활동’으로 전체를 고민한 척했다는 부끄러움이 부지불식간에 스몄다.
특히 노인·장애인 밑반찬 배달과 차상위계층 산모들에게 배달하는 영양플러스 배달을 할 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한참 언덕배기를 올라가야 하는 옥탑방,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빌라의 5층, 컴컴한 반지하, 산 밑의 창고 허름한 외딴집을 가가호호 방문하며 먹을거리를 전달했을 때 느낀 것들은 가슴팍에 오래 남는다. 유령처럼 사는 사람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사실 ‘소수’가 아니라 ‘다수’다. 옥천군 소득조사를 했을 때, 가구소득 월 100만원대 미만 비중이 무려 35%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결국 옥천군도 읍내 사는 중산층 이상의 목소리가, 돈깨나 있고 말깨나 하는 소수의 목소리가 많은 것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소수로 취급받고 목소리를 억압당하는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레 이뤄지고 있구나 하는 것에 새삼 놀랐다. ‘참여’라는 것이 얼마나 허울 좋고 허무맹랑한 것인가. 참여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구성되지 않았는데 거기서 참여를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하루 먹고 살 땟거리 걱정 하느라 바쁘고 한해 겨울, 여름 나느라 힘겨운 사람들에게 ‘참여’라는 말은 얼마나 가당찮은 말이던가. 또 하나 느낀 건, 공공급식 배달의 방식 자체가 시혜적인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공짜로 주는 거니까 받아먹어’라는 투의 것들이 그대로 느껴졌다. 세심한 배려와 존중의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정책적 고려도 간단히 생략됐다. 여기서는 칸막이 행정이 그 실력(?)을 발휘한다. 보건소의 방문보건팀은 가가호호 방문하며 고혈압과 당뇨 환자들에게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주지시키면서 실행하도록 체크하고 독려한다. 하지만 그 뒤로 방문하는 복지관의 노인·장애인 밑반찬 배달은 먹지 말아야 하는 바나나우유, 빵류 등을 전달하며 방문보건팀에서 주지시킨 이야기를 간단히 어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보건소와 주민복지과가 충분한 소통을 했다면 질병에 맞는 맞춤형 친환경 로컬푸드를 배달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늘 단골 핑계 메뉴인 예산과 인력 문제로 돌려진다.
영양플러스도 마찬가지다. 이왕이면 콘플레이크보다 서리태를, 오렌지주스보다 과일즙을 주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나마 배달하는 농산물도 지적을 했더니 최근에 지역 농산물로 바꿔줬다. 영양소와 칼로리에 갇혀, 로컬과 친환경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보건·복지 행정이 농업 행정과 함께 조금 더 고민한다면 모두 지역 친환경 농산물로 공급하면서 상생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 예산은 아무리 책정을 해도 결국 땅을 살리고 지역 농민을 살리는 데 쓰는 것이니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이뿐 아니다. 소득이 낮은 가정의 어린이들에게 주는 농산물 상품권은 대부분 편의점의 패스트푸드와 연결된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들르는 편의점에서 냉장햄버거, 만두, 삼각김밥, 사발면 등으로 소비된다. 이는 애초 정책 취지대로 어린이들의 먹거리 건강을 담보하는 것까지는 아예 생각하지 않은 결과다. 돈의 흐름과 정책의 과정과 그 결과를 살피지 않는다. 그냥 시행하고 생색을 낼 뿐이다.
다행히 최근 옥천에는 로컬푸드 직매장이 개장을 했다. 다양한 원료 농산물과 가공품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다양한 생산 농가가 결합하고 가짓수가 늘어날수록 이제 노인·장애인 밑반찬과 영양플러스, 청소년 급간식 지원 등에 친환경 로컬푸드가 들어갈 개연성이 높아졌다. 이는 사실 30년 지역 운동의 작지만 큰 성과이기도 하다. 먹을거리는 공공재다. 옥천에서 자급의 기치를 내걸고 농민으로부터 시작한 로컬푸드 혁명이 전국으로 확산되길 빌어본다.